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분 묵서와 무덤 주인공의 성격
2. 고분 묵서와 무덤 주인공의 성격
1) 평양 지역 고분 묵서와 무덤 주인공의 성격
벽화고분의 묵서는 총 18기에서 조사되었는데, 12기가 평양을 비롯한 서북한 지역에 분포한다. 안악3호분과 덕흥리벽화고분을 제외한 10기에서는 짤막한 묵서나 명문 도안이 확인되었는데, 단편적이지만 벽화 내용 이해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가령 요동성총 묵서를 통해 성곽도가 400년 전후의 요동성(遼東城)임을 알 수 있다(고고학및민속학연구소, 1958b). 천왕지신총의 묵서를 통해 천왕(天王), 지신(地神), 천추(千秋) 등 신상(神像)의 명칭과 모습(전호태, 2021), 덕화리2호분의 묵서를 통해 벽성(辟星), 위□(胃□), 정성(井星), 유성(柳星) 등 별자리의 명칭과 모습(김일권, 1996) 등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고분 묵서 가운데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것은 안악3호분과 덕흥리 벽화고분 묵서이다. 양자는 각기 16개소 100여 자, 56개소 600여 자로 분량이 방대할 뿐 아니라, ‘영화(永和)13년(357)’과 ‘영락(永樂)18년(408)’이라는 조영 연대가 명기되어 있어 고분 편년의 기준을 제공한다. 특히 안악3호분에는 문헌사료에 기술된 동수(冬壽, 佟壽)라는 인물이 나오고, 덕흥리벽화고분에서는 유주자사(幽州刺史)를 역임했다는 진(鎭)의 묘지가 확인되었다. 이로 인해 두 고분의 묵서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다(서영대, 1992a; 1992b).
안악3호분은 1949년 재령강 유역인 황해도 안악군 오국리에서 조사되었다(고고학및민속학연구소, 1958a). 측실이 딸린 앞방, 회랑, 널방으로 이루어진 석실봉토분이다. 각 벽면에 대행렬도 등 생활풍속계 벽화를 그리고, 묵서로 설명문을 적었다. 이중 서쪽 측실의 기실(記室), 소사(小史), 성사(省事), 문하배(門下拜), 앞방 서벽의 장하독(帳下督), 앞방 남벽의 전리(戰吏), 대행렬도의 □상번(□上幡) 등은 각 인물의 직책과 성격을 알려주는데, 무덤 주인공과 관련해 많은 주목을 받았다.
동수의 관력(官歷)을 기술한 묵서는 앞방에서 서쪽 측실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입구의 좌우 벽면에 장하독(帳下督)을 한 명씩 그렸는데, 좌측(남쪽) 장하독 위에 7행 68자의 묵서가 있다. 측실 안쪽 정면에는 주인공, 좌측(남벽) 면에는 부인 초상화가 있다. 동수는 영화13년(357) 10월 26일에 69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 사지절 도독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창려·현도·대방태수 도향후(使持節 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 樂浪相 昌黎·玄菟·帶方太守 都鄕侯)를 지냈고, 유주(幽州) 요동군(遼東郡) 평곽현(平郭縣)의 소재지가 있는 경상리(敬上里) 출신이라고 적혀 있다.
동수라는 인물은 문헌에도 나오는데, 333년 모용외(慕容廆)가 죽은 다음 전연에 내분이 일어났을 때 모용인(慕容仁) 측에 가담했다가 336년 고구려에 망명했다. ‘동(冬, 佟)’ 자가 다르지만, 양자는 동일 인물로 짐작된다. 동수는 전연 출신의 망명객으로 고구려에서 21년간 살다가 사망한 것이다. 동수의 이러한 이력은 안악3호분의 주인공을 비정하는 데 중요한 쟁점으로 부상했다(서영대, 1992a).
북한 학계는 처음에 동수를 안악3호분의 주인공으로 보다가(김용준, 1957), 일개 망명객은 거대한 무덤을 조영하기 힘들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에 안악3호분의 주인공을 미천왕(박윤원, 1963; 주영헌, 1963; 전주농, 1963;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실, 1966) 또는 고국원왕(리여성, 1955; 박진욱, 1990; 손영종, 1991b)으로 비정했다. 이러한 북한 학계의 견해에 따르면 서쪽 측실 안쪽의 초상화는 왕과 왕비이고, 측실 입구 좌측 벽면의 장하독이 동수가 된다. 동수가 장하독이므로 그 위에 그의 묵서를 적었다는 것이다.
