1. 『삼국사기』 고구려 관련 기사
1. 『삼국사기』 고구려 관련 기사
1) 『삼국사기』 고구려 관련 기사 개요
(1) 『삼국사기』 개요
『삼국사기』는 1145년경에 김부식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의 역사서다. 편찬체제는 기전체(紀傳體)이며,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 12권), 지(志) 9권, 표(表) 3권, 열전(列傳)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기의 권수만으로 보면 삼국시대 신라는 5권에 불과하여 전체적으로는 고구려본기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잡지(雜志)라 하였으나, 그 내용은 지(志)이다. 1권은 제사(祭祀)와 악(樂), 2권은 색복(色服)·거기(車騎)·기용(器用)·옥사(屋舍), 3~6권은 지리지(地理志), 7~9권은 직관지(職官志)인데, 지리지가 4권으로 큰 비중을 갖고 있다.
지, 표, 열전은 중국 사서와 비교할 때 그 내용이 빈약하고 간소한데, 삼국에서 전승되는 자료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지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신라 관련 기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각 지에서 고구려와 관련된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다. 표는 박혁거세 즉위년(기원전 57)부터 경순왕 9년(935)까지를 연표 3권으로 나누고 있다. 열전 10권 중 김유신열전이 3권을 차지하며, 나머지 68명의 열전을 7권에 포함시키고 있다. 열전 중 고구려의 인물로는 4권의 을지문덕, 5권의 을파소, 온달, 9권의 창조리와 연개소문이다.
『삼국사기』는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 아래 8명의 참고(參考)와 2명의 관구(管句) 등 11명의 편사관에 의해서 편찬되었다. 이들 10명의 편찬 보조자들은 어느 정도 독자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했을 것으로 보인다. 책임편찬자인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 논찬(論贊), 사료의 취사선택, 편목의 작성, 인물의 평가 등을 직접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은 ‘서술하되 짓지는 않는다(述而不作)’라는 전통적인 역사서 편찬태도를 견지하였다고 짐작된다. 따라서 일단 고구려본기의 기사도 편찬자들이 참고한 저본자료가 상당 부분 그대로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저본자료인 고기(古記)에 대해 “고기는 표현이 거칠고 졸렬하며 사건기록이 빠진 것이 있다(其古記, 文字蕪拙, 事迹闕亡)”라고 하였기에, 내용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찬 술자가 고기의 문장을 세련된 문장으로 개변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삼국사기』기사에 대한 사료비판 시에 유의해야 할 점이다.
(2) 『삼국사기』 초기 기사의 신빙성 문제
『삼국사기』 권13~권22까지 10권으로 편찬된 고구려본기 기사는 고구려사 이해의 가장 기초적 자료이다. 다만 고구려본기 기사가 갖는 사료적 가치 및 기사의 신빙성에 대한 이해, 사료비판의 방법론 등에 대해서는 기존 연구에서 다양한 견해와 상이한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우선 『삼국사기』 초기 기사의 사료적 가치 내지는 신빙성에 대한 의문에서 고구려본기도 자유롭지 않다. 이에 대한 논의는 일제시기 소위 관학파 역사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대체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대하여 불신론을 전개하고 있었다(津田左右吉, 1921; 1922). 그것은 소위 실증적인 방법에 의한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삼국의 국가 형성 시기를 낮추기 위한 의도가 전제되어 있다고 보겠다. 그 이후에도 『삼국사기』 초기 기사의 신빙성 문제는 사료비판의 형태로 제기되었으며, 불신론과 부정론, 신빙론과 긍정론, 절충론 등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노태돈, 1987).
초기 기사에 대한 불신론, 부정론의 입장에서 『삼국사기』 기사의 신빙성 정도를 설정하는 방법으로 널리 행해졌던 것은 일정한 시기를 획정하여 그 이전 시기의 기사를 취신(取信)하지 않는 입장이다. 그 기준으로 많이 사용하는 방법의 하나가 외국 문헌에 어느 왕이 처음으로 등장하느냐를 따져보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개개 기사를 살펴 허구적인 것을 밝혀내어 그러한 기사가 많이 보이는 시기 전체를 불신하는 경우이다. 개개 기사의 신빙성 검증에서는 기사 내용과 표현에서 중국 고전의 문장을 삽입하거나 번안한 것을 가려내는 출전론(出典論)의 방법도 있으며, 대세론(大勢論)의 관점에서 기사의 신빙성을 검토하는 방법도 그동안 행해졌다. 이러한 방법으로 개별 기사의 취신 여부를 판단할 수 있지만, 초기 기사 전체를 일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노태돈, 1987).
