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구려 중기사 관련 사서
2. 고구려 중기사 관련 사서
1) 『진서』·『자치통감』·『십육국춘추』
『진서(晉書)』는 646년 방현령(房玄齡) 등이 당 태종의 명을 받아 서진, 동진 두 왕조와 오호십육국의 역사를 130권으로 편찬, 정관(貞觀) 24년(648)에 완성되었다. 대상시기로 보아 한참 뒤에 편찬되었던 것이다. 또한 동이전은 상당 부분에서 『삼국지』의 내용을 전록(轉錄)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진서』의 사료적 가치가 낮다고 평가되기도 하였다(高柄益, 1970). 더욱이 동이전에는 부여국을 비롯 10개국, 15개 종족이 입전되어 있지만, 당연히 들어가야 할 고구려조가 빠져 있는 한계가 있다(윤용구, 1998).
그러나 『진서』는 서진 성립 이후 동진이 송(宋)에 선양하기까지 기간을 다룬 정사이다. 특히 30권으로 이루어진 재기(載記)는 이 시기 중국 화북에서 명멸했던 오호십육국의 역사를 각 나라마다 기술한 것으로, 다른 정사에서는 유례가 없다. 『위서』나 『북사』에도 오호십육국에 관한 기술은 있지만, 기술의 양에서 크게 미치지 못한다. 『진서』 재기는 오호십육국시대에 관한 기본사료인 것이다(鈴木桂, 2000).
『진서』 편찬에 이용했던 자료는 십팔가진서(十八家晉書)라고 통칭하지만, 『진서』 재기의 오호십육국 사적은 최홍(崔鴻)의 『십육국춘추』를 기본자료로 하였다. 북위시대에 저술된 『십육국춘추』는 송대에 이미 사라진 상태여서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최홍이 어떤 사료를 이용하여 『십육국춘추』를 펴냈는지 판단할 수는 없지만, ‘패사(覇史)’주 004
각주 004)

라고 분류된 여러 사서가 오호십육국시대에 각국에서 쓰여져 북위 당시까지 상당 수 남아 있었다. 최홍은 이들 사서의 수집과 정리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십육국춘추』를 저술하였다(鈴木桂, 2000). 『십육국춘추』가 오호십육국 각국의 국사를 토대로 했다는 점에서 이를 자료로 삼은 『진서』재기는 사료적 가치가 높다.『패사』는 『수서』 경적지(經籍志) 사부(史部)에 보이는데, 오호십육국시대에 관한 사서를 말한다. 영가(永嘉)의 난 이래 화북과 사천(四川)에서 할거한 여러 국가들은 저마다 국사를 편찬하였고, 그 가운데 23종의 사서가 『수서』에 전한다(眉山智史, 2019). 여기에서 고구려와 관계가 있던 후조·전연·후연·북연의 사서로는 전융(田融)의 『조서(趙書)』 10권, 왕탁(王度)의 『이석전(二石傳)』 2권, 『이석위치시사(二石僞治時事)』 2권, 범형(范亨)의 『연서(燕書)』 20권, 고려(高閭)의 『연지(燕志)』 10권이 있다.
더욱이 『진서』의 고구려 관계 기사는 주로 재기에서 보인다. 즉, 고구려가 상대한 모용선비(慕容鮮卑)·후조(後趙)·전진(前秦)의 군주 석륵(石勒)·모용외(慕容廆)·모용황(慕容皝)·모용준(慕容儁)·모용위(慕容暐)·모용수(慕容垂)·모용보(慕容寶)·부견(苻堅)·풍발(馮跋)·풍홍(馮弘)의 재기에는 봉상왕에서 장수왕 대에 이르는 시기 고구려가 요동과 중원 방면에서 전개한 다양한 사적이 수록되어 있다.
