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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삼국유사』 고구려 관련 기사

2. 『삼국유사』 고구려 관련 기사

1) 『삼국유사』 개요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 승려 일연이 고조선부터 후삼국까지의 역사자료를 모아 편찬한 역사서이다. 『삼국유사』에서 ‘인각사 주지 일연’이라고 찬자의 이름을 밝혀 놓은 곳은 권제5 신주 제6의 첫머리뿐이다. 또 권3, 권4의 본문 말미에는 ‘무극기(無極記)’라고 덧붙인 구절이 있다. 무극은 일연의 제자였다. 이로 인하여 찬술 주체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지만, 일연이 평생 모은 자료를 모아 엮은 것이 『삼국유사』이며, 뒤에 그 제자 무극이 덧붙인 구절이 포함되어 책자로 제작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통설이다(하일식, 2016).
『삼국유사』의 구성을 보면, 총 5권 2책인데, 권의 구분과는 별도로 왕력(王歷), 기이(紀異), 흥법(興法), 탑상(塔像), 의해(義解),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 등 9편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체제는 ‘사(史)’가 갖는 체제와 형식의 제약을 벗어나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한 자유로운 형식의 역사서를 의도한 결과이다. 그런 점에서 ‘유사(遺事)’라는 책이름은 일연이 의식적으로 붙인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유사』의 항목 중 왕력은 삼국·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다. 그런데 왕력과 본문을 합쳐 순차적으로 권 번호가 붙어 있지 않을 뿐더러, 왕력에는 본문과 일치하지 않는 내용도 더러 있다. 그래서 일연이 왕력을 직접 작성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이 널리 공감을 얻고 있다(하일식, 2016). 기이 편은 고조선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57항목으로 서술하였는데, 권1, 권2에 계속된다. 기이 편의 서두에는 이 편을 설정하는 연유를 밝힌 서(敍)가 붙어 있다. 흥법 편에서 효선 편까지는 대부분 불교와 관련된 내용이다.
여기서 『삼국유사』 판본을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그동안 『삼국유사』를 문헌자료로 활용할 때, 주로 1512년(중종7) 경주부에서 『삼국사기』와 함께 간행한 5권 2책 임신본(壬申本)에 의거하였다. 이보다 앞서 조선 초기에 간행된 판본이 있지만, 완질이 없이 일부씩 흩어져 전하고 있으며, 그 대부분이 아직 공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공개된 파른본 『삼국유사』는 국보 제306호로 지정되어 있는 학산본 『삼국유사』(3~5권)의 전반에 해당하며, 왕력부터 권2 끝까지 낙장 없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파른본은 임신본보다 앞서 간행된 조선 초기본이다. 특히 파른본은 그동안 임신본에서 판독하기 어려웠던 글자나 착오와 혼란을 교정할 수 있는 정확한 내용이 많아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희귀한 자료이다. 임신본 왕력이 파른본 왕력과 전혀 다른 판본으로 양자 사이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으므로, 앞으로는 왕력의 활용에 파른본에 의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하일식, 2016).
 