부정론을 비판하면서 1970년대에 들어서 초기 기사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이 크게 대두하였다. 주로 고고학적인 연구성과의 축적, 인류학 등 인접 학문의 수용에 따른 상고(上古)사회에 대한 이해 등을 통해 초기 기사를 어느 정도 취신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중 초기 기사에 대한 전면적 긍정론, 즉 신빙론의 입장은 불신론을 극복하기 위한 합리적인 노력이었다는 점에서 평가되지만, 그렇다고 초기 기사 전체를 그대로 취신하기에는 여전히 사료비판의 측면이나 역사상 구성에서 적지 않은 모순이 나타난다. 특히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의 경우에는 같은 시기를 다루고 있는 『삼국지』 동이전의 내용과 상당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절충론이 등장하였다. 절충론은 3세기 중엽 무렵까지의 만주와 한반도의 상황은 동이전에서 살펴보고, 초기 기록에 나오는 사건들의 기년은 재조정해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즉 『삼국사기』 초기 기사 분해론의 입장이다(노중국, 2007).
그런데 백제본기 및 신라본기와 달리 고구려본기의 초기 기사와 『삼국지』 동이전 기사는 서로 보완할 수 있는 측면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4나부(那部)와 5노부(奴部) 기사가 그러하다. 물론 양 기사 사이에 차이가 나는 내용도 적지 않지만, 그렇다고 고구려본기의 초기 기사를 마냥 부정할 수 없다. 오히려 『삼국지』 동이전 기사와의 대교를 통해 고구려본기 국내 전승기록의 신뢰성을 검증하고, 이를 통해 초기 기사가 갖는 성격과 이들 기사를 구성하는 원전 계통을 파악하는 연구 방법이 중요하다.
1980년대 이후 『삼국사기』 초기 기사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면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기사에 근거한 연구가 활성화되었다. 다만 고구려본기 기사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를 보완해 가기보다는 연구자마다 상이한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어, 사료에 대한 입장 차가 초기 고구려사 이해의 기준을 다르게 만드는 측면도 있다. 이른바 신빙론과 절충론의 입장 차가 고구려본기 기사에 대한 해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연구동향이 초기 고구려 정치사 논의에서 ‘부(部)체제론’과 ‘조기(早期)집권체제론’의 논쟁이다.주 001 이는 고구려 국가 형성 과정에 대한 이론적인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기사의 해석 차이에서 비롯하는 측면도 적지 않다. 또한 이러한 사료 해석의 입장 차이는 북한 학계의 경우에는 봉건적인 영주제론과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론으로 나뉜 바 있다. 이러한 연구현황은 고구려사를 구성하는 실증적 방법론으로서 사료의 해석기준을 마련하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임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현단계에서는 고구려본기 기사의 형성 과정 및 사료 성격을 이해하는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임기환, 2004).
이렇듯 고구려본기 기사의 사료 성격이나 신뢰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의가 여전히 평행선을 걷고 있는데, 이에 대해 보다 합리적인 해답을 얻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현 고구려본기를 구성하고 있는 기사의 원전자료를 추적할 필요가 있다. 물론 고구려본기의 원전자료에 대한 탐색이 직접적으로 기사의 신뢰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본기의 형성 과정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거나, 고구려본기 기사의 계통성을 파악하게 되면 각 기사에 대한 보다 합리적인 이해와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3) 『삼국사기』 이전의 삼국사 편찬
『삼국사기』 편찬 이전에도 삼국의 역사를 다룬 사서 편찬이 이루어졌다. 이들 사서에 대한 기록을 보면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권17에는 ‘해동삼국사(海東三國史)’라는 서명이,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는 ‘구삼국사(舊三國史)’라는 서명이, 일연의 『삼국유사』 권5 피은(避隱)8 신충괘관(信忠掛冠)조에는 ‘전삼국사(前三國史)’라는 서명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 세 사서가 모두 ‘삼국사’라는 동일한 사서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책은 고려 전기에 편찬된 삼국사 관련 사서로서 후일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데 많이 이용되었고,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함에도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판단된다(정구복, 1993). 이 책의 본래 명칭은 ‘삼국사’일 텐데 통상 학계에서 ‘구삼국사’로 부르기 때문에 이 글에서도 『구삼국사』로 통칭하기로 한다.