함강(咸康) 7년…모용황은 정병 4만을 이끌고 남협(南陜)으로부터 들어가 우문부(宇文部)·고구려를 정벌하였다. 또한 모용한(慕容翰)과 아들 모용수를 선봉으로 세우고, 장사 왕우(王寓) 등을 보내 1만 5,000의 병사를 이끌고 북치(北置)를 거쳐 진격하게 했다. 고구려왕 조(釗)가 말하기를 “모용황 군대는 북로를 거쳐 올 것이다” 하고는 아우 모용무(慕容武)를 보내 정예병 5만을 지휘하여 북치에서 막도록 하고, 자신은 약졸을 이끌고 남협에서 방어하였다. 모용한이 목저(木底)에서 고구려왕 조와 싸워 크게 격파한 후, 승세를 타고 환도성에 진입하니 조는 홀로 도주하였다. _ 『진서』권109
위 기사는 전연 모용황이 고구려를 공격해왔을 때 그 침공로로 이용한 두 개의 경로, 이른바 ‘남북도(南北道)’에 관한 내용이다. 모용황재기에 수록되어 있는 이 남북도 관련 내용은 11세기에 편찬된 『자치통감(資治通鑑)』 권97에 보다 자세하게 보인다. 또한 『자치통감』의 관련 기사는 『십육국춘추』 전연록(前燕錄)이 자료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田中俊明, 1997). 그러므로 이 사건의 경우에는 『자치통감』 쪽이 더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볼 수도 있지만, 모용황 재기에는 남도와 북도의 명칭이 보이지 않고 남협과 북치 그리고 북로가 보인다. 모용황의 주력군과 고국원왕의 교전이 목저에서 벌어졌다는 내용도 『자치통감』에는 없는 귀중한 정보이다.
『진서』 재기가 『십육국춘추』를 기본자료로 삼아 저술되었음을 고려하면, 모용황 재기의 남북도 관련 기사에만 보이는 명칭 등은 역시 『십육국춘추』의 저본이 되었던 전연록 등의 원사료에서 유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진서』, 특히 그 재기는 이 시기 고구려와 오호십육국의 관계사를 연구하는 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기초자료인 것이다.
한편 모용황 재기에 함강 7년(341)의 일로 전하는 위 사건을 『자치통감』에는 342년의 사건으로 기년하고 있다. 이러한 연대의 차이는 『진서』 재기의 오류에서 빚어진 문제로(鈴木桂, 2000), 『자치통감』의 연대 뿐 아니라 관련 사건의 경위를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그 시기를 확정할 필요가 있다.
위 사건과 관련하여 『자치통감』은 남도와 북도의 명칭뿐 아니라 북도는 넓고 평탄하며, 남도는 험하고 좁다는 경로의 상황을 전한다. 또, 전연군이 북도로 올 것이라 판단하고 있을 고구려의 예상을 뒤집고 모용황이 험하고 좁은 남도로 주력군을 보냈으며, 이들이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를 베었다고 상세한 내용이 전한다. 『진서』 재기의 간략한 서술만으로는 알 수 없는 전쟁의 구체적 양상이다. 그뿐만 아니라 북도로 진군한 전연군 1만 5,000명이 고구려 주력군에게 전멸했다는 『진서』 재기에 언급되지 않은 북도에서의 전황도 기술하고 있다. 이를 통해 342년에 벌어진 양국의 대결 양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현존 사료에는 없는 사적의 기술이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자치통감』을 편찬할 송대에 아직 이용할 수 있었던 오호십육국시대사 사료들이 있었고(鈴木桂, 2000), 사마광은 이를 토대로 고구려 관계 기사를 『자치통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주 005
『자치통감』은 342년의 이 전쟁에서 전연이 고구려를 제압하려 했던 연원에 대해 10월조에 기술하고 있다. 이를 통해 양국이 대결하게 된 전후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의 사건이 몇 년에 걸쳐 진행되면 언제 시점으로 어떻게 기술할 것인지 문제가 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자치통감』은 사건의 중심이 되는 날짜에 원인과 결과를 기술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사건을 압축적으로 이해하도록 하고 있다. 어떤 사건의 연원을 기술할 필요가 있을 때 초(初)·전(前)·시(始)·선시(先是) 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사건의 전후 사정을 알게 한 것이다(권중달, 2010). 이는 이 사서에 실린 고구려 관계 기사의 편년을 판단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서술방식이다.