또 서쪽 측실 서벽의 기실, 소사, 성사, 문하배 등은 고구려왕을 모시는 내시부의 속료(전주농, 1959) 또는 정부의 주요 관직(박윤원, 1963)으로 이해된다. 대행렬도 깃발의 묵서도 ‘성상번(聖上幡)’으로 판독해 고구려왕의 행렬로 이해했다(전주농, 1959). 동수의 관작도 처음에는 전연에서 받거나 고구려로부터 추증받은 관직(박윤원, 1963), 사후에 과장해 써준 관직(전주농, 1963) 등으로 보다가, 고구려가 사여한 관직(주영헌, 1985; 손영종, 1997)으로 파악했다. 묵서 내용을 모두 고구려왕과 관련시켜 이해한 것이다.
그렇지만 광개토왕릉비가 집안 지역에 위치한 것에서 보듯이 당시 고구려 왕릉은 도성인 국내성 일대에 조영되었다(김용준, 1957). 실제 342년 전연이 국내성을 함락한 다음, 미천왕의 무덤을 도굴한 사실이 확인된다. 또 고국원왕이나 고국양왕의 ‘고국(故國)’은 평양 천도 이후 종전 도성을 지칭하던 명칭으로, 고국원왕의 무덤이 국내성 지역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변경에 조영된 안악3호분을 고구려 왕릉으로 보기는 힘든 것이다.
상기 묵서는 내용이나 형식에서 중원대륙의 묘지(墓誌)와 거의 같다(剛崎敬, 1964; 공석구, 1989). 상기 묵서는 동수의 묘지이고, 무덤 주인공은 동수이다. 이에 한중일 3국 학계는 대부분 안악3호분의 주인공을 동수로 파악한다(宿白, 1952; 채병서, 1959; 1967; 김원룡, 1960; 剛崎敬, 1964). 이에 따른다면 서쪽 측실 입구의 장하독을 비롯해 측실 서벽의 기실, 소사, 성사, 문하배는 동수가 역임한 관작의 속관으로 이해된다(공석구, 1989). 또 대행렬도 깃발의 묵서가 ‘성상번’인지도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만 안악3호분의 주인공을 동수로 볼 경우, 그가 역임했다는 관직의 수여 주체가 문제가 된다. 동수는 336년 전연에서 고구려로 망명했는데, 당시 동수의 이력이나 전연의 관제로 보아 상기 관작을 모두 전연에서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동수가 고구려 망명 이후 동진으로부터 받거나(洪晴玉, 1959; 剛崎敬, 1964) 자칭했다(K.H.J. Gardiner, 1969; 공석구, 1989)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동수의 관작은 고구려와 관련이 없다는 것인데, 동수가 서북한 지역에 상당한 독자세력권을 구축했거나(剛崎敬, 1964; 공석구, 1989) 독립왕국을 건설했을 것(K. H. J. Gardiner, 1969)으로 파악했다.
그렇지만 고구려는 313·314년에 서북한 일대를 점령한 다음, 334년에 평양성을 증축하는 등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수가 독자적으로 동진으로부터 관작을 받는다든지 반독자적인 세력이나 독립왕국을 구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에 동수가 고구려의 지원 아래 서북한 일대에 정착하며 상기 관작 일부를 고구려로부터 받았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漥添慶文, 1981; 임기환, 1995; 김미경, 1996). 그런데 동수의 관작은 진대(晉代)의 관직과 관위로 이루어진 반면, 당시 고구려는 중원 왕조와 명확히 구별되는 관제를 정비했다(井上直樹, 2007; 여호규, 2014a). 동수가 고구려로부터 상기 관작을 수여받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다.