『삼국사기』에는 『구삼국사』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고기(古記)’라고 칭한 자료는 『구삼국사』를 염두에 두고 쓴 것으로 보고, 『삼국사기』는 『구삼국사』를 기초자료로 삼아 보완, 수정하였다고 판단하는 견해가 통설이다(정구복, 1993; 전덕재, 2018).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기간이 짧았을 뿐만 아니라 사료의 수집에 많은 노력을 들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점을 논거의 하나로 들고 있다. 그러나 『구삼국사』와는 다른 고기류, 지리지 고구려조에 언급된 ‘본국고기(本國古記)’가 주요 저본자료였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이전에 『구삼국사』와는 또 다른 삼국사 편찬이 있었다고 추정하였다(임기환, 2006).
그러면 통설에 따라 『삼국사기』의 주 저본자료인 『구삼국사』에 대해 살펴보자. 현전하는 유일한 『구삼국사』의 기사는 이규보가 지은 『동명왕편』의 세주 기록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삼국사’ 관련 내용을 검토하면서 『구삼국사』의 성격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스에마쓰 야스카즈는 『구삼국사』가 본기만을 갖추고 즉위년 연대 표기와 간지(干支)가 사용되었음을 지적하였다(末松保和, 1966). 다나카 도시아키는 『삼국사기』의 동명왕 기록은 『위서(魏書)』의 기록을 기본으로 하면서 『구삼국사』의 동명왕본기 자료를 이용하였음을 밝히고, 『삼국사기』 지리지4의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서 보이는 ‘본국고기’, 직관지의 ‘본국고기’를 『구삼국사』로 추정하였다(田中俊明, 1977). 그리고 『구삼국사』는 본기와 열전을 갖춘 기전체의 역사서로 추정하였다. 김석형은 『삼국사기』 진성왕 원년조의 주 및 김유신열전에 언급된 ‘본기’는 『구삼국사』의 본기를 지칭한다고 보고, 『구삼국사』는 본기와 열전, 표와 지를 갖춘 사서로 추론하였다(김석형, 1981).
한편, 『구삼국사』를 포함하여 삼국사를 편찬하는 데 저본자료가 되는 것에는 고구려본기의 경우 고구려시대부터 남겨진 자료, 즉 고구려인들에 의한 편찬된 사서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인들이 편찬한 사서명이 전한다.
이 기사는 ‘유기(留記)’ 100권이 전하고 있었으며, 영양왕 대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고사(古史)를 축약하여 ‘신집(新集)’ 5권을 새로 편찬하였음을 전한다. 그런데 유기 100권의 편찬 시점에 대해서는 대략 고구려 국가체제가 정비되는 소수림왕 대 무렵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 점은 현재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사가 봉상왕·미천왕 초년 기사를 경계로 하여 그 이전의 기사와 그 이후의 기사 성격이 크게 달라지는 점에서도 대략 짐작해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 신집 등의 사서가 어떠한 형태로든지 통일신라나 고려 초까지 전해지면서 당시에 편찬되었던 삼국사 관련 사서에 반영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추정이 가능하다.
