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서』·『후한서』·『삼국지』 고구려 관련 기사
1. 『한서』·『후한서』·『삼국지』 고구려 관련 기사
고구려는 기원전 1세기 이전에 나라를 세워, 압록강 중상류 일대를 차지하며 성장하였고, 3세기 무렵에는 중원 왕조의 군현을 밀어내며 요동 방면으로의 진출을 꾀하기에 이르렀다. 고구려의 전 역사에서 볼 때 초기사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국왕을 기준으로 보면 동명성왕으로부터 봉상왕의 재위기간에 해당한다.
이러한 고구려 초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기본이 되는 사료는 물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일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본기 권1에서 동명성왕이 졸본천(卒本川)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을 전하는 가운데 분주(分註)로 “『위서』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이는 고구려본기가 국내 사료를 토대로 하면서도 중국 사서의 기록을 적극 이용하여 편찬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그 내용이 고구려의 건국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중원 왕조가 고구려에 대해 가졌던 관심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에 관한 기사가 처음 등장하는 사서는 『한서』이다. 고구려와 중원 왕조의 교섭은 고구려라는 국가가 세워질 무렵부터 시작되었고, 전한이 그 상대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전한의 사적을 다룬 『한서』에 고구려 관계 기사가 수록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수록된 사적으로는 현도군(玄菟郡)의 설치와 그 호구 수, 수현(首縣)인 고구려현에 관한 내용을 비롯하여, 신(新) 왕조 왕망(王莽)의 인수(印綬) 수여와 고구려병 징발로 인한 충돌사건 등이 있다. 권28하 지리지의 현도군조에는 수현이 고구려현이며 호구 수가 4만 5,006호, 22만 1,845인이라 하였으며, 연지(燕地)조에는 “현도·낙랑군은 무제 때에 두었다. 모두 조선·예맥·(고)구려만이었다”고 전한다. 또한 권99중 왕망전에는 신을 세운 왕망이 흉노 등 주변세력에게 한의 인수를 회수하고 신의 인수를 내려줄 때 고구려도 그 대상의 하나로서 등장하고 있다. 또한 신이 흉노를 치기 위해 고구려병을 징발하려 할 때 호응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고구려후(高句驪侯) 추(騶)가 잡혀 처형되었다고 한다(『한서』권99중).
현도군의 설치로부터 왕망의 신이 고구려병을 징발하려 했을 때까지의 기간은 100여 년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한서』에 기재된 고구려 관계 사료는 4건 정도에 불과하다. 이 점에서 아쉬움이 크지만, 각각의 사료가 전하는 내용은 고구려 초기사 연구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우선 『한서』 지리지의 군국(郡國)별 호구 수는 원시(元始) 2년(서기 2)에 작성된 것이고, 군국별 소속 현의 목록은 원연(元延)·수화(綏和) 연간(기원전 9~기원전 8)에 작성된 것이라고 한다(肥後政紀, 1998). 현도군은 기원전 107년에 설치할 당시 10여 개의 현을 예하에 두었다(田中俊明, 1994). 그러므로 지리지의 이 짧은 기사는 군현이 설치된 지 100여 년이 흐른 뒤 현도군이 상당수의 속현을 포기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어 그 규모가 크게 축소되었음을 알려주며, 나아가 고구려와 한 군현 간의 역관계가 바뀌고 있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또한 신빈(新賓) 영릉진고성(永陵鎭古城)으로 비정되는 고구려현 등 세 속현의 존재는 고구려의 서북 방향으로 퇴축해가던 현도군의 세력 추이와 고구려의 성장세를 가늠하게 해주는 자료가 된다. 아울러 한이 현도군의 수현 이름을 고구려로 하였다는 점에서 현도군을 설치한 주 목적의 하나가 바로 고구려에 대한 통제였음을 보여준다.