2) 고구려 관련 기사 개요
『삼국유사』에서 고구려 관련 기사는 여러 형태로 기술되고 있는데, 먼저 이에 대한 기술 내용이나 양식부터 살펴보자. 첫째, 고구려사 관련 내용의 주제 및 분량의 비중을 고려하면 대략 다음과 같이 두 형태로 나눌 수 있다. 고구려와 관련된 내용이 본격적으로 하나의 편목을 이루고 있는 기사인가, 아니면 관련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는 기사인가로 나누어볼 수 있다. 둘째, 고구려 관련 기사가 『삼국유사』의 본문에 기술되고 있는가, 분주에 기술되고 있는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셋째, 인용 전거를 제시하고 있는 기사인가, 아니면 인용 전거가 밝혀져 있지 않은 기사인가로 나누어볼 수 있다(하정용, 2009). 이러한 구분은 고구려 관련 기사가 『삼국유사』에서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지, 혹은 관련 기사의 원전 계통을 파악할 수 있는지의 여부, 그리고 『삼국사기』 등 선행 역사서와 대교할 때 유효한 기준을 제공할 수 있다.
고구려 관련 기사가 『삼국유사』에서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지 계량적으로 살펴보면, 일단 5권 모두에서 관련 기사가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권1 왕력이라는 편목을 제외한 나머지 편목의 138조목 가운데 28조목, 즉 대략 전체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조목에 고구려 관련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가 통일신라시기까지 포함하고 있기에 고구려 존속 시기만을 고려하면 해당 조목은 69개 혹은 74개 조목이 되고, 이 중 고구려 관련 기사가 31개 조목에 등장하고 있어서 대략 42~45%에 이른다(하정용, 2009). 이러한 측면에서 『삼국유사』는 신라사 못지 않게 고구려사에 비중을 두고 관련 주요 사료를 포함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 전거가 인용된 경우를 살펴보면 ‘국사(國史)’가 7회 인용되었는데, 이 외에 2회 인용된 ‘삼국사(三國史)’, 1회 인용된 ‘삼국본사(三國本史)’가 모두 동일 사서라면 총 10회에 이른다. 이 ‘국사’의 실체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다. 『삼국사기』로 추정하는 견해(이강래, 1997), 혹은 고구려본기와 다소 다른 면이 있어서 『구삼국사』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삼국 관련 사서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국사’에는 『삼국사기』의 김부식이 쓴 사론을 이용한 사론이 보이고 있으며, 『구삼국사』에서는 ‘동명왕(東明王)’으로, 『삼국사기』에서는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표현되었는데, ‘국사’에서는 ‘동명성제(東明聖帝)’로 표현된 점, 그리고 『삼국사기』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는 고구려 국호를 ‘고려(高麗)’로 칭한 점 등에서 『삼국사기』 편찬 이후에 『구삼국사』와 『삼국사기』를 절충하여 편찬한 사서로 보고 있다. 이 ‘국사’는 원에 바칠 목적으로 충렬왕 12년에 직사관(直史館) 오량우(吳良遇)에 의하여 편찬된 책으로 추정하였다(정구복, 1993). 『삼국유사』에 인용된 ‘국사’의 실체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논의가 필요하다.
고구려계 원전으로 보이는 자료로는 단지 ‘고려고기(高麗古記)’가 있는데, 아마도 『삼국유사』 편찬 시기에는 고구려계 원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라계 원전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현상을 『삼국유사』에 소재한 고구려 관련 기사의 사료적 한계점으로 보기도 한다(하종용, 2009).
 
3) 항목별 검토
이상 『삼국유사』 고구려 관련 기사의 기본적인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고구려 관련 기사가 일부 포함되는 편목을 모두 검토할 수는 없기 때문에, 본격적인 하나의 주제를 이루며 고구려 관련 기사가 집중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조목만 살펴본다. 그 조목은 다음과 같다.
권1 왕력(王曆)
권2 기이(紀異):북부여(北扶餘), 동부여(東扶餘), 고구려(高句麗)
권3 흥법(興法):순도조려(順道肇麗) 아도기라(阿道基羅), 보장봉로(寶藏奉老) 보덕이암(普德移庵)
권4 탑상(塔像):요동성육왕탑(遼東城育王塔), 고려영탑사(高麗靈塔寺) 
 