한편 고구려 당대의 사서 편찬과 관련해서는 고구려본기에 전하는 왕호(王號)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본기에는 2종의 왕호가 전하고 있는데, 본문 왕호와 분주 왕호이다. 분주 왕호가 고구려 전기부터 사용한 왕호라면, 본문 왕호는 6세기 중반 영양왕 대에 ‘신집’을 편찬하면서 분주 왕호를 개명하여 성립한 왕호일 가능성이 크다(고관민, 1996; 임기환, 2002). 즉 고구려에서 사서 편찬의 과정에 대한 이해는 고구려본기의 원전자료에 대한 탐색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한편 고구려의 건국 전승과 관련된 자료가 다수 남아 있는데, 이에 대한 비교 검토 역시 고구려 당대의 사서 편찬 및 건국 전승기록의 전승 과정, 그리고 그 이후 전승자료의 사서 편찬과 관련하여 중요한 연구방법이다. 현재 고구려의 건국 전승을 담고 있는 자료로는 고구려본기의 건국 전승, 지리지의 건국 전승, 『삼국유사』의 건국 전승,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의 건국 전승 등이 있다. 여기에 백제본기 등에 전하는 백제 건국 전승의 내용도 주몽 전승과 관련하여 검토되어야 한다. 그리고 고구려 관련 사료가 형성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일어났을 문장의 변개 가능성에 대해 탐색해보는 작업도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2) 고구려본기 기사의 구성
고구려본기 기사를 전거자료의 출전 계통 국가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첫째, 중국 사서를 전거로 하는 기사, 둘째, 백제·신라 측 전승자료에 전거를 둔 공유 기사, 셋째 고구려 독자의 전승자료에 의거한 기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중국 사서를 저본으로 하는 기사
중국 사서를 전거로 하는 기사는 다시 두 형태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하나는 중국 사서명을 밝히고 있는 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 사서명을 밝히지 않으나 현존하는 중국 사서와 대교를 통해 중국 사서의 기사를 전거로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사로 나누어진다. 사서명이 밝혀져 있는 자료는 『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위서(魏書)』·『양서(梁書)』·『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북사(北史)』·『자치통감(資治通鑑)』·『괄지지(括地志)』 등으로, 주로 세주에서 고구려본기 본문 기사를 대교하는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이 기사들은 고구려본기 편찬 때에 혹은 그 뒤에 기술되었다.
그리고 『위서』를 제외하고는 중국 사서명이 밝혀져 있지 않지만 고구려본기 본문 기사에도 다수의 중국 사서에서 비롯한 기사가 인용되고 있다(田中俊明, 1982). 그 중 고구려본기 찬술의 전거자료로 주되게 사용된 중국 사서는 『후한서』·『자치통감』·『위서』 등이다. 특히 『자치통감』이라는 새로운 역사서의 도입이 새로운 삼국사로서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된 동기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田中俊明, 1982). 물론 전적으로 『자치통감』 기사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나름의 기준에 따라 기사의 풍부성, 사실의 정확성 등을 고려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예컨대 기년을 확정하는 기준으로 『자치통감』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자치통감』 이외의 사서를 전거자료로 활용한 경우를 보면, 대체로 『자치통감』에는 해당 기사가 없거나, 이들 사서의 기사가 『자치통감』 기사보다 내용이 풍부한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신동하, 1995a). 그리고 본래 중국 사서 문장의 주체와 객체인 중국 왕조와 고구려(我)를 뒤바꾸는 개서(改書)가 있는데, 이는 고구려본기 기사를 편찬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한 결과이다. 긴 문장의 경우에는 문장을 축약하기도 하였는데, 문장을 새로 작성한 것이 아니라 기존 문장의 일부를 탈락시키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런데 동천왕 이전의 기사 중 『한서』, 『후한서』에서 인용한 기사 중에는 『삼국사기』 편찬 시에 인용되었다기보다는 편찬 이전 모종의 사서를 편찬할 때에 『한서』, 『후한서』의 기사를 저본자료로 채택하였고, 이 모종의 사서를 『삼국사기』 편찬 시에 저본자료로 삼은 경우도 발견된다(田中俊明, 1982; 임기환, 2006). 이런 기사는 『삼국사기』 편찬 및 그 이전 삼국사 관련 사서의 편찬 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임기환, 2006).
(2) 백제본기, 신라본기와의 공유 기사
고구려와 백제, 고구려와 신라가 맺는 대외관계 기사는 거의 대부분 각 본기에 동일 사건 기사가 있다. 이를 통상대로 ‘공유 기사’라고 하자. 이 공유 기사의 경우 각 국가별로 관련 전승자료가 있는 경우가 있거나, 어느 한 국가의 전승자료를 기초로 각 본기에서 동일 사건으로 작성한 경우가 있다. 후자의 경우가 더 큰 비중을 갖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 신라본기와의 공유 기사 경우 고구려본기 기사가 원전자료인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고 판단된다.