『한서』 왕망전은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을 세운 왕망의 일대기이다. 왕망은 한의 여러 정책을 폐기하고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흉노 등 주변세력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 일환으로 왕망은 흉노 선우(單于)에게 사자를 보내 신의 인수를 새로 수여하였다. 전 왕조가 내린 흉노선우새(匈奴單于璽)를 회수하고 신흉노선우장(新匈奴單于章)이라는 신의 인수로 바꾸어 주는 조치였다. 동시에 서역 제국의 수장들에게도 기존의 왕에서 한 단계 낮은 후가 새겨진 인수로 바꾸어 수여하였다(鶴間和幸, 2004). 이때 왕망의 명을 받은 사자는 동쪽으로 현도군·낙랑군과 고구려·부여까지 이르렀다고 전한다. 이 기사는 전한대의 어느 시기에 전한과 고구려가 책봉·조공관계를 맺었고, 그 관계가 신의 수립 시기까지 이어져 내려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고(班固)가 왕망전을 상세하게 기술한 것은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함이었고, 여기에 고구려 기사가 나오는 것도 왕망의 잘못된 대외정책이 사이(四夷)의 이반을 초래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尹龍九, 1998). 12년에 신은 흉노 정벌을 위해 북방의 여러 경로로 공격군을 보냈다. 고구려병의 징발은 이러한 대규모 군사행동과 짝한 것이었다. 하지만 고구려병은 흉노 공격에 나서려 하지 않았고, 왕망의 강경한 진압에 신의 동방 전역이 반발하게 되었다고 왕망전은 전한다. 이 지역세계의 향배와 관련하여 고구려, 부여가 등장하고 있어, 이 기사는 신과 고구려 그리고 부여 간의 역학관계를 보여주는 흔치 않은 자료이다. 적어도 이 무렵까지는 고구려가 지역세계의 패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음도 이를 통해 엿볼 수 있다.
한편 원봉(元封) 5년(기원전 76) 한이 악소년(惡少年)과 죄지은 관리를 징발하여 요동에 둔수(屯守)케 하고, 이듬해에는 요동성·현도성을 축조했다는 기사(『한서』 권7)는 고구려에 관한 직접적인 사료는 아니지만 이 무렵 현도군을 서북방으로 몰아내고 있던 고구려를 상대하기 위한 한의 군사적 대응으로 보인다(權五重, 1995; 余昊奎, 2005). 기원전 75년 한이 현도군 치소를 현재의 신빈 지역으로 옮겼던 조치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요긴한 자료이다.
3세기 중반까지의 고구려에 관한 기사를 서술하고 있는 중국 사서로는 『한서』와 함께 『후한서』·『삼국지』가 있다. 이 가운데 『후한서』는 사료적 가치가 낮다고 평가되어 왔다. 서술시기에 비해 후대의 편찬이면서 그 동이전이 새로운 자료라기보다는 상당 부분 『삼국지』를 전록(轉錄)한 것이라는 점 때문이었다(高柄益, 1970). 더욱이 『후한서』 동이전은 일부 보충 기사를 제외하곤 전적으로 『삼국지』 위지와 배송지의 주문(注文)에 의거하였으며, 전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개악한 곳이 많다는 평가(全海宗, 1980)도 있어서 굳이 여기에 수록된 고구려 관계 기사에 관심을 두어야 할까 망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후한서』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의 초기 왕계, 지리, 풍속, 관제, 생활풍습, 대외관계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 중 후한과 고구려의 대외관계에 관한 기사들은 『삼국지』 등 다른 사서에는 없는 내용이 많다. 『삼국지』와 내용상 차이를 보이는 부분도 있다(기수연, 2005).
건광(建光) 원년(121) 봄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과 현도태수(玄菟太守) 요광(姚光), 요동태수(遼東太守) 채풍(蔡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새(塞)를 나가 예맥을 공격하여 그 거수를 잡아 참수하고 병마와 재물을 노획하였다. 이에 [고구려왕] 궁(宮)은 사자 수성(守成)을 보내 군사 2,000여 명을 거느리고 요광 등에 맞아 싸우게 했다. 수성이 사자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니 요광 등은 이를 믿었다. 수성은 험지에 자리잡고 한의 대군을 막았다. [궁은] 몰래 3,000여 명의 군사를 보내 현도·요동군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태우고 2,000여 명을 살상하였다. …여름에 다시 요동 선비(鮮卑) 8,000여 명과 함께 요대(遼隧)를 침공하여…. _ 『후한서』 권85 고구려전
위 사건에 대해 『삼국지』는 막연히 수안(殤安) 연간이라고 하고 있으나, 위 기록은 121년임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유주자사 풍환의 존재는 『삼국지』 관련 기사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역할은 “유주자사 풍환이 두 군의 태수를 이끌고 고구려·예맥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후한서』 권5)라는 내용을 통해 그가 이 전역에서 후한 측의 지휘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를 상대해 왔던 현도·요동 태수에 더하여 유주자사가 참전하여 지휘했다는 것은 이 전역이 이전과는 성격이나 규모에서 달랐음을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위 기사의 후반부에서 고구려가 요동 선비와 함께 요대를 공격했다는 것 역시 『삼국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후한서』만의 기사이다.