(1) 왕력
왕력은 중국의 연표와 함께 고구려·백제·신라·가락국의 왕실 세계(世系)와 기년(紀年) 및 간략한 치적이나 역사적인 사건을 제시하고 있다. 찬술의 형태를 보면 신라(羅), 고려(麗), 백제(濟), 가락(洛)으로 칸을 나누어, 역대 왕에 관한 내용을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후반부에서는 궁예의 후고려와 견훤의 후백제에 관한 내용도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그런데 이 왕력의 내용은 『삼국유사』의 다른 편목과 여러 측면에서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어, 일연의 찬술이 아닐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왕력의 내용에서 보면 일반적인 사서의 연표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는데, 왕력이라는 편명 자체는 독창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왕력은 『삼국유사』의 첫머리에 “왕력 제1(王曆 第一)”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통상 역사서의 연표와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이 왕력에서 고구려 관련 기사는 고구려 왕 계보 및 해당 왕의 간략한 내력 서술이다. 왕호의 경우를 보면, 고구려본기의 왕호가 본문계 왕호와 분주계 왕호로 나누어진다고 보면, 왕력의 고구려 왕호는 대체로 본문계 왕호인데, 산상왕, 중천왕 두 왕호가 탈락되어 있고, 몇몇 왕호의 경우 글자에 출입이 있다(고관민, 1996; 임기환, 2003). 왕력을 찬술할 때 주요 저본자료가 고구려본기라고 확정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고구려본기가 아니라면, 최소한 고구려 전체 왕계와 왕호, 즉위와 사망 관련 내용이 정리된 모종의 역사서가 존재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2) 기이
기이에 실려 있는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조의 주요 내용은 주몽 전승이다. 즉 『삼국유사』에는 주몽 전승 관련 자료가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조로 나뉘어 기술되어 있다. 이 기사들은 내용상으로 보면 『구삼국사』 및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전하는 주몽설화와 그리 다르지 않지만, 구체적으로는 일정한 차이점도 나타나고 있어, 또 다른 주몽 전승 관련 자료의 존재를 시사한다.
『삼국유사』 고구려조에 보이는 ‘국사고려본기(國史高麗本記)’는 곧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가르키는 것으로, 그 문장과 내용이 전체적으로 거의 동일하다. 다만 첫머리 기사는 고구려본기와 다른 계통의 자료를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 동부여조의 기사도 고구려본기에 의거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북부여조에 보이는 ‘고기’가 어떤 사서를 가르키는지는 불분명한데, 고구려본기나 『구삼국사』 전승과는 내용상 일정한 차이가 있다. 이 두 사서와는 또다른 저본자료에 근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삼국유사』 고구려조의 세주에 보이는 ‘단군기(壇君記)’ 및 그 내용 역시 고구려본기와는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다.
다만 『삼국유사』 기사에서 공통점으로 나타나는 것은 북부여 인식이다. 즉 고구려본기에 의거한 기사인데, 고구려본기에 “부여왕 해부루(扶餘王解夫婁)”라고 되어 있음에도 『삼국유사』에는 “북부여왕 해부루(北扶餘王解夫婁)”로 기술하고 있다. 이는 편찬자인 일연이 갖고 있던 선입관에 의해 바뀐 것이다. 그러면 일연이 갖고 있던 ‘북부여왕 해부루’라는 인식은 어느 자료에 근거한 것인지 탐색되어야 한다. 고구려본기 및 그 편찬의 저본자료인 『구삼국사』, 그리고 지리지 삼국유명미상지분조의 저본자료, 『위서』고려전 등 어디에도 ‘북부여’에 대한 인식은 찾아볼 수 없다. 일연의 북부여 인식은 다름 아닌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시조 전승과 관련된 자료에서 비롯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임기환, 2009).
 