이에 동수가 상기 관작을 전연에서 수여받거나 고구려 망명 이후 동진으로부터 수여받았을 가능성을 상정하기도 했다. 333년 동수의 직책이 사마(司馬)였으므로 그 이후 모용인으로부터 상위 관작을 수여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임기환, 1995; 김미경, 1996). 다만 당시 전연 모용인이나 모용황의 관작으로 보아 동수가 전연에서 ‘사지절 도독제군사호 평동장군’을 수여받았을 가능성은 없다. 또 동진이 341년 전연의 세자인 모용준(慕容儁)에게 사지절보다 낮은 가절(假節)을 수여했고, 고국원왕에게는 책봉호를 수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망명객인 동수에게 사지절호와 도독제군사호를 수여했을 가능성은 없다.
결국 상기 관작은 동수가 자칭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에 동수가 상기 관작을 자칭하며 서북한에 독자 세력권을 구축했다고 보기도 했다. 그런데 도독제군사호는 관할구역을 명기해야 현실성을 갖는다. 이러한 점에서 관작을 자칭했다는 것만을 근거로 동수가 독자 세력권을 구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고구려는 334년 평양성을 축조하며 서북한 일대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했고, 349년 전연으로 송환된 송황의 사례에서 보듯이 중국계 망명객을 강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동수가 상당한 세력을 구축했더라도 고구려의 지원이나 통제 아래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이에 고구려가 중국계 이주민집단을 활용해 서북한을 경영했다고 상정한 다음, 동수가 고구려의 용인 아래 중국계 교민집단을 이끌며 상기 관작을 자칭했다고 보기도 한다(안정준, 2013; 2017a). 창려태수나 현도태수는 창려군이나 현도군 출신 교민집단을 이끌며 자칭했다는 것인데, 종전보다 상당히 설득력을 갖춘 견해이다. 다만 고국원왕이 355년에 전연으로부터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등의 책봉호를 받은 사실을 감안하면, 과연 고구려가 동수에게 고국원왕과 동급인 사지절호와 도독제군사호를 자칭하도록 용인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고구려가 중국계 이주민집단을 받아들여 교민자치구를 설치했더라도, 사지절호와 도독제군사호 등 최상위 관작을 자칭하도록 용인했을 가능성은 낮은 것이다.
동수가 역임했다는 관작을 종전에는 모두 생시에 수여받거나 자칭한 것이며 현실사회에서 기능했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동수가 역임했다는 관작 가운데 최상위의 사지절호와 도독제군사호는 허구적 자칭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에 필자는 동수의 관작은 전연에서 받은 것과 함께 이상적인 사후세계를 꿈꾸기 위해 자칭한 것으로 이해한다.주 008
동수는 고구려 망명 이후 어쩔 수 없이 고구려인으로 살았지만, 사후에는 중국인으로의 정체성을 되찾아 영생을 누리고 싶었을 것이다. 동수가 출신지를 유주(幽州)에서 평주(平州)가 분리되기 이전인 후한-서진시기를 기준으로 ‘유주 요동군 평곽현 경상리’로 일컬은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동수는 중원대륙이 혼란해지기 이전인 후한-서진을 이상세계로 여기며, 사후세계에서 이러한 통일왕조 아래 동방 지역을 관장하는 최고위 지방관을 꿈꾸었던 것이다. 동수묘지는 5호16국이라는 역동적인 시기에 고구려인과 중국인 사이를 오가며 살았던 중국계 망명객의 이중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여호규, 2009).
덕흥리벽화고분 묵서도 중국계 망명객의 이중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덕흥리벽화고분은 1976년 남포시 강서구역에서 조사되었다. 앞방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석실봉토묘인데, 벽면마다 행렬도 등 생활풍속계 벽화를 그리고, 설명문을 묵서로 적었다. 앞방에서 널방으로 가는 입구 위쪽에는 주인공 ‘□□진(□□ 鎭)’(이하 ‘진’)의 묘지가 있다. 앞방의 벽화는 서벽에 13군태수내조도(來朝圖), 남벽에 장군부의 막료, 동벽에 자사부의 속료를 대동한 출행 장면 등 진의 공적 활동과 관부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널방의 벽화는 동벽에 칠보행사도, 서벽에 마사희도, 남벽에 외양간 등 사적 행사나 저택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앞방 천정에는 22개 신상(神像)을 그렸다(박진욱 외, 1981; 서영대, 1992b). 또 연도 서벽과 동벽에는 각기 기유년(己酉年: 409) 2월 2일에 무덤을 닫았다는 묵서와 “[무덤을] 둘러본 자(所遊觀者)”라는 묵서가 있는데, 무덤 조영 이후 일정 기간 방문객에게 내부를 개방했고, 묵서는 방문자에게 벽화를 설명하기 위한 방제(傍題)라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다(김근식, 2020; 2021a; 안정준, 2021).