한편 북위대에 저술된 최홍의 『십육국춘추』는 오호십육국시대를 다룬 사서임에도 당말오대의 혼란 속에서 사라졌고, 『태평어람』 등에 전하는 일부 내용을 명청대에 집일(輯逸)한 『도본 십육국춘추(屠本 十六國春秋)』, 『하본 십육국춘추(何本 十六國春秋)』, 『십육국춘추집보(十六國春秋輯補)』가 남아 있다. 이 가운데 명대 도교손(屠喬孫)·항림지(項琳之)의 『도본 십육국춘추』와 청대 하당(何鏜)의 『하본 십육국춘추』는 위작으로 여겨져 왔고, 청대 탕구(湯球)가 집일한 『십육국춘추집보』 역시 신뢰하기 어려운 자료라고 평가되고 있다. 이에 따라 오호십육국시대사 연구는 『진서』 재기를 중심으로 『자치통감』 등의 자료를 이용해왔고, 고구려 관계 기사도 이들 자료에 국한하여 살펴 왔다.
이러한 사료의 제약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의 ‘五胡の會’가 펴낸 『오호십육국패사집일(五胡十六國覇史輯逸)』은 『태평어람』을 비롯한 각종 자료에 전하는 오호십육국 관련 사료의 일문을 수집·정리한 것으로, 패사 일문의 전체상을 파악하고 보다 원사료에 가까운 사료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된다(關尾史郞, 2012; 梶山智史, 2019). 한편 2021년 결성된 한국의 ‘『십육국춘추집보』연구회’는 『십육국춘추집보』의 사료적 신뢰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기사들과 『도본 십육국춘추』 및 여러 유서(類書)의 일문을 비교 검토하고 역주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오호십육국 관계 고구려 기사의 내원(來源)과 관련 기사의 원형이 파악될 것으로 기대한다.
2) 남북조 사서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면서 중원 왕조의 역사는 남북조시대로 들어선다. 이 시대를 다룬 사서로는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그리고 『위서(魏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남사(南史)』, 『북사(北史)』가 있다. 이 가운데 『송서』, 『남제서』, 『위서』는 남북조시대에 저술되었으며, 나머지는 당의 정관 연간에 편찬되었다(高柄益, 1980). 남북조시대까지 개인의 저술이나 가학(家學)의 산물이었던 사서 편찬이 국가에 의해 관료들이 맡아 집필하는 국가적 사업이 되었던 것이다. 국가가 편찬한 사서가 ‘정통’의 역사로 선포되고, 개인이 마음대로 사서를 편찬하는 것은 불허되었다(鈴木桂, 2000).
심약(沈約)이 저술한 『송서』는 남제시기인 487년 편찬에 착수, 이듬해 본기와 열전 70권을 저술하고 양(梁) 초기에 지 30권을 추가하여 완성하였다. 『송서』는 조칙을 비롯한 동시대 자료 원문을 충실하게 채록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다만 북송시기에 산일되어 『남사』 등으로 보충한 부분이 있다(神田信夫, 1989). 고구려 관계 기사에 해당되는 부분은 없지만 관련 사료를 살필 때 참고할 필요가 있다.
