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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3. 고구려 후기사 관련 사서

3. 고구려 후기사 관련 사서

1) 『수서』·『구당서』·『신당서』
『수서』는 위징(魏徵)·장손무기(長孫無忌) 등이 태종의 명으로 636년에 제기 5권과 열전 50권을 편찬하였고, 656년에 지 30권을 추가하여 완성하였다. 편찬에는 수대 왕소(王邵)의 『수서』, 사관(史官)이 편수한 『개황기거주(開皇起居注)』, 왕주(王冑)의 『대업기거주(大業起居注)』를 자료로 이용하였다. 한편 『북사』에도 수의 사적이 포함되어 있어, 함께 참조할 필요가 있다(神田信夫, 1989).
『수서』 고구려전은 전쟁을 치른 양국 관계에 비해 수록 내용이 부족하여 편찬의 재료가 적었기 때문이라는 평가(高柄益, 1970)도 있으나, 당대 사관이 편수한 자료들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고구려에 대한 정보 자체가 적었을 것 같지는 않다. 문제(文帝)와 양제(煬帝)의 제기에 수록된 고구려 관계 기사에는 양국이 교환한 책봉·조공의 간략한 내용과 함께 대업(大業) 8년(612)조에 전재되어 있는 양제가 탁군(涿郡)에서 고구려 침공군을 출발시키며 내린 조서와 같은 1차 사료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열전에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출전했던 수 측 장수들의 활동과 무려성(武厲城)·요수(遼水) 등의 교전지를 기재하고 있어, 양국의 전략과 각 전역의 구체적인 양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자료이다.
『수서』 고구려전의 내용 구성은 『위서』·『주서』와 같이 출자 및 건국 설화, 왕계, 지리, 제도, 생활상을 기술하고 마지막에 수대의 양국 관계를 배치하고 있다. 제도나 생활상은 전사보다 내용이 많다. 수대의 양국 관계 기사는 개황(開皇) 17년(597)으로 기년되어 있는 문제의 새서(璽書)를 비롯, 4차에 걸친 수의 고구려 침공과 그 경과에 대한 기술이라는 점에서 관련 연구의 기본사료이다. 특히 문제가 고구려에 새서를 보낸 것은 590년의 일로, 여기에서 고보녕 세력을 제거하고 요서로 진출한 수와 이에 대한 고구려의 대응을 살필 수 있다(日野開三郞, 1991; 李成制, 2000).
고구려 관계 기사는 『구당서』·『신당서』에 이르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다루는 내용이나 자료의 양에서 전대의 사서들을 압도한다. 『구당서』는 후진(後晉)의 유후(劉昫) 등이 고조(高祖)의 명으로 945년에 편찬한 사서로 『신당서』와 함께 당의 정사이다. 편찬 인력의 선발, 사료의 수집 및 체제와 목차의 확정 등 전체 편찬 과정에서 조영(趙塋)이 큰 역할을 하였다. 본기 20권, 지 30권, 열전 150권으로 구성되었다. 당대에 편찬된 국사로는 오경(吳競)의 『당서』 130권, 편년체의 여러 『당력(唐曆)』이나 『당춘추(唐春秋)』 등이 있었고, 문종(文宗) 대까지의 역대 실록이 있다. 『구당서』의 장경(長慶) 연간(821~824) 이전에 대한 기술은 상당 부분 이들 실록과 국사를 자료로 하여 서술되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주 011
각주 011)
당은 초기부터 황제의 실록을 저술, 이를 기초로 『무덕정관양조국사(武德貞觀兩朝國史)』 80권을 찬술하였고, 여기에 고종 대의 20권을 추가, 모두 100권의 국사를 편찬하였다. 이를 측천무후 대에 80권으로 된 『당사(唐史)』로 편집, 『구당서』가 편찬되는 후진 연간에는 고조(高祖)~대종(代宗)까지의 국사와 덕종(德宗) 이전부터 문종(文宗)에 이르는 각 황제의 실록이 잔존하고 있었다. 『구당서』는 이들 국사와 실록을 원사료로 채용하였다(福井重雅,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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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을 그대로 채록하고 있다는 점도 『신당서』보다 뛰어나다. 또한 『자치통감』 당기(唐紀) 부분은 『신당서』를 취하지 않고 『구당서』에 의거하고 있다(神田信夫 1989).