진의 묘지와 함께 13군태수내조도, 장군부의 막료조직, 칠보행사도의 묵서가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 진의 국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견해가 많이 달라졌다. 진은 “□□군(□□郡) 신도현(信都縣) 중감리(中甘里)” 출신으로 최고위직으로 유주자사를 역임했다고 적혀 있다. 북한 학계는 “고려의 가주(嘉州: 평북 박천)가 본래 고구려의 신도군(信都郡)이었다”는 『고려사』 지리지를 근거로 진이 고구려 출신이었다고 보았다. 이에 진의 묘지와 13군태수내조도를 근거로 고구려가 370년대에 북경(北京) 일대까지 진출했다고 상정하는 한편, 고구려의 통치제도가 상당히 정비되었다고 파악하였다(김용남, 1979; 박진욱 외, 1981; 손영종, 1987; 1991a; 1991b).
그렇지만 『고려사』 기사를 근거로 광개토왕시기의 고구려에 신도군이 존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이때 고구려가 북경 일대까지 진출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묘지의 신도현은 북경 서남쪽에 위치한 기주(冀州) 안평군(安平郡: 長樂郡)에 소속된 현으로 진은 중국계 망명객으로 파악된다(김원룡, 1979; 康捷, 1986; 佐伯有淸, 1987a). 다만 진은 ‘국소대형(國小大兄)’이라는 고구려 관등을 지냈고, 무덤 조성 연도를 광개토왕의 연호인 ‘영락(永樂)’으로 표기했다. 칠보행사도 묵서의 대묘(大廟)는 고구려 왕실의 종묘(宗廟), 중리도독(中裏都督)은 고구려왕의 근시(近侍)와 관련된 관명으로 이해된다(이문기, 2000a; 2000b; 이규호, 2015). 진이 고구려 관등을 수여받고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이다.
그런데 진의 관명 가운데 국소대형을 제외하면, 모두 중국식 장군호와 지방관명이다. 이에 진이 중원 왕조로부터 관작을 받거나(劉永智, 1983) 자칭했다는(武田幸男, 1989b; 공석구, 1990) 견해가 제기되었다. 진이 역임한 관명은 모두 8개이다. 전반부의 4개 가운데 ‘국소대형’을 제외한 나머지 3개는 중국식 장군호이고, 후반부의 관명은 ‘사지절’을 제외하면 모두 지방관명인데, 양자 모두 하위에서 고위의 순서로 기술했다. 묵서의 관직은 진이 역임한 순서에 입각해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전반부의 장군호와 후반부의 지방관명을 짝지으면, 가장 앞의 ① 건위장군-요동태수가 중원 왕조에서 수여받았다면, ② 【국】소대형-사지절(또는 국소대형만)은 망명 이후 고구려로부터 수여받은 관작, ③ 좌장군-동이교위와 ④ 용양장군-유주자사는 망명 이후 자칭한 관작으로 이해된다.
그럼 진이 고구려로부터 【국】소대형을 수여받은 상태에서 또 다른 관작을 자칭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본 연구자들은 고구려가 이들 관작을 수여했다고 설정한 다음, 진의 막부조직을 통해 낙랑·대방 지역을 통할하던 양상을 추론하거나(임기환, 1995) 유주까지 진출했다고 파악했다(박진욱, 1980; 장국종, 1992; 이인철, 1998). 그렇지만 고구려가 설치한 적이 없는 관작을 진에게 수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진이 고구려 관등을 수여받은 상태에서 또 다른 관작을 자칭했다는 것을 납득하기 어렵겠지만, 현재로서는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에 진이 고구려의 용인 아래 중국계 교민집단을 이끌며 상기 관작을 자칭했으며(안정준, 2013; 2017a), 칠보행사도의 ‘대묘’를 ‘대주(大廚)’로 판독하고 중리도독을 진의 사속인(私屬人)이라고 보기도 한다(안정준, 2017b).