또한 위 기사에 보이는 예맥은 위·촉·오 삼국이 정립했을 때 “고구려와 예맥이 공손연(公孫淵)과 원수가 되어 함께 [공손연을] 침구하고 있다”주 001라는 조위 측의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후한 말에도 존재한 세력이었다. 그러나 『후한서』 고구려열전이나 본기 등에 모습을 보이는 예맥은 정작 『삼국지』에서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위 전역에 대해 기술한 『삼국지』의 관련 기록에서도 예맥의 존재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의 성장과는 별개로 후한의 동북방에서는 예맥·오환(烏桓) 등 여러 세력이 활약하였고, 이들과 고구려, 후한의 관계가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었음을 『후한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고구려본기 찬자가 태조왕 69·70년의 기사로 『후한서』의 관련 기록을 전재(轉載)한 연유이다.
한편 『후한서』 고구려전의 궁-수성-백고(伯固)로 이어지는 왕계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동일하다. 고구려본기의 왕계가 국내의 전승에 따른 것이라고 보면 『후한서』의 관련 기록이 『삼국지』의 그것보다 사실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다소의 오류와 원자료의 변개 문제에도 불구하고 『후한서』 고구려 관련 기록은 해당 시기 고구려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자료임에 분명하다.
서진(西晉)시대 진수(陳壽)가 저술한 『삼국지』에 이르러 고구려 관계 기록은 급증한다. 『삼국지』는 범엽의 『후한서』보다는 오히려 130여 년 앞서 저술되었기 때문에 역사 기술의 선후로 보아 『후한서』에 앞서 고찰되어야 할 사서이다(高柄益, 1970). 특히 진수는 서역 등 당시 삼국과 관계가 있던 다른 외국은 입전하지 않고, 외국전으로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만을 두었다. 어떠한 이유에서 이런 이례적인 저술방식을 택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조위가 동방 경략을 통해 한반도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확보했던 동방의 여러 세력에 대한 풍부한 자료가 있었기에 서술하는 데 편의가 있었음(高柄益, 1970)은 분명해 보인다. 동이전의 서(序)는 조위가 요동의 공손씨를 치고 낙랑군·대방군을 수복하고 고구려를 공략하여 동해에 이르렀던 사정을 기술하고 있다. 관구검(毌丘儉)의 고구려 공격을 비롯한 동방 경략이 당대 중국인에게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불러왔고, 이에 따라 고구려 등 동이의 여러 세력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삼국지』의 고구려 관계 기록은 수록된 분량뿐 아니라 기술내용에서도 전대의 사서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고구려와 중원 왕조 간에 일어난 사건의 서술에 그치지 않고, 지리적 위치, 지세, 국력, 통치형태, 생활풍습 등 고구려라는 국가의 다양한 정보가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정보의 특성상 보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그 실상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 다만 동이전은 중국 삼국시대를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역사적 설명을 하기 위해 넣은 전대에 관한 역사 서술도 있다. 『위략』에 의거한 지리·제도·습속 등의 기사 또한 삼국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全海宗, 1980)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삼국지』는 위지(魏志) 30권, 촉지(蜀志) 15권, 오지(吳志) 20권으로 구성되었는데, 고구려 관계 기록은 동이전이 수록된 위지에 대부분 기술되고 있으며, 오지 손권전(孫權傳)에도 일부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위지 외에 조위의 역사를 다룬 사서로는 위·진 교체기에 어환(魚豢)이 저술한 『위략』과 왕침(王沈)의 『위서(魏書)』가 있는데, 동이전은 『위략』이 주 자료로 이용되었다(全海宗, 1980). 『위략』에 의거한 기사는 동이전 고구려조 경우 49개 가운데 27건이다. 한편 『위략』의 일문과 『한원』 등의 유서(類書)에는 고구려조에 없는 기사도 적지 않다. 『삼국지』 원전에 대한 연구에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와 함께 『삼국지』에는 자료 자체의 문제가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우선 문장이 연결되지 않거나(徐永大, 1991), 난해한 문구가 적지 않다. 고구려 관계 기사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보인다. 하호(下戶)의 성격을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이 있는 “邑落有豪民, 民下戶皆爲奴僕”은 그 하나의 사례이다.