『송서』의 고구려 관계 기사는 주로 권97 만이전(夷蠻傳)에 실려 있다. 동진(東晉)의 의희(義熙) 9년(413) 고구려가 자백마(赭白馬)를 바쳐왔다는 기사로부터 송 말까지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는 기술로 끝을 맺고 있다. 특히 여기에는 송에서 장수왕에게 보낸 책봉 조서 등 조서 3건의 기재 내용과 함께 고구려로 망명한 북연왕 풍홍을 데려가겠다는 명목으로 송이 사절과 군대를 요동에 보내, 양국의 무력 충돌이 일어났던 사건의 전후 사정이 기술되어 있다. 송의 요청으로 장수왕이 말 800필을 보내주었다는 사실도 전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송서』에만 보이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해당 기사가 이를 인용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이 밖에 『송서』 본기에서 5회의 조공 사실도 찾아볼 수 있다. 『송서』 고구려 관계 기사는 북위의 화북 통일 이후 북연왕 풍홍을 둘러싼 고구려와 송의 갈등 양상, 고구려의 대송외교 등을 검토하는 데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자료이다.
소자현(蕭子顯)의 『남제서』는 6세기 전반에 저술된 사서로, 남제시기에 편찬된 선행 사서들을 자료로 삼았다. 당대에 『남사』가 편찬되고 통용되면서 『남제서』는 차츰 취급하지 않아 탈오(脫誤) 부분이 생겼다(神田信夫, 1989). 현존 『남제서』는 권58 만·동남이전(蠻東南夷傳)에 고구려조가 실려 있는데, 송 말부터 건무(建武) 3년(496)까지 기록을 끝으로 그 후반부가 결실되어 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책부원구』 권868의 기사주 006와 『건강실록』 권16의 기사주 007가 『남제서』의 일문이라고 판단된다(中華書局, 1972; 田中俊明, 1982).
『남제서』의 고구려 관계 기사로는 “고구려가 강성하여 [북위·남제 어느 쪽에게도] 통제를 받지 않았으며 [이러한 관계에서] 북위는 외국 사신이 머물 객사를 두면서 남제를 첫 번째로 두고 고구려를 그 다음으로 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또한 북위 측이 남제와 고구려 사절의 자리를 나란히 배치한 외교 의전을 남제 사자가 항의한 일, 고구려인이 좁은 바지를 입고 절풍(折風)을 쓴 것을 남제인이 기이하게 여긴 일, 고구려 사자가 사행을 위해 청주(靑州)에 이르렀다가 억류된 일 등의 사적들이 『남제서』에 기술되고 있다. 당대 사료에서 유래한 사적들로 보인다.
5세기 전반 고구려와 경계를 접하게 된 북위는 동위(東魏)·서위(西魏)로 분열되기까지 고구려와 빈번히 교섭하였다. 동위 역시 고구려와의 관계를 이어나갔고, 그 사적들이 북위와 동위의 역사서 『위서』에 남게 되었다. 『위서』는 북제의 위수(魏收)가 문선제(文宣帝)의 명을 받아 554년에 본기와 열전을 짓고, 559년에 지를 저술하여 완성하였다. 북위에서 일찍부터 진행해왔던 수사(修史)사업과 기거주(起居注) 작성 자료를 기초로 한 사서 편찬이었다. 모두 130권으로 이루어졌으나 북송시대에 들어서 교정하게 되었을 때 30권 정도의 잔결이 있었다고 하며, 『북사』등에 의해 보충된 것이 현존 『위서』이다(神田信夫, 1989).
『위서』에는 고구려 관계 기사가 남북조시대 어느 사서보다도 많다. 권4 태조기(太祖紀)의 북연을 둘러싼 고구려와 북위의 갈등 양상부터 이후 전개된 양국의 빈번한 사절 파견 사실 등이 본기에 보인다. 또한 사절로 고구려에 사행했던 봉궤(封軌)·정준(程駿)의 열전 등에서는 납비(納妃) 문제와 같은 사행의 구체적인 현안을 살필 수 있다. 북위 말 내란이 일어나자 강과(江果)가 안주성민(安州城民)을 이끌고 고구려에 들어왔다는 기사는 요령성 조양(朝陽)에서 발견된 한기묘지(韓曁墓誌)의 관련 내용과 짝하여 북위 말 향병(鄕兵)집단을 거느린 요서 지역 호족들의 동향을 보여주는 자료이다(李成制, 2003; 2022). 『위서』가 수록하고 있는 고구려 관계 기사의 사료적 가치를 보여주는 사례다.