그렇지만 고구려왕이 중원 왕조로부터 수여받은 책봉호와 동급인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라는 최상위 관작을 자칭하도록 용인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앞방에는 유주 관내의 13군태수내조도가 그려져 있는데, 교민자치구가 이처럼 질서정연한 지방제도를 갖추었으며, 유주 관내 13군의 교민이 모두 거주했을지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진이 고구려 관등을 수여받은 상태에서 또 다른 관작을 자칭한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와 관련해 13군태수내조도의 기술 내용이 주목된다. 이를 종합하면 진은 자기가 활동한 5호16국시기가 아니라 중원 왕조의 지배질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던 서진 초기를 기준으로 삼아 유주자사를 자칭한 것으로 파악된다. 진이 자칭한 유주자사도 이상적인 사후세계를 꿈꾸기 위해 설정된 것으로 생시에 기능했다고 보기 어렵다. 진도 생전에는 고구려인으로 살았지만, 저승에서는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입각해 중원 왕조의 지방관으로 영생을 누리고 싶었던 것이다. 다만 진의 묘지에는 동수의 묘지보다 고구려와 밀착된 요소가 많이 보이는데, 이는 서북한 지역 및 중국계 망명객에 대한 고구려의 통치력과 통제가 강화된 사실과 밀접히 관련된다(여호규, 2009).
2) 집안 지역 고분 묵서와 무덤 주인공의 성격
고구려 첫 번째와 두 번째 도성이 있었던 환인과 집안 지역에는 고분 묵서가 총 6기 분포한다. 다만 환인의 미창구장군묘는 졸본(卒本)시기가 아니라 5세기로 편년되며, 묵서도 ‘왕(王)’자 도안이다. 집안의 산성하332호분과 장천2호분에는 ‘왕(王)’· ‘공(工)’자 도안, 통구사신총에는 ‘담육부지족(噉宍不知足)’, 장천1호분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 등 짤막한 묵서가 적혀 있다. 묵서가 발견된 벽화고분이 5세기 중반 이후로 편년된다는 점에서 평양 천도 이후에도 환인이나 집안 지역이 종전 위상을 유지했음을 잘 보여준다(전호태, 2020).
집안 지역의 대표적인 고분 묵서는 모두루묘지이다. 모두루무덤은 앞방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석실봉토묘인데, 묘지는 앞방에서 널방으로 향하는 입구 위쪽에 있다. 첫머리 2행은 괘선을 긋지 않고 12자씩 적었다. 그다음부터 79행이 이어지는데, 괘선을 네모반듯하게 긋고 행마다 10자씩 썼다(池內宏, 1938; 池內宏·梅原末治, 1940). 800자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지워진 부분이 많아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이에 따라 주인공을 둘러싼 논쟁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처음 조사한 일본 학자는 가장 첫머리의 대사자(大使者) 모두루를 주인공으로 보았다(池內宏, 1938). 이에 대해 중국의 노간(勞幹)은 모두루 앞에 ‘노객(奴客)’이라는 비칭이 자주 나오고, 관등이 염모보다 낮다(대사자는 7위, 염모는 6위인 대형)는 점을 근거로 염모를 주인공으로 보고 모두루를 그의 가신으로 파악하였다(勞幹, 1944). 이 견해는 지금도 중국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4; 耿鐵華, 1987).
그렇지만 묘지 내용을 검토하면 모두루가 주인공이고, 염모는 그의 조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1~2행은 괘선을 긋지 않고 12자씩 적었는데, 무덤 주인공을 표기한 제기(題記)이다. 이 제기의 대사자 모두루가 주인공인 것이다(佐伯有淸, 1977; 1987b; 노태돈, 1992b). 지워진 부분이 많아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 쉽지 않지만, 제기(1~2행)를 제외하면 대략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武田幸男, 1981; 1989a; 여호규, 2004; 이준성, 2020).
첫째 단락(3~9행)은 모두루가의 시조를 서술한 부분이다. 다만 가장 먼저 고구려 건국설화를 기술했는데, “천하 사방이 이 나라의 ▣가 가장 성스러움을 알고 있을지니”라는 명문은 천하의 중심국을 표방하는 고구려의 천하관을 잘 보여준다(노태돈, 1988; 1999). 그런 다음 모두루가 시조의 내력을 기술했는데, 모두루 가문이 마치 고구려 왕실에 헌신하기 위해 탄생한 존재처럼 그려지고 있다.
