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금석문·문자자료의 현황과 문자문화
1. 금석문·문자자료의 현황과 문자문화
1) 금석문과 문자자료의 전체 현황
조선 후기에 평양성 각자성석 3건이 출토되고(吳慶錫 草稿, 1858; 劉喜海 輯錄, 1922), 1880년경 광개토왕릉비가 재발견된 이래 수많은 고구려 금석문과 문자자료가 출토되었다. 20세기 전반에 고구려 도성이었던 집안(集安)과 평양 일대의 벽화고분에서 묵서(墨書)가 다수 조사되었는데, 1935년에는 모두루(牟頭婁)묘지가 발견되었다. 1913년 평양성 각자성석 제4석, 1915년 건흥5년명 금동광배(충주시 노은면), 1926년 경주 서봉총 은합우 명문이 잇따라 발견되었다(朝鮮總督府, 1919; 葛城末治, 1935; 濱田耕作, 1939). 또 중국 낙양(洛陽)에서는 천남생 묘지명 등 유민묘지명(遺民墓誌銘) 6건이 출토되었다(羅振玉, 1982; 李蘭暎, 1976).
광복 이후 경주 호우총 호우 명문(1946), 평양 평천리폐사지의 영강7년명 금동광배(1946), 황해도 안악3호분과 복사리벽화고분(1949) 등이 잇따라 조사되었다. 20세기 후반에는 북한과 중국이 벽화고분 묵서, 석각(石刻) 명문(銘文), 와당이나 토기 명문을 조사했는데, 1976년에 발견한 덕흥리벽화고분 묵서가 큰 주목을 받았다. 남한에서는 1963년 경남 의령에서 연가7년명 금동광배, 1979년에 충주고구려비가 발견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중국이 고구려 도성유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문자자료가 출토되었는데, 4세기의 권운문와당 명문이 대거 발견된 점이 특기할 만하다. 고구려 당시 변경이었던 임진강과 아차산 일대의 보루에서도 기와·토기 명문이 다수 출토되었다. 특히 2012년에 집안시 마선하(麻線河)에서 집안고구려비가 발견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 이와 함께 당의 도성이었던 서안과 낙양 일대에서 고구려 유민묘지명이 대거 출토되었다.
목간주 002이나 종이문서주 003를 제외한 거의 모든 유형의 금석문과 문자자료가 발견된 것인데, 서사 재료와 형식에 따라 고분 묵서, 비문, 석각 명문, 불상 명문, 금속기 명문, 기와·토기·벽돌 명문, 인장, 묘지명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주 004
첫째, 고분 묵서는 18기의 고분에서 확인되었다. 환인 지역의 미창구장군묘, 집안 지역의 모두루무덤, 장천1호분, 장천2호분, 산성하332호분, 통구사신총을 제외하면 나머지 12기는 서북한 지역에 분포한다. 이 가운데 안악3호분에서는 16개소에서 100여 자, 덕흥리벽화고분에서는 56개소에서 600여 자가 확인되었다. 또 광개토왕~장수왕 시기에 지방장관을 역임한 모두루무덤에서는 800여 자에 이르는 묘지가 발견되었는데, 건국설화와 지방제도 등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 묵서는 2절에서 살펴볼 예정이다.
둘째, 비문은 집안고구려비, 광개토왕릉비, 충주고구려비, 백암성 고구려비편(蘇鵬力, 2010; 박대재, 2019) 등이 있다. 집안고구려비는 광개토왕 대나 장수왕 초기, 광개토왕릉비는 414년(장수왕 3), 충주고구려비는 5세기 중후반, 백암성고구려비편은 540년이나 600년에 건립된 것으로 파악된다. 가장 초기의 집안고구려비나 광개토왕릉비도 세련된 한문으로 작성된 점이 주목된다. 각 비문에 대해서는 3절과 4절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셋째, 석각 명문은 평양성에서 5건(채희국, 1965; 최희림, 1967a), 태천 농오리산성에서 1건(김례환·류택규, 1958)이 확인되었다(서영대, 1992d). 그 밖에 집안의 서대묘, 천추총, 태왕릉, 민주유적, 평양 대성산성에서 단편적인 석각 명문이 조사되었다(고광의, 2023). 평양성 각자성석은 6세기 후반 장안성(長安城) 축조와 관련한 축성 개시일, 책임자, 구간을 기술했는데(田中俊明, 1981; 1985), 제5석은 성벽에 박힌 채 발견되어 축성 구간 고찰의 기준점을 제공했다(기경량, 2017; 2018), 석각 명문에 나오는 소형(小兄), 상위사(上位使), 소대사자(小大使者) 등은 관등제 연구에 실마리를 제공했다(임기환, 2004).