한편 『위서』 고구려전은 고구려 건국설화를 자세하게 수록하고 있다. 현존 정사류에서 최초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435년 장수왕이 북위에 사절을 보내 조공한 기사로부터 양원왕(陽原王) 대까지 고구려가 북중국 왕조와 주고받은 책봉·조공관계가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보이는, 효문제(孝文帝)가 장수왕에게 보낸 조서의 내용이나, 고구려왕에게 수여된 책봉호의 내용, 선문제(宣武帝)와 고구려 사신 예실불(芮悉弗)의 대화 등을 통해 해당 시기 양국 관계의 구체적인 실상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밖에 물길전(勿吉傳)에 보이는 물길이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략할 계획임을 북위에 알린 사건은 5세기 후반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를 둘러싼 주변 세력의 동향을 보여준다.
당을 세운 뒤 왕조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태종은 북제·주·양·진·수의 5조사(朝史) 편찬을 명하였고, 요사렴(姚思廉)이 부친 요찰(姚察)의 저술을 토대로 636년에 『양서』·『진서』를 완성하였다. 양의 사서로는 심약의 『무제본기(武帝本紀)』, 사호(謝昊)의 『양서(梁書)』 등이 있었지만, 현존하는 것은 당대에 편찬한 『양서』뿐이다(神田信夫, 1989).
『양서』 본기에는 천감(天監) 원년(502)부터 태청(太淸) 2년(548)까지 고구려가 “사자를 보내 방물을 바쳤다(遣使獻方物)”라는 간략한 내용과 함께 양의 책봉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고구려조는 권54 제이전에 수록되어 있는데, 앞서의 남조 계열 사서가 당대 기사로 구성된 것과 달리, 전사로부터 전재한 내용이 많다. 지리·습속의 기술은 새로운 정보라기보다는 『삼국지』를 중심으로 『후한서』·『위략』의 내용을 참고하여 서술하였다(金鍾完, 1981; 全海宗, 2000). 이 과정에서 찬자의 이해에 따라 원전의 문장이 변개와 보입의 방법으로 재구성된 부분이 있다.
한편 교섭 기사에는 현재 전하지 않는 사서에서 채록한 내용이 보인다. “모용수가 죽고 아들 모용보가 즉위하여 고구려왕 안을 평주목으로 삼고 요동·대방 2국왕에 책봉하였다. [이에] 고구려왕 안이 비로소 장사·사마·참군의 관을 두었다. 그 뒤에 요동군을 공략하여 차지하였다”주 008는 내용이 그것인데, 현재 『양서』에만 전하는 정보이다. 특히 이 기사는 396년 후연이 고구려 광개토왕을 책봉했던 사실을 전하는데, 그 책봉호는 355년 전연의 모용준(慕容儁)이 고국원왕에게 수여한 “위영주제군사·정동대장군·영주자사, 봉낙랑공, 왕여고(爲營州諸軍事·征東大將軍·營州刺史, 封樂浪公, 王如故)”를 전제로 하여 앞서 받은 관작을 생략한 것이었다(金翰奎, 1997; 李成制, 2012). 중국 사서의 고구려 관계 기사에서 많이 등장하는 책봉호가 책봉 내용을 온전히 담고 있기보다는 앞서의 책봉을 전제로 생략이나 축약 형태로 기술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요사렴이 찬술한 『진서』는 36권으로 구성되었고, 고야왕(顧野王)·육경(陸瓊) 등의 『진서』를 참고했다고 하는데 진의 사서로는 이 책만 남아 있다(神田信夫, 1989). 『진서』는 외국전을 입전하지 않아 고구려조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다. 본기에는 6회에 걸친 고구려의 사절 파견주 009과 562년의 책봉 사실이 기술되어 있고, 권30에 585년 고구려 사자가 진 후주(後主)의 근신(近臣)에게 금품을 주었다가 발각된 일이 전한다.