우선 각 본기에 보이는 동일한 내용 기사에서 어느 본기 기사가 원전자료에 의거해 찬술된 것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즉 각 본기의 동일 기사는 계통이 다른 양국의 전승자료가 각각 별개 원전이 될 가능성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한 본기를 구성하는 자료를 원전으로 해서, 다른 본기에는 주어와 객어만 바꾸어 기사의 내용을 그대로 혹은 약술하는 예가 일반적이다. 어느 기사가 원전자료에 입각한 것인지의 여부는 기사 내용의 상세함으로 판단하는 방법이 적절하다. 그리고 동일한 내용이라고 하더라고 구체적인 기사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경우에는 두 본기를 모두 서로 다른 계통의 원전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기사 내용이 동일한 경우에는 원전의 귀속을 판단하기는 어렵다(이강래, 1997).
삼국 간의 공유 기사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주로 삼국 간 대외관계 기사가 대부분인데, 백제본기나 신라본기를 구성한 백제 계통 혹은 신라 계통의 전승자료를 이용한 것이다. 이런 공유 기사의 경우에는 기사의 내용이 짧고 간단한 경우에는 그대로 인용하였으나, 내용이 긴 경우에는 핵심적인 내용만 간결하게 축약하여 기술하였다. 그런데 이 삼국 간 공유 기사의 경우는 몇 예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백제나 신라 측 전승자료에 입각한 기사로 추정되기에 이를 고구려의 전승 자료로 보기는 어렵다(임기환, 2005; 정호섭, 2011).
(3) 국내 전승자료와 원전의 탐색
고구려본기를 구성하는 기사 중 특히 광개토왕 대 이전 기사의 경우 고구려 국내 전승자료를 저본으로 하는 기사의 비중이 가장 높다. 따라서 이들 기사의 전거 계통성을 추적하는 것이 초기 기사의 신빙성이나 기사의 해석 등에서 중요한 전제가 된다. 즉 고구려본기의 원전에 대한 탐색이다. 이에 대한 연구도 근래에 많이 축적되어 가고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삼국사기』 원전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의 연구에서 시작한다. 그는 『삼국사기』 지리지 삼국유명미상지분조에 실려 있는 지명들의 배열 순서에 주목하였는데, 특히 고구려 후기 중국 사서에 보이는 요동 지역의 성곽 지명들이 여러 그룹으로 나누어 기술되고 있음에 착안하여 이 조의 원전은 적어도 3개 이상의 원전자료가 있다고 추정하였다. 이는 고구려본기의 원전 또한 여러 계통이었음을 시사한다고 이해하였다(井上秀雄, 1968). 이러한 연구방법은 매우 참신한 시도로서 그 타당성을 떠나 고구려본기 원전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 뒤 이러한 방법론에 공감하여 다나카 도시아키는 이 삼국유명미상지분조 자료를 토대로 검토하면서 지리지에 보이는 ‘본국고기’가 『구삼국사』라고 주장하였다(田中俊明, 1977). 이어서 고구려본기 기사 중 중국 사서에서 인용된 기사를 검토하여 고구려본기 편찬의 전거가 된 중국 사서의 다양한 계통을 밝히고, 무엇보다 『자치통감』이 중요한 전거사서가 되었음을 해명하였다(田中俊明, 1982). 이후 삼국유명미상지분조 자료에 근거하여 고구려본기의 원전 연구를 시도한 학자가 고관민이다. 그는 삼국유명미상지분조의 전거자료로서 편년기사체제를 갖춘 사서를 설정하고 이를 통해 고구려본기의 원전을 추구해가는 연구 방법을 시도하고 있으며, 그 편년체 사서가 ‘신집’이라고 주장하였다(高寬敏, 1996).