『구당서』본기에는 624년의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 국왕에 대한 책봉 기사를 시작으로 양국 간의 책봉·조공 기사를 기본으로 두고, 631년의 경관(京觀) 파괴, 640년 태자 환권(桓權)의 내조(來朝), 642년 영류왕 시해, 644년 요동도행군(遼東道行軍)의 출병, 645년 개모성·요동성 함락과 주필산(駐蹕山)에서의 승전 및 안시성에서의 회군, 658~659년의 요동 침공, 661년 글필하력(契苾何力)·소정방(蘇定方)의 고구려 침공, 666년 연개소문 사망과 천남생의 투항, 668년 9월 평양성 함락과 안동도호부 설치, 670년 안동도호부 휘하의 주현 설치, 673년 고구려 부흥군 격파까지 양국 관계의 주요 사건이 차례로 기술되고 있다.
권39의 지리지에는 5부, 176성, 69만 7,000호라는 멸망기 고구려의 지방행정제도와 인구현황과 함께 당이 고구려 고지에 설치한 안동도호부의 편제와 변천이 수록되어 있어, 고구려의 지방 구획 논의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권58 유홍기전(劉弘基傳)부터 등장하는 고구려 전쟁에 관여했던 인물의 열전에는 전역의 주요 교전지와 전황이 기술되어 있어, 각 시기의 전쟁을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구당서』 고구려전은 지리·관제·생활상의 기본 구성에 더하여 당대의 양국 관계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사에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정보가 곳곳에 보인다. 나라의 면적이 동서 3,100리이며 남북은 2,000리라는 내용, 관제와 관련하여 대성(大城)에는 욕살을 두는데 당의 도독(都督)에 비견되며, 여러 성의 도사(道使)는 자사(刺史)에 비견된다는 설명, 교육·학술과 관련하여 고구려에는 『옥편(玉篇)』·『자통(字通)』 등의 서적이 있고 『문선(文選)』을 좋아하고 소중히 여긴다는 시사성 높은 기사 등이 그것이다. 양국 관계에 관한 서술은 내용이 충실하고 각 사건의 경과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나아가 622년 당 고조가 고구려·수전쟁의 포로를 교환하자며 보낸 조서의 구체적인 내용, 양국 관계에 대한 고조와 신료들의 입장, 626년 삼국 간의 역관계에 간섭하여 회맹을 추진한 당과 고구려의 대응, 631년 당의 경관 파괴와 고구려의 장성 축조, 642년 연개소문의 정변과 막리지(莫離支) 취임, 645년 당 태종의 침공과 전쟁 경과, 666년 고종의 태산 봉선과 고구려 태자의 참여, 연개소문 사후의 내분과 천남생의 투항, 667년의 패망 과정, 안동도호부 설치와 치폐 경과, 천남생·천헌성의 번장(蕃將)으로서의 삶 등, 양국 관계의 주요 사적들이 망라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고구려 국내의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1급 정보를 담고 있어 관련 연구의 기본사료이다.