이러한 문제는 진수가 기존 사료를 재정리하면서 간결한 문장으로 서술한 데서 발생하였다. 『위서』와 『위략』이 각각 48권(혹은 44권), 38권(혹은 89권)인 것에 비해 위지는 30권에 불과하여, 기존 사서의 서술내용을 압축했음을 알 수 있다. 진수가 원사료를 요약·정리하여 새로운 문장으로 바꾸다 보니, 그 사료가 가진 원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또한 필사에서 간본(刊本)으로 이어지는 『삼국지』 전승 과정에서 생긴 문제도 있다. 『삼국지』는 1003년 무렵까지 사본으로 전해졌다. 그 뒤로는 인쇄본이 만들어졌는데, 필사 과정에서의 오류와 교각(校刻)·보수가 거듭되면서 문구에 상당한 개변이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진수가 저술한 본래의 문구를 복원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윤용구, 1998). 앞서의 하호 관련 기술에서도 판본에 따라 “名下戶皆爲奴僕”과 “民下戶皆爲奴僕”으로 달리 기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이 2007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점교본 24사 수정본(點校本 二十四史 修訂本)’ 사업의 결과물로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수정본) 삼국지』가 나올 예정이다. 그간의 교감 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작업물이라는 점에서 향후 연구의 기초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주 002
진수의 사료 요약이 가진 한계를 보완하고자 유송(劉宋)의 배송지는 당시 남아 있던 186종의 서적에서 원사료를 인용하여 주석을 달았다. 배주(裴注)라고 불리는 이 주석은 『삼국지』 본문의 3배 분량에 달하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어, 진수의 본문을 보완하는 수준을 넘어 그가 빠뜨리거나 삭제했던 많은 사실을 전하고 있다. 『삼국지』 고구려 관계 기사를 살필 때 본문과 함께 배주의 내용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오지 손권전에 배주로 인용된 『오서(吳書)』주 003의 내용은 233년 무렵 동천왕 시기, 현도태수가 관할하는 호수가 200호에 불과한 제3현도군의 상황과 함께, 손오와 고구려가 교섭했던 사실을 전한다. 공손연에게 속아 억류되었던 손오의 사절이 도주하여 고구려에 이르렀으며, 동천왕이 조의(皂衣) 25명을 보내 이들을 손오로 송환하고 봉조칭신(奉表稱臣)했고, 손권이 동천왕을 선우로 책봉하는 사절을 보내 안평구(安平口)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동천왕이 손권 사자의 목을 베어 조위에 보냈다고 간단히 기술된 사건에 대해 그 배경과 함께 당시 손오와 연계해보려던 고구려의 대외전략을 배주를 통해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은 사료 자체의 이해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중국 사서에 수록된 고구려 관계 기사는 해당 시기 고구려인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 중국 찬자가 전문(傳聞)이나 전대 기록에 의거하여 저술한 기록물이다. 역사적 배경이 다르고 정치·문화가 이질적이었을 고구려에 대해 중국인의 지식으로 이해하고 자국의 용어로 설명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당시 중원 왕조사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는 관련 중국 사서의 고구려 관계 기사를 살피는 데 필요한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서북 변경에 대한 한의 방어시스템(籾山明, 1999; 2021), 삼국시대 주변세력과 위·촉·오의 교섭 내용(關尾史郞, 2023), 『사기』 이래 『삼국지』까지 전사사(前四史)의 성격과 특징(渡邊義浩, 2021) 등을 다룬 최근의 연구는 이 시기 관련 자료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