이러한 일본 학계의 『삼국사기』의 원전에 대한 연구에 자극을 받아 한국 학계에서도 『삼국사기』의 여러 영역에 걸쳐 기초적인 원전 연구가 진행되어 그 성과가 『삼국사기의 원전 검토』(1995, 한국정신문화연구원)로 출간되었다. 그 책에서 신동하는 고구려본기의 인용자료에 대해 검토하였고, 김태식은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자료 계통성에 대해 검토하였다. 이후 신동하, 이강래에 의해 고구려본기의 분주에 대한 검토도 이어졌다(신동하, 1995; 이강래, 2004). 임기환은 고관민이 제기한 삼국유명미상지분조의 전거자료가 편년기사체제를 갖춘 사서라는 주장에 동의하면서, 고구려본기의 초출 기사와 삼국유명미상지분조 지명 사이의 기년상 불일치에 대한 해석을 통해 그 편년체적 사서의 성격에 대해 접근하였다. 이 편년체 사서는 고구려본기 편찬의 저본자료였을 뿐만 아니라, 직관지·제사지의 고구려조를 편찬하는 저본자료였으며, 『구삼국사』와는 다른 사서로 추정하였다(임기환, 2006).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및 각 지의 고구려조에는 ‘본국고기’, ‘해동고기’ 등 『삼국사기』 편찬의 전거자료가 되었을 여러 고기류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 고기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 직관지 고구려조 ‘본국고기’의 성격에 대해서는 『구삼국사』로 보기도 하고, ‘해동고기’로 보기도 하며, 또는 고기(古記) 범칭의 하나라고 보기도 한다. 다나카 도시아키는 『구삼국사』로 보았으나(田中俊明, 1977), 뒤에 『구삼국사』의 일부로 수정하였고(田中俊明, 1982), 신동하는 ‘해동고기’로 보며(신동하, 1995), 이강래는 각국의 ‘고기’를 가르키는 범칭으로 본다(이강래, 1997). 임기환은 ‘본국고기’는 『구삼국사』와는 다른 사서이고, 오히려 ‘해동고기’가 『구삼국사』와 동일한 실체일 가능성을 지적하면서, 고구려본기 및 각종 지 편찬의 기본적인 저본자료가 특정 사서로서 ‘본국고기’라고 추정하였다(임기환, 2006). 전덕재는 ‘본국고기’는 특정한 서명이 아니라 본국 즉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전승자료로서 여기에는 『구삼국사』도 포함되어 있다고 파악하였다. 그리고 ‘해동고기’는 『삼국사기』 본기의 기본원전인 『구삼국사』와는 다른 전적이었다고 추정하였다. 또한 삼국유명미상지분조 고구려 지명의 경우 지리지 찬자가 『구삼국사』 이외에 ‘신집’을 기본원전으로 하는 어떤 전승자료를 참조하였다고 파악하였다(전덕재, 2018; 2021).
고구려본기에 보이는 국내 전승 기사는 대부분 고기 기사를 인용하여 편찬하고 있다. 그러나 산재된 여러 ‘고기’ 자료를 재구성하였다기보다는 편찬의 주된 저본자료가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나머지 고기류를 보완하여 편찬한 것이다. 『삼국사기』 편찬의 기본 저본자료를 『구삼국사』로 판단하고 있음은 통설이다. 고구려본기의 경우에도 『구삼국사』가 기본 저본자료라고 보고 있다(정구복, 1993; 전덕재, 2018).
한편 고구려본기 기사 중에서 수사적(修辭的) 표현을 검토하여 고구려본기 기사의 성격을 동명왕조, 유리왕조~봉상왕조, 미천왕조 이후 등 세 시기로 나누어본 견해가 있다(조우연, 2019). 이러한 견해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서 고구려본기 기사 자체에 대한 문장 분석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동안 고구려본기나 열전에 실려 있는 문헌자료는 주로 역사학의 입장에서 고구려사를 해명하는 자료로 활용되어 왔다. 앞으로는 한문학의 입장에서 『삼국사기』에 전하는 기사들이 고구려 당대의 문자자료로서 어느 정도의 원형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고구려본기 신대왕2년조에 보이는 신대왕의 하령(下令) 문장은 당대 문장으로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 이 문장은 한문 문장 구사나 고사의 인용에서 매우 세련되어 있다. 그래서 이 문장이 김부식 등에 의해 저작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佐立春人, 1992). 하지만 고구려본기나 열전의 편찬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저본자료를 충실히 인용하고 있는 태도를 볼 수 있으며, 부분적으로 저본자료의 개변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단순한 내용 요약 등 매우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인이 남긴 본래 문자자료의 성격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구려시대의 사서 편찬으로부터 시작하여 통일신라와 고려 전기를 거쳐 최종적으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가 찬술되기까지 자료의 형성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3) 지 및 열전의 고구려 관련 기사
(1) 지
『삼국사기』 권32~권40 잡지에는 각 지(志)의 주제별로 고구려 관련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주로 고구려본기의 해당 내용 기사나 중국 사서에서 해당 내용을 발췌하여 정리한 기사가 대부분이다. 다만 제사지의 고구려 제사 관련 기록에서 보듯이 고구려본기의 내용과 다소 다른 부분이 있으며, 여러 고기에 의거하여 고구려본기에 전하지 않는 사실을 전하는 잡지도 있기에 사료적 가치가 적지 않다. 각 지 별로 살펴보자.