당대의 정사로는 『구당서』와 함께 『신당서』가 있다. 『신당서』는 송의 구양수(歐陽脩)·송기(宋祁) 등이 인종(仁宗)의 명을 받아 1060년에 완성하였다. 본기 10권, 표 15권, 지 50권, 열전 150권으로 구성된다. 오대 후진에서 편찬한 『구당서』가 있었으나, 당 말~오대의 혼란을 거쳐 당대 후반에 관해서는 사료 부족에 따라 기술에 문제점이 있었다. 송이 들어선 뒤 『구당서』 편찬 과정에서는 참조할 수 없었던 사료들이 다수 출현, 1044년에 당서의 중수(重修)가 결정되었다. 『구당서』에 대해 『신당서』 또는 『당서』라고 불린다. 전자에 비해 본기는 10분의 7을 덜어내어 간략히 하고 많은 사실을 열전으로 옮겼으며, 지에서는 61명을 빼고 새로 331명을 넣었다. 이 사서의 뛰어난 점은 송대에 새로 출현한 여러 사료 및 필기·소설·비지(碑誌)·가보(家譜)·야사(野史) 류에서까지 자료를 널리 채록하고 당대 후반에 관한 기사를 보충하여, 『구당서』의 후반이 소략한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의 고증이 소략하고 당대 조칙·장소(章疏)의 원문을 모두 삭제하여 사료적 가치를 떨어뜨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따라서 『신당서』를 사료로 이용할 때에는 반드시 다른 사료를 함께 참조하고 이 사서만의 독자 사료를 이용할 경우에는 사료비판의 과정이 필요하다(神田信夫, 1989).
『신당서』의 고구려 관계 기사는 주로 본기와 열전 그리고 고구려전에 보이며, 그 구성요소 역시 『구당서』에 수록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권110의 천남생열전처럼 새로운 자료도 일부 보인다. 또한 고구려전에는 고창국(高昌國)의 멸망 소식에 고구려 대대로가 당의 사자 진대덕(陳大德)을 세 차례나 만나러 왔다는 내용, 연개소문의 성품과 그 부친이 동부대인(東部大人) 대대로였다는 것, 부친의 사후 그 지위 계승을 둘러싸고 국인의 반대가 있었다는 것, 연개소문의 정변이 일어나자 당에서는 고구려 공격의 기회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 644년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의 침공작전, 출정에 앞서 10월에 내린 태종의 조서, 거란·해·신라·백제에 병력 동원을 명하였다는 것, 645년 당군의 요동성 공격에 맞서 고구려가 신성·국내성에서 4만의 원병을 보냈다는 것, 요동성의 주몽사당에 하늘이 내려준 갑옷과 창이 있었다는 내용, 654년 고구려가 말갈을 동원하여 거란을 공격했다가 신성에서 패전했다는 기사 등 『구당서』에 전하지 않는 내용이나 전사보다 사건의 구체적인 경과를 기술한 대목이 여러 군데 보인다. 관련 사적을 검토할 때 두 가지 당서의 기술내용을 함께 살펴 내용의 출입 여부를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당대의 정사는 아니지만 『자치통감』 수기(隋紀)·당기(唐紀) 역시 이 시기 고구려 관계 기사를 수록하고 있는 사서로서 중요하다. 수 문제부터 당 고종까지 황제별로 시간 순서에 따라 중요한 사적을 서술하고 있어 사건이 일어난 시점과 경과를 살피는 데 유용하며, 정사의 기술과 비교할 내용도 적지 않다. 또한 현재 통용되는 『자치통감』에는 호삼성(胡三省)의 주석이 붙어 있는데, 원문의 교정 뿐 아니라 상세한 지리 고증까지 행한 것으로 무려라(武厲邏)에 대해 요하 서안에 설치된 ‘라(邏)’의 하나라는 설명처럼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주며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의 내용을 ‘고이왈(考異曰)’로 배치한 부분은 현재 전하지 않는 다른 설의 사료 내용을 전한다는 점에서 참고할 필요가 있다.