『북제서』는 동위·북제의 사적을 기술한 사서로, 태종의 5조사 편찬명으로 636년 이백약(李百藥) 등이 찬술하였다. 편찬 자료로는 부친 이덕림(李德林)이 저술한 북제사에 수대의 『제지(齊志)』 자료가 더해졌다. 외국전을 입전하지 않았고, 북송 무렵이 되면 이미 산일된 부분이 많아 『북사』등으로 보충한 부분이 적지 않다(神田信夫, 1989).
『북제서』 본기에는 문선제(文宣帝)부터 후주(後主)시기까지 6회에 걸친 고구려의 사절 파견과 2건의 책봉 기사가 기재되어 있다. 한편 고구려에 대한 언급은 없으나 552~553년 문선제가 고막해(庫莫奚)·거란(契丹)을 정벌하며 요서에 순행한 사적은 『북사』 고구려전에 보이는 고구려와 북제의 관계, 즉 최류(崔柳)가 고구려에 사자로 와서 북위 말 유인의 송환을 강요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된다(李成制, 2001). 또한 권41의 고보녕전(高保寧傳)은 북제가 북주에 패망한 뒤 고구려의 서변인 요서 지역에 고보녕 세력이 웅거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주서』는 영호덕분(令狐德棻) 등이 태종의 명으로 찬술하여 50권으로 636년에 완성하였다. 5조사 편찬사업의 일환으로 서위·북주 왕조의 기록이다. 편찬 자료로는 수의 우홍(牛弘)이 찬술하던 국사와 서위의 서적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외국전의 편목을 이역전(異域傳)이라 칭하였다. 『주서』는 당 말, 송 초에 일부가 사라져 『북사』 등으로 보충하였다고 하는데, 그 내용과 다른 부분이 적지 않다. 또한 오탈자와 빠진 내용도 상당하다(神田信夫, 1989).
열전에 기재된 고림(高琳)과 고빈(高賓)은 그 선대가 모용씨에게 질자(質子)로 들어갔던 고구려인이었다고 하거나 한인(漢人)으로 고구려에 머물다가 귀국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들 기사를 통해 4세기 이후 북조에서 활약했던 고구려계 유민의 기원과 세계(世系)를 살필 수 있다. 고구려 관계 기사의 대부분은 이역전 상에 수록된 고구려조에 실려 있다. 시조설화와 전대(前代)의 관계사는 간략히 소개하고 당대의 교섭 기사도 2건에 불과하다. 반면 도성·관제 및 형벌·습속에 대한 기술은 전사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내용이 보이고 상세하다. 동서(東西) 6리라는 평양성의 규모나 별도(別都)로 국내성과 한성을 두었다는 도성제를 비롯하여 모반·반역자를 불태워 죽인 다음 참수하며 그 가산을 적몰한다는 등의 형벌 관련 정보를 여기에서 얻을 수 있다. 관인(官人)이 조우관(鳥羽冠)을 쓰며 서적으로 오경(五經), 삼사(三史)류 책과 『삼국지』·『진양추(晉陽秋)』가 있고, 유녀(遊女)의 존재와 폐백이 없다는 혼례에 관한 기술도 보인다. 또한 대대로(大對盧)·태대형(太大兄) 등으로 이루어진 13등 관위에 대한 내용은 『수서』·『북사』 그리고 『한원』 관련 기사의 비교 검토를 통해 고구려 관제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武田幸男, 1989; 임기환, 2004; 여호규, 2014).