넷째, 불상 명문은 태화13년(大和13年)명 석불상(489 ?), 영강7년(永康7年)명 금동광배(평양 평천리 출토, 6세기 후반), 연가7년(延嘉7年)명 금동광배(경남 의령 출토, 539 또는 599), 경4년신묘(景4年辛卯)명 금동삼존불입상(황해도 곡산 출토, 571 ?), 건흥5년병진(建興5年丙辰)명 금동광배(충북 중원 출토, 536 또는 596 ?) 등이 있다(서영대, 1992e). 신포시 오매리절터 금동판 명문(5~7세기)도 불교 관련 명문으로 분류할 수 있다(『조선유적유물도감(4)』). 이들 명문의 제작 주체는 승려나 불교 신자로 추정되는데, 순한문에 가까우며 이두적 요소는 거의 없다.
연가7년명 금동광배는 경남 의령에서 출토되었는데, 고구려 불상이 어떻게 경남 지역까지 전해졌는지 많은 궁금증을 자아냈다(황수영, 1964; 1989; 김원룡, 1964; 윤무병, 1964). 함경남도 신포시 오매리절터 금동판은 고구려시기에 제작되어 발해시기까지 전승된 것인데, 고구려의 전통적인 천손(天孫) 관념과 불교의 도솔천(兜率天)사상이 결합된 양상이 확인되었다(노태돈, 1992c). 한편 명문 불상의 제작시기를 중원 대륙의 정치상황과 연관시켜 고찰하거나(주수완, 2011), 중원대륙 각지와의 문화교류 양상을 살피기도 했다(양은경, 2005; 최성은, 2017).
다섯째, 금속기 명문은 호우총 호우 명문(415), 서봉총 은합우 명문(451?), 태왕릉 청동방울 명문(391 또는 451), 마선구2100호분 철경(鐵鏡) 명문, 장군총 철련(鐵鏈) 명문 등이 있다. 호우총 호우 명문과 서봉총 은합우 명문은 신라 도성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고구려와 신라의 외교관계와 관련해 많은 주목을 받았다(김재원, 1948; 주보돈, 2001). 태왕릉 청동방울 명문은 ‘신묘년(辛卯年)’과 ‘호대왕(好大王)’ 명문이 있어서 태왕릉의 주인공과 관련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백승옥, 2005; 井上直樹, 2007; 조우연, 2017).
불상과 금속기 명문에는 연호가 다수 나와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 연대를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했다(손영종, 1966; 양광석, 1988; 정운용, 1998; 이승호, 2020). 가령 서봉총 은합우 명문의 ‘연수(延壽)’를 511년(지증왕 12)에 제정한 신라 연호(이홍직, 1954; 1971)나 7세기 전반 고창국의 연호(박선희, 2006)로 보기도 하지만, 대체로 고구려 연호로 파악된다. 연호를 제정한 신묘년은 고국원왕 원년(331)(강현숙, 2015)이나 광개토왕 원년(391)(조우연, 2017)으로 보기도 하지만, 장수왕 39년(451)일 가능성이 높다(장창은, 2015).
여섯째, 기와·토기·벽돌 명문은 도성뿐 아니라 변경에서도 많이 출토되었다. 집안 지역에서는 기와·토기·벽돌 명문이 모두 출토되었고(박찬규, 2005; 井上直樹, 2007), 평양 정릉사지에서는 토기와 기와(김일성종합대학, 1976; 오택현, 2022), 남한 지역 보루에서는 토기·기와·토제북 명문이 출토되었다(심광주, 2009). 이들 명문의 내용은 비록 단편적이지만, 한자문화의 보급 양상을 잘 보여준다.