한편 당대의 고구려 관계 기사에는 사건 경과에 대한 편찬자의 의도적인 생략과 이에 따른 사실의 왜곡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관련 사료를 이용할 때 주의가 필요하다. 주필산전투에서 당군이 위급했던 상황이 있었지만 『구당서』·『신당서』·『자치통감』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삼국사기』 권42 찬자 평론; 金貞培, 2007). 이러한 자료들에서 그 실제적 모습을 그려내기란 어렵다(노태돈, 2009). 이들 사서가 전하는 645년 전쟁은 8월 안시성 공방전이 벌어지기까지 줄곧 당군 우위의 전황이 이어졌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문관사림(文館詞林)』에 남아 있는 태종의 조서로 보아 이 시점이면 당군은 벌써 평양성으로 향하고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당군은 10월 퇴각할 때까지 요동반도 서북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이성제, 2023). 적어도 645년 전쟁 기록과 관련해서는 편찬자의 의도적인 생략이 있었음을 염두에 두고 관련 사건의 추이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주 012
각주 012)
『수서』·『구당서』·『신당서』의 교감과 역주 작업물로 『譯註 中國 正史 東夷傳 2: 晉書~新五代史(高句麗·渤海)』(동북아역사재단, 2020)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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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원』·『책부원구』 등 유서류와 『일본서기』
고구려 관계 사료가 수록된 자료에는 중국 역대 왕조의 사서 외에 『한원』·『책부원구』 등의 유서류와 『일본서기』가 있다. 유서(類書)란 여러 책의 내용을 모아 주제에 따라 분류하여 편리하게 검색할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자료집이다. 사서가 아님에도 각종 문헌의 기사를 인용했다는 점에서 지금은 망실된 문헌의 일문을 다수 전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한원』은 당 고종 현경(顯慶) 5년(660) 무렵에 장초금(張楚金)이 찬술하고 그 뒤 옹공예(雍公叡)가 주를 붙였다. 원래는 30권이었으나 그 뒤 산일되어 지금은 1권이 필사본으로 일본에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남은 1권이 「번이부(蕃夷部)」로, 흉노·오환을 비롯, 부여·삼한·고려·신라·백제 등이 모두 163개의 구문(句文)으로 기재되어 있다. 동이 관련 구문은 71개이고, 이 가운데 고구려조가 23개의 구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구문은 병려체(騈儷體)로 된 정문(正文)을 크게 쓰고 그 아래에 두 줄로 협주(夾注)를 달고 있다. 정문은 운문(韻文)으로 되어 있고, 협주에서는 정문의 문헌적 근거와 문의(文義)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여러 문헌의 기사를 인용하고 있다(金鍾完, 2008; 윤용구, 2018).
『한원』 고려조는 건국설화, 지리적 위치, 습속, 관제, 산천, 특산물, 복식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641년 무렵 당사 진대덕이 귀국 후 보고한 『봉사고려기(奉使高麗記)』의 일문 13개조를 비롯, 상당 부분이 현행 사서에는 없는 내용이다. 특히 이들은 남소성의 위치, 오골성의 형세 등 성곽 관련 기사, 마다산(馬多山)·언골산(焉骨山)·은산(銀山)의 위치와 형세 그리고 산물, 마자수(馬訾水)·요수(遼水)의 상황이라는 시사성 높은 정치·군사적 정보에 해당한다. 또한 관제와 5부의 기술은 『통전(通典)』·『구당서』·『신당서』 관련 기사의 원전이 되기도 하였다(吉田光男, 1977; 武田幸男, 1994).