먼저 제사지 고구려조의 경우 고기를 저본자료로 하는 일부 기사에서 고구려본기의 기사와 비교할 때 다소 출입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고구려본기의 저본자료와는 동일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 제사지 고구려조에서 인용한 중국 측 사서를 보면 『후한서』·『북사』·『양서』·『신당서』 등 특정 사서가 선택되었다. 제사지 고구려조 찬자는 비슷한 내용을 전하는 중국 측 사서가 여럿인 경우, 상대적으로 편찬 시기가 늦은 쪽의 기록을 선택하여 전재하였고, 유교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례를 배제한 것으로 추정된다(강진원, 2015).
지리지 고구려조 기사를 살펴보자. 서문에 해당되는 기사에는 고구려 천도와 관련하여 그 변화 과정을 요약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 기사의 내용은 고구려본기에 보이는 천도(이거, 이도)의 양상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 지리지 기사와 본기 기사의 차이를 분석하여 여러 천도 기사의 전거자료의 계통성을 대략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이 지리지 기사에 보이는 ‘고인기록(古人記錄)’은 저본자료로 추정되는 어느 특정 고기나 사서를 가리키고 있다고 추정되는데, 그것은 고구려본기 그 자체도 아니고, 또 고구려본기를 작성하는 주된 저본자료와도 달랐음을 시사한다. 지리지의 저본자료인 ‘고인기록’과 고구려본기 찬자가 참고한 저본자료가 다른 자료였음은 평양성 도읍 기간 기록에 차이가 있음에서도 확인된다. 전체적으로 고구려본기나 지리지 편찬 시에 최소한 4종의 고기류가 전거로 활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임기환, 2018).
지리지에 보이는 고구려 지명 관련 자료는 영역이나 지방통치, 언어 등을 추적하는 자료로도 활용되고 있다. 지리지에서 찾아지는 고구려 지명은 두 계통의 자료가 있다. 하나는 권35 지리지2 신라조에 보이는 지명으로서 한주, 삭주, 명주의 3주가 본래 고구려 지역이라고 하면서 고구려의 지명과 이에 대응하는 신라 경덕왕 때 개명한 지명을 전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권37 지리지4 고구려조에 보이는 지명으로, 고구려의 본래 지명인데 여기에는 이명(異名)이 전하고 있다. 양 기사는 상당 부분이 일치하지만 일부 지명이나 읍격, 그리고 지명의 배열이나 영속 관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는 양 자료의 원전이 다른 데 기인한 것이다. 권35 신라조의 기사는 통일신라 문성왕 대 이후 신라 말기까지의 상황을 반영하는 자료이다. 이와 달리 권37 고구려조 기사와 관련된 원전의 성립 시기를 살펴보면 그 상한을 경덕왕 7년(748)으로, 하한을 흥덕왕 대로 볼 수 있다(김태식, 1997). 즉 이 두 자료는 모두 8세기 중반~9세기 중반인 통일신라시대에 작성된 것이다. 따라서 양 자료가 어느 정도 고구려 당대의 지명을 반영하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나 지리지의 고구려 관련 군현 기사를 통일신라시대에 가상으로 만들어진 결과물로 볼 수는 없다. 예컨대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지만 한강 유역 일대에서 발견된 금석문 자료에는 이 지리지에 기록된 고구려 군현명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하남시 선리(船里)에서 수습된 ‘매소홀(買召忽)’· ‘율목(栗木)’· ‘매성(買省)’명 기와, 포천 반월산성의 ‘마홀(馬忽)’명 기와, 호암산성 출토 ‘잉벌내(仍伐內)’명 청동숟가락 등이 그것이다. 이런 유물로 보아 지리지의 고구려 군현명은 사실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지리지의 고구려 군현 관련 두 자료 중에서 그 원전이 성립한 시기 또는 고구려 당시의 지명을 전하는 내용의 양 등에서 볼 때, 이 두 자료 중에서 권37 고구려조에 보이는 지명이 고구려 본래의 지명에 가까운 자료로 이해하고 있다(임기환, 2007).