『남사』는 남조 송·제·양·진의 사적을 모은 사서로, 이연수(李延壽)가 남북조의 통사(通史)를 편찬하려던 부친 이대사(李大師)의 뜻을 이어 저술한 것이다. 『진서』 편찬 등에 참여하여 많은 자료를 섭렵하고 16년 만인 659년에 완성하였다. 기본사료는 남조의 4개 왕조 정사인데, 사료들을 간략히 하거나 증보하였다. 간략히 한 부분은 『송서』 부분이 많고, 증보한 부분은 『남제서』와 『양서』 부분이 많아 기재 사실이 풍부해졌다. 다만 내용을 줄이고 증보한 부분에 과도한 측면이 있어, 남조 각 정사와의 상호 비교가 필요하다(神田信夫, 1989).
본기의 고구려 관계 기사는 남조 각 정사의 본기에 보이는 조공과 책봉의 사적들과 별 차이가 없다. 한편 송의 왕경칙(王敬則)이 고구려에 사자로 갔다가 고구려 여인과 사통하고는 귀국하지 않으려 했다는 일화(권45)나 남제의 승려 보지(寶誌)가 참기(讖記)에 능해 고구려에서 소문을 듣고 면 모자를 공양했다는 기사(권76)는 남조의 정사류에는 없는 내용이다. 이맥전의 고구려 관계 기사는 기존 정사들을 자료로 하여 내용면에서 별다르지 않다. 다만 시조설화는 『양서』의 내용을 따르지 않고 『북사』를 참고하여 예외적이다.
『북사』 역시 이연수의 저술로, 북위·북제·북주·수의 사적을 모은 사서이다. 659년에 『남사』와 함께 완성하였다. 기본사료는 『위서』·『북제서』·『주서』·『수서』로, 이들을 간략히 하거나 증보하였다. 간략히 한 부분은 『위서』 부분이 많고, 증보한 부분은 『북제서』·『주서』 부분이 많다. 또 『위서』에 빠진 서위사(西魏史)를 보충하였다. 이 외에 잡사(雜史) 1,000여 권의 기사를 더했다는 찬자의 언급처럼 추가된 부분이 있다. 이 책이 나온 뒤 북조사는 전적으로 여기에 의존하게 되어, 『위서』·『북제서』·『주서』는 산일이 심해졌고, 나중에는 그 빠진 부분을 이 책으로 보충하게 되었다(神田信夫, 1989).
본기의 고구려 관계 기사는 북조 각 정사의 본기에 보이는 조공과 책봉의 기술과 별 차이가 없다. 권82의 고구려전 역시 기존 정사들을 참고로 하여 내용면에서 별다르지 않은데, 552년 문선제가 최류를 고구려로 보내 북위 말 유인의 송환을 요구했고, 5,000여 호를 돌려받았다는 기사는 기존 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정보이다. 관제 부분은 욕살(褥薩)에 대한 언급이 없고 13등이 아니라 12등이라고 한 차이가 있을 뿐, 『주서』의 내용과 동일하다.주 010
이 밖에 사서는 아니지만 양대의 자료인 〈양직공도(梁職貢圖)〉에 고구려 관계 기사가 보인다. 『양직공도』는 형주자사(荊州刺史) 소역(蕭繹)이 그린 두루마리 그림으로, 양에 조공한 나라의 사신 그림과 그 나라에 대한 설명(題記)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대의 실물은 전하지 않고, 『한원』에 고구려 제기의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부인은 흰옷을 입고 남자는 붉은 옷을 입으며 금은으로 장식한다. … 허리에는 은으로 만든 띠를 두르고, 왼쪽에는 숫돌을 오른쪽에는 오자도(五子刀)를 차고 두예탑을 신는다”라는 복식 관련 내용이 주를 이룬다. 2011년에 새로운 모본(摹本)이 발견되어 “고구려 사자가 중국에 오면 경서와 사서를 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등의 새로운 내용도 파악되었다(尹龍九,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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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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