이처럼 높은 사료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한원』은 자료로 이용하기에는 제약이 있었다. 필사본이기에 필사자가 임의로 필획을 가감하거나 자체(字體)를 변형시킨 글자가 많으며, 속자(俗字) 또한 많다. 이 때문에 기사의 신뢰도가 크게 떨어진다는 문제가 있었다(金鍾完, 2008). 아울러 정자와 협주로 구성된 체재의 특징에도 불구하고 주된 관심은 각종 문헌의 기사를 인용한 협주에 모아져 운문으로 된 정문의 문의에는 소홀하였다. 주문의 내용이 정문과 어떤 맥락에서 호응하는 것인지 살피지 않은 채(윤용구, 2018) 주문의 기사를 사료로 이용하는 데 급급했던 것이다. 다행히 이러한 자료의 문제에 대해 교감작업을 통해 원문을 확정하고, 주문은 물론이고 난해한 정문까지 역주한 자료집이 발간되어,주 013
각주 013)
『역주 한원』(동북아역사재단, 2018). 필자는 이 공동연구에 참여하여 정문과 주문의 번역 내용을 검토하고 교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예컨대 오골성의 험준함을 묘사한 “焉骨巉巖, 竦二峯而功漢”의 정문에 대해 주문은 그 형상이 형문(荊門)·삼협(三峽)과 유사하다는 『고려기』의 일문을 인용하고 있다. 이들이 위치한 곳이 한수(漢水)라는 점에서 정문의 한(漢)은 한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구절은 “언골산은 가파르고 험준하며, 두 봉우리를 우뚝 세워 한(수의 형문·삼협)처럼 만들어졌다”라고 풀 수 있다. 다만 일부 역주의 경우에는 수정내용을 반영하지 않아 오역이 그대로 남아 있는 부분도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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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을 사료로 이용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책부원구』는 1,000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유서로, 북송 대중상부(大中祥符) 6년(1013)에 완성되었다. 황제인 진종(眞宗)이 직접 관여하고, 왕흠약(王欽若)·양억(楊億) 등 20명의 관료가 편찬에 참여하였다. 『책부원구』의 의미는 군신이 정치의 귀감이 되는 장래의 전법(典法)으로 삼아야 할 고적대서(古籍大書)를 뜻한다. 상고시대부터 오대(五代)에 이르는 군신의 정치에 관한 사적을 제왕부(帝王部)부터 외신부(外臣部)까지 31부로 나누고, 각 부를 다시 세분하여 1,115문으로 구성, 연대순으로 기사를 배열하고 있다. 편찬 자료로는 정사를 주로 하고 경서(經書) 등도 이용되었다. 전하고 있던 당대의 실록 등도 이용하여, 『구당서』에 보이지 않는 사료나 그보다 자세한 기사가 많다. 정사의 기사를 전재한 부분이 많은 수대 이전에 대해서도 사용된 정사가 북송 이전의 고본(古本)이기 때문에 후세로 전하면서 생긴 정사의 탈오(脫誤)를 보정하는 데에도 매우 유용하다(神田信夫, 1989).
『책부원구』의 고구려 관계 기사는 권117의 제왕부를 비롯하여 장수부·봉사부·외신부 등에 집중되어 있다. 예를 들어 655년 영주도독 정명진(程名振)이 귀단수(貴端水)에서 고구려군과 교전했던 사건을 전하는 외신부의 관련 기사는 『구당서』·『자치통감』 기록보다 내용이 자세하다. 또한 645년 4월 이세적(李世勣)이 지휘한 당군이 요하를 건너 현도성에 이르는 경로상의 봉수와 성보를 모두 함락시켰다는 기사는 고구려가 요하에서 무순의 현도성에 이르는 국경지대에 봉수와 성보를 세워두고 있었다는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다(이성제, 2023). 이처럼 『책부원구』 고구려 관계 기사에는 전사에 비해 내용이 풍부하거나 현존 사서에서는 볼 수 없는 사적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이상에서 살핀 중국 문헌과 계통을 달리하는 사서로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있다. 『일본서기』는 720년에 편찬된 고대 일본의 사서로, 기(紀) 30권과 계보(系譜) 1권으로 구성되었다. 편찬 자료로는 역대 천황의 사적을 기재한 제기(帝紀)와 신화·전설·지명과 사물의 기원설화 등의 기록물인 구사(舊辭)를 비롯하여 여러 씨족의 전승설화 등이 이용되었고, 조정의 기록문서, 개인의 수기, 사원의 연기(緣記), 『백제기(百濟記)』·『백제신찬(百濟新撰)』·『백제본기(百濟本紀)』 등이 사료로 인용되었다. 다만 7세기 후반~8세기 전반에 강화된 일본의 대국의식으로 그 기술내용이 윤색되어 있어, 한국고대사 연구에서 사료로 이용하기 쉽지 않다(연민수 외, 2013).