2) 문자자료에 나타난 문자문화의 양상
고구려 문자자료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집안 지역에서 출토된 4세기의 권운문와당 명문인데, 갑술(甲戌)명 와당은 314년, 태녕4년(太寧四年)명 와당은 326년으로 편년된다(李殿福, 1984; 林至德·耿鐵華, 1985; 耿鐵華, 2006; 2007; 기경량, 2016; 고광의, 2023). 4세기 이전의 문자자료가 확인되지 않은 것인데,주 005 고구려가 일찍부터 중원 왕조와 교섭한 사실을 고려하면 다소 의외의 현상이다. 더욱이 고구려는 후한이나 손오(孫吳)와 외교문서를 주고받을 정도로 고급 한문을 구사했다(송기호, 2002).
그렇다면 왜 4세기 이전의 문자자료가 출토되지 않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 고구려 초기 정치체제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 초기에는 제가회의(諸加會議)에서 국가 중대사를 의결하고, 각 나부(那部)를 단위로 행정실무를 처리했다. 제가회의의 의결사항을 문서로 정리했을 수 있지만, 문서행정이 발달했을 가능성은 낮다. 이에 따라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고급 엘리트층이 존재했지만, 한자문화는 널리 보급되지 않은 것이다(여호규, 2011).
4세기 이후 고구려 한자문화는 커다란 전환을 맞는다. 고구려가 313~314년에 낙랑군과 대방군을 점령하고, 중원대륙의 혼란을 피해 많은 중국계 망명객이 내투했는데, 이 과정에서 식자층(識字層)을 다수 확보했다. 이에 따라 도성지역에 한자문화가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집안 지역에서 4세기 권운문와당 명문이 대거 출토되는 양상은 이를 잘 보여준다.
권운문와당 명문은 제작시기, 제작자나 무덤 주인공, 길상구로 이루어져 있다. 우산하3319호분 출토 정사(丁巳)명 와당은 357년으로 편년되는데, 제작 주체는 중랑(中郞)을 역임한 중국계 망명객이다(공석구, 2003). 집안 지역 권운문와당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양뿔형 권운문 1조를 등지게 배치한 점인데, 이러한 사례는 중원대륙에도 있지만 낙랑 지역에서 많이 확인된다(여호규, 2006). 집안 지역의 권운문와당은 주로 낙랑 유민이나 중국계 망명객에 의해 제작된 것이다.
이는 4세기 전반 낙랑 유민의 편입이나 중국계 망명객의 내투와 더불어 고구려 사회에 식자층이 두텁게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점에서 낙랑·대방 지역의 기년명전 명문이 주목되는데, 낙랑군-대방군의 한자문화가 고구려로 전승되는 양상을 잘 보여준다(공석구, 1988; 임기환, 1992). 기년명전은 대부분 낙랑·대방 지역에 장기간 거주했던 토착세력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지만, 장무이전(張撫夷塼, 348?)이나 영화9년명전(永和9年銘塼, 353)의 제작 주체는 중국계 망명객으로 추정된다.
기년명전 명문은 주로 제작시기나 제작자(무덤 주인공)만 간략하게 적었다. 이 가운데 영화9년명전의 주인공인 동리(佟利)는 안악3호분의 주인공인 동수(佟壽)와 연관된 인물로, 고구려 왕권의 후원 아래 평양 지역에 정착한 중국계 망명객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명문의 요동·한·현도태수령동리(遼東·韓·玄菟太守領佟利)의 ‘령(領)’자는 ‘요동·한·현도태수’에 대한 서술어로 순한문이라면 앞쪽에 위치해야 한다.주 006 이 명문은 한문을 한국어 어순에 맞게 ‘목적어+서술어’로 도치시킨 일종의 이두식 표현이다.