(3) 흥법
고구려 불교사 연구의 주 자료는 『삼국유사』와 『해동고승전』에 수록된 고구려 불교사 관련 기사이다. 그 외 『삼국사기』와 중국 정사류, 고승전류 등 중국 문헌기록, 그리고 『일본서기』 등 일본 측 기록 등이 있다. 물론 고구려 불교사와 관련한 자료가 매우 제한적이고 그 내용도 단편적이고 소략하기 때문에 고구려 불교의 전모를 알 수는 없다. 그동안 고구려 불교 전래 및 수용과 의미, 불교신앙, 승려들의 활동과 삼론종, 고구려 말기 사상계의 추이 등이 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정호섭, 2018). 『해동고승전』의 고구려사 관련 기사는 여기서 『삼국유사』 관련 기사와 함께 검토하기로 한다.
『삼국유사』순도조려조는 고구려의 불교 전래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승전’과 ‘고려본기’를 인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승전은 보통 『해동고승전』으로 이해되는데, 내용상 약간의 차이는 있다. 즉 이도(二道)가 위(魏)에서 왔음을 ‘승전’에서 전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해동고승전』에는 순도(順道)는 진(秦)에서 왔으며, 아도(阿道)만이 위(魏)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고려본기’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로 이해되는데, 현존하는 고구려본기 기록과 약간 차이가 있다. 이때문에 고려본기를 『구삼국사』와 같은 사서로 이해하기도 한다(신종원, 2006). 『삼국유사』가 『해동고승전』에 기록된 일부 내용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서술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합리적인 고증을 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이기백, 1987).
『삼국유사』와 『해동고승전』의 불교 전래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은 거의 동일한 편인데, 다만 순도와 아도의 출자에 대해 서로 다른 기록이 보인다. 『해동고승전』에서는 순도의 출자를 진(秦), 동진 등으로 기록하고 있고, 아도는 위에서 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아도가 동진에서 온 것으로 적고 있기에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순도에 대해서는 전진 출자설이 유력하다고 보고, 아도는 동진에서 왔을 것이라는 추정이 통설이다. 아도기라조에 보이는 고구려 불교 전래 기록도 차이가 있다. 『해동고승전』에도 동일한 기록이 보인다. 최치원의 희양산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曦陽山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에도 담시(曇始)에 대한 유사한 인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헌기록상으로 보면 고구려본기 및 『삼국유사』 흥법 편 초반부에 불교의 초전이 기록되어 있는 반면, 중국 측 사료에는 대부분 불교의 초전자를 담시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 찬술자는 오히려 담시가 아도, 묵호자, 마라난타(摩羅難陀) 세 사람 중 한 사람인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였다. 담시가 그 사적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삼국유사』에서 별도의 조목을 설정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 때문인 것으로 본다.
보장봉로 보덕이암조에 보이는 ‘고려본기’는 역시 고구려본기 혹은 『구삼국사』로 추정된다. 다만 고구려본기로 볼 경우 “국인이 오두미교를 신봉했다”는 기사는 고구려본기에는 보이지 않으며, 따라서 고구려본기 기사를 그대로 인용했다기보다는 내용을 축약, 정리하여 인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구삼국사』 기사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보덕이 백제로 이주한 시기와 관련해서는, 본문에는 영휘(永徽) 원년 경술년(650) 6월로, 분주에서는 ‘본전(本傳)’을 인용하여 건봉(乾封) 2년 정묘년(667) 3월 3일로 기록하고 있다. ‘본전’은 최치원의 보덕전으로 추정된다. 본 기사의 마지막에 나오는 ‘승전’은 『해동고승전』으로 추정된다. 한편 보덕의 백제 이주 시기와 관련된 서로 다른 기록에 대해서는 650년은 고구려를 떠난 시점으로, 667년은 경복사가 완성되어 이주가 완전히 마무리된 시점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노용필, 1989),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에서 언급한 650년을 정확한 시점으로 상정하고 667년은 보덕전을 쓴 최치원의 인식에 의한 것으로, 최치원이 보덕의 이주와 고구려 멸망을 연결하였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김주성, 2003).
 
(4) 탑상
요동성육왕탑에서 인용한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은 도의(道宣)가 664년에 편찬한 『집신주삼보감통록(集神州三寶感通錄)』의 기록과 거의 동일하므로 같은 책으로 추정한다. 『삼국유사』에서는 ‘삼보감통록’이라고 적고 있다. 내용은 고구려 성왕(聖王)에 의해 요동성에 아육왕탑이 건립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보이는 고구려 성왕에 대해서는 고국양왕이 요동으로 진출한 후 순행하면서 만든 탑일 가능성을 지적한 바 있으나(김선숙, 2004), 대체로 학계에서는 성왕을 광개토왕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정선녀, 2007; 윤세원, 2014). 또한 ‘성왕’은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면서 5세기 초반경의 광개토왕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조경철, 2008; 윤세원, 2014).
이 요동성과 관련해서는 평안남도 순천시 북창면 용봉리에 있는 요동성총에 남아있는 요동성도가 참고된다. 요동성총은 4세기 후반경 혹은 5세기 전반경에 축조된 무덤으로 추정된다. 요동성도 중 요동성 밖에 있는 누각 형태의 건물이 요동성육왕탑일 개연성이 지적된 바 있다(장상렬, 1967). 아육왕탑이 중국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설화는 동진 이후에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요동성육왕탑과 관련된 설은 동진시기 이후에 수용된 것으로 추정된다(정호섭,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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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국유사』 고구려 관련 기사 자료번호 : gt.d_0010_0030_00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