『일본서기』에는 신공기(神功紀) 이래 고구려 관계 기사가 등장하는데, 이들 수록 자료에 대해 전체상을 제시하고 그 연원의 고찰과 기사의 사실성 여부를 판단한 연구(李弘稙, 1987)가 큰 도움이 된다. 이들 기사는 일본열도로 이주한 백제계 씨족들이 가지고 있던 『백제본기』에 수록된 사료를 인용한 것이거나 왜와 고구려의 교류에서 남겨진 사적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흠명기(欽明紀)에 전하는 세군(細群)과 추군(麤群)의 대립, 박곡향상왕(狛鵠香上王: 안원왕)의 죽음에 관한 내용은 『삼국사기』에도 보이지 않는 기록으로 551년 무렵 고구려에서 벌어진 내란과 왕위계승의 상황을 살피는 데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김태식, 1998; 이영식, 2007). 또한 흠명 31년(570)~민달(敏達) 1년(572)의 기록에 보이는, 고구려 사신이 월(越)에 도착하여 국서를 왜 조정에 전달했다는 사건은 양국 간 최초의 공식 교섭을 전하는 기록(李弘稙, 1987; 井上直樹, 2008)으로, 6세기 중후반 고구려가 대왜외교를 새로운 대외전략의 한 축으로 삼았음을 알리는 귀중한 정보이다(李成制, 2009).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후 573년까지 두 차례 고구려의 사절 파견이 있었고, 왜의 사자도 고구려를 방문하였다. 또한 595년에는 승려 혜자(惠慈)가 바다를 건너 왜에 들어가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는 등 선진문물의 공여와 승려 파견 사실이 고구려 관계 기사로 등장하고 있어, 고구려가 백제·신라의 대왜 교섭방식과 비슷하게 양국 관계를 구축해 나갔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교섭 사실은 고구려가 사자를 보내 ‘공물을 헌상해왔다’는 내용으로 고구려 멸망 시점까지 보인다. 570년 이후 고구려와 왜의 관계는 어느덧 백제에 버금갈 수준으로까지 바뀌어 나갔던 것이다(李成制, 2009). 이 점에서 혜자를 비롯한 몇몇 승려의 활약 외에도 기록이 전하지 않는 빈번한 교섭과 왕래가 있었음을 상정할 필요가 있다.

  • 각주 011)
    당은 초기부터 황제의 실록을 저술, 이를 기초로 『무덕정관양조국사(武德貞觀兩朝國史)』 80권을 찬술하였고, 여기에 고종 대의 20권을 추가, 모두 100권의 국사를 편찬하였다. 이를 측천무후 대에 80권으로 된 『당사(唐史)』로 편집, 『구당서』가 편찬되는 후진 연간에는 고조(高祖)~대종(代宗)까지의 국사와 덕종(德宗) 이전부터 문종(文宗)에 이르는 각 황제의 실록이 잔존하고 있었다. 『구당서』는 이들 국사와 실록을 원사료로 채용하였다(福井重雅, 1984). 바로가기
  • 각주 012)
    『수서』·『구당서』·『신당서』의 교감과 역주 작업물로 『譯註 中國 正史 東夷傳 2: 晉書~新五代史(高句麗·渤海)』(동북아역사재단, 2020)가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3)
    『역주 한원』(동북아역사재단, 2018). 필자는 이 공동연구에 참여하여 정문과 주문의 번역 내용을 검토하고 교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예컨대 오골성의 험준함을 묘사한 “焉骨巉巖, 竦二峯而功漢”의 정문에 대해 주문은 그 형상이 형문(荊門)·삼협(三峽)과 유사하다는 『고려기』의 일문을 인용하고 있다. 이들이 위치한 곳이 한수(漢水)라는 점에서 정문의 한(漢)은 한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구절은 “언골산은 가파르고 험준하며, 두 봉우리를 우뚝 세워 한(수의 형문·삼협)처럼 만들어졌다”라고 풀 수 있다. 다만 일부 역주의 경우에는 수정내용을 반영하지 않아 오역이 그대로 남아 있는 부분도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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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구려 후기사 관련 사서 자료번호 : gt.d_0010_0030_002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