덕흥리벽화고분의 ‘사희주기인(射戱注記人)’ 명문도 한문을 한국어 어순에 맞게 도치시킨 사례이다. 이 고분의 주인공은 중국계 망명객인 ‘□□진(□□鎭)’이다. 이른 시기의 이두식 표현이 주로 중국계 망명객의 무덤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이로 보아 한국어 어순에 입각한 이두식 한문 표현은 순한문을 구사하던 중국계 식자층이 고구려어의 언어체계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개발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4세기 후반 소수림왕 대에 태학 설립과 불교 공인을 통해 식자층을 대거 양성했다. 고구려의 관인과 귀족 사회, 불교계에서 한자 문화의 기반이 크게 확충된 것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건립한 집안고구려비와 광개토왕릉비뿐 아니라 귀족의 묘인 모두루묘지나 불상 명문이 세련된 순한문으로 작성된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여호규, 2011).
한자문화의 확산 양상은 기와·토기 명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기와 명문은 집안 지역의 대형 적석묘나 환도산성에서 다수 출토되었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a; 2004b; 2004c). 이들 명문의 서체는 자유분방하며, 대부분 소성(燒成) 이전에 와공(瓦工)이 새겼다. 환도산성에서는 소형(小兄)명 기와가 16개나 확인되었는데, 하위 관등 소지자의 한자 해독력과 관련하여 주목된다(여호규, 2010).
토기 명문은 변경에서 더 많이 출토되고 있다. 특히 임진강과 한강유역의 보루에서 대거 발견되었다. 각종 부호를 제외하면 약 50여 종이 출토되었다. 아차산 제4보루에서는 인명 다음에 ‘형(兄)’이라는 존칭 어미를 붙인 사례가 다수 확인되고, 후부(後卩)라는 부명(部名)을 관칭(冠稱)한 사례도 있다. 홍련봉제2보루에서도 전부(前卩)라는 부명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부명을 남평양의 행정구역명으로 보기도 하지만(최종택, 2013), 평양 도성의 행정구역명일 가능성이 더 크다. 개인용 배식기의 명문은 장졸(將卒)이 식자층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구의동보고서간행위원회, 1997; 양시은 외, 2009).
임진강 유역의 호로고루에서는 기와·토기·토제북 명문이 대거 확인되었다. 상고(相鼓)명 토제북은 군사 지휘와 관련해 주목된다. 기와 겉면에 기와 수량을 기록한 명문은 산판(算板)인데(심광주, 2009), 수공업제도가 문서행정에 의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여호규, 2010). 호로고루는 식자층이 상주한 성곽으로 임진강 일대 보루를 관장하는 사령부의 역할과 행정 기능을 겸비한 것으로 짐작된다(심광주, 2009).
이처럼 하급 관등인 소형, 변방에 파견된 장졸(將卒)이나 장인(匠人)도 한자를 해독할 정도로 식자층이 넓게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지방통치도 각종 법령과 규정에 입각한 문서행정을 통해 이루어졌을 텐데 여러 금석문의 인명 표기가 ‘관직명+부명(출신지)+관등명+인명’ 순서로 통일된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다만 모든 관원이 순한문을 완전히 이해했을지는 의문이다.
이와 관련해 중원 왕조의 공문서에 주로 사용하던 종결사 ‘지(之)’, 처격조사 ‘중(中)’, 어휘 ‘절(節)’ 등의 표현주 007이 도성의 집안고구려비나 광개토왕릉비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고, 변경의 충주고구려비에 많이 나타난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는 고구려 사회에 순한문문화와 함께 이를 변용한 한자문화가 병존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표현은 평양성 각자성석에서도 확인되는데, 특히 제4·5석의 명문은 ‘주어(축성책임자)+목적어(축성구간)+서술어(감독행위)’ 등 한국어 어순으로 기술했다. 이러한 각자성석은 역역 동원 등 행정실무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작성되었고, 작성 주체는 하위 관등 소지자였다.
이처럼 고구려 사회에서는 고급 한자문화와 더불어 이를 고구려 언어체계에 맞게 변용한 이두식 한자문화가 병존하였다. 이두식 한자문화는 주로 하급 관인이나 지방사회에서 널리 통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지방의 농오리산성 마애석각이나 호로고루 기와산판은 한문 어순에 맞게 기술되었다는 점에서 순한문 사용자층이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금석문과 문자자료를 고찰할 때는 이러한 문자문화 양상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