고구려 지명이나 지방통치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또 다른 지명 자료로는 권37 지리지4에 실려 있는 ‘목록(目錄)’에 기록된 압록수 이북의 31개 성명(城名)이 있다. 이 목록은 667년에 당군에 의하여 작성된 것으로 각 성명에 “본(本)-”이라고 하여 고구려어의 명칭이 부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당군의 향도가 되었던 남생(男生) 측이 목록 작성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노태돈, 1996). 그러나 이를 669년 이후 당이 고구려 지역에 기미지배체제를 설정할 때 작성된 자료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이 목록에 보이는 ‘미항성(未降城)’ 등을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반당저항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파악하면서, 이 자료를 고구려 부흥운동 사료로 활용하고 있다(김강훈, 2016; 2018; 방용철, 2018).
(2) 열전
『삼국사기』 열전에는 고구려 인물로서, 권44 을지문덕, 권45 을파소, 명립답부, 온달, 권49 창조리, 연개소문 등이 있다. 그리고 신라와 백제 인물열전 중 전쟁 관련 기사 중에 고구려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그 외 도미열전의 ‘천성도(泉城島)’ 지명처럼 고구려사와 연관하여 희소하지만 놓칠 수 없는 자료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고구려 인물들의 열전을 편찬하는 방식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을지문덕전, 을파소전, 명립답부전, 창조리전 등은 그 내용이 고구려본기 내의 관련 기사와 거의 동일하거나 유사하다. 아마도 이들 열전은 고구려본기를 완성한 후 열전으로 편찬한 인물을 선정하고 관련 기사를 발췌하여 구성, 편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고구려본기를 편찬하는 저본자료와 열전을 편찬하는 저본자료가 동일하거나 서로 공유한 자료일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좋은 예로 『삼국사기』 권45 명립답부전의 내용은 고구려본기 신대왕8년조와 거의 동일하지만 앞 문장에 차이가 있는데, 이는 고구려본기 편찬이 완료된 후 이에 근거하여 열전이 편찬된 것이 아니라 고구려본기 편찬에 사용된 저본자료에 근거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임기환, 2006).
이와는 달리 고구려본기를 저본자료로 편찬된 열전도 상정할 수 있다. 『삼국사기』 권49 창조리전을 보면, 그 내용이 고구려본기의 봉상왕9년 8월조와 거의 동일하다. 그런데 고구려본기의 미천왕 즉위년조 기사가 창조리전에는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창조리전의 편찬은 고구려본기에 의거하였음을 알 수 있다(임기환, 2006). 즉 『삼국사기』 열전의 편찬 과정에는 일정한 시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창조리전과 같은 권으로 묶여 있는 개소문전에는 “(당) 태종의 거병과 친정의 일은 고구려본기에 갖추어져 있다”란 문장이 있는데, 이는 고구려본기 편찬 이후에 이를 참고하면서 개소문전이 찬술되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같은 권으로 묶여 있는 창조리전 역시 고구려본기 편찬 이후 본기를 저본으로 편찬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창조리전과 개소문전으로 구성된 권49는 일종의 반역열전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본기와 열전을 모두 편찬한 이후에 새로 추가된 열전으로 이해된다(임기환, 2006).
이와는 전혀 달리 고구려본기 혹은 고구려본기의 저본자료와 무관한 열전도 있다. 온달전의 경우다. 온달전에는 고구려본기에 관련 기사가 없다. 즉 고구려본기를 편찬하는 저본자료에 온달전의 저본자료가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온달전의 ‘평강왕(平岡王)’, ‘양강왕(陽岡王)’이라는 왕명이 고구려본기의 왕명과는 다른 표기라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온달전의 원전에 대해서는 신라 김대문(金大問)이 지은 ‘한산기(漢山記)’일 가능성을 지적한 견해가 있다(이도학, 2017). 온달전의 문장에 대해서는 일찍이 한말의 한학자 김택영(金澤榮)이 “조선 5,000년 이래 최고의 명문”이라고 평한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