둘째 단락(10~39행)은 모두루의 조부인 염모의 사적을 기술한 부분이다. 염모가 활동한 ‘▣강상성태왕(▣岡上聖太王)’은 331~371년에 재위한 고국원왕이다. 14행의 ‘반역(叛逆)’ 구절은 염모가 모종의 반역을 평정했음을 알려준다. 23~26행의 “모용선비가…북부여로 와서…. 이에 대형 염모가…” 구절은 346년 모용선비(전연)이 부여를 침공했을 때 전공을 세웠음을 전한다(武田幸男, 1989a; 노태돈, 1989). 염모는 대내외적으로 큰 공훈을 세워 81행 중 30여 행을 차지할 정도로 모두루가의 중시조로 떠받들어졌다.
셋째 단락(40~44행)은 대형 관등을 지닌 인물 2명이 등장하는데, “조부의 □□로 말미암아 대대로 관은(官恩)을 입고, 조(祖)의 북도(北道) 성민(城民)과 곡민(谷民)을 은혜롭게 다스렸다”고 한다. 조부나 조(祖)는 염모, 북도는 국내성에서 북쪽 방면인 북부여에 이르는 교통로를 일컫는다. 모두루가의 인물들이 염모의 공훈을 이어받아 북부여 방면 교통로 주변의 백성을 다스렸다는 것인데, 염모의 공훈이 세습되던 양상과 함께 교통로를 따라 지방제도를 정비하던 모습을 잘 전한다(여호규, 1995; 2000).
넷째 단락은 44행 이하인데, 모두루의 사적을 기술했다. 45행의 ‘조부로 말미암아(緣祖父)’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모두루도 염모의 공훈에 힘입어 광개토왕 대에 ‘□□모(□□ 牟)’라는 인물과 함께 ‘영북부여수사(令北扶餘守事)’로 파견되었다. 이때 광개토왕이 사망했는데, 모두루는 조문하지 못함을 몹시 애통해했다(44~51행). 또 57행의 ‘노노객(老奴客)’이라는 표현은 모두루가 장수왕시기에도 계속 활동했음을 보여준다. 이로 보아 모두루묘지는 5세기 중반을 전후한 장수왕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이 모두루묘지는 네 단락으로 나뉘는데, 각 단락은 모두루가의 인물이 고구려왕과 짝을 이루는 구조로 기술되어 있다. 첫째 단락의 시조인 노객 조선(祖先)은 시조 추모성왕, 둘째 단락의 중시조인 대형 염모는 ▣강상성태왕(고국원왕), 셋째 단락의 대형 2명은 전왕(前王), 모두루 자신은 광개토왕-장수왕과 각기 짝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 모두루가의 내력보다 왕실의 신성성을 더 부각했다.
국왕은 성왕(聖王)이나 성태왕(聖太王)으로 높인 반면, 모두루가의 인물은 왕에 예속된 노객(奴客)으로 “대대로 왕의 은혜를 입었다”고 묘사했다. 이러한 표현은 모두루가를 비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위상을 격상시키려는 역설적 필법이다. 당시 고구려는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어 귀족가문은 국왕과의 관계를 통해 권력기반을 확보했는데, 모두루가도 왕실과의 주종관계를 통해 위상을 더욱 높인 것이다(武田幸男, 1981; 1989a). 모두루묘지는 전통적인 고구려 귀족가문의 정치의식을 잘 보여준다.
이와 함께 건국설화에 바탕을 둔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노태돈, 1989; 1999), 북부여 지역을 둘러싼 전연=모용선비와의 각축전(武田幸男, 1981; 1989a), 교통로를 활용한 지방제도의 정비 양상(여호규, 1995; 2014a)을 잘 보여준다. 특히 모두루가 역임한 영북부여수사는 충주고구려비의 고모루성수사와 함께 ‘수사(守事)’라는 지방관의 존재를 전하는데, 그 성격은 태수급(노태돈, 1996; 1999) 또는 광역행정구역(김현숙, 1996; 2005) 지방관으로 이해된다. 모두루묘지는 고구려 귀족가문의 정치의식을 비롯해 다양한 역사상을 담고 있는데, 금석문이나 문자자료가 일급 사료임을 잘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