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광개토왕릉비와 집안고구려비
3. 광개토왕릉비와 집안고구려비
1) 광개토왕릉비의 재발견과 초창기 연구
광개토왕릉비(이하 ‘능비’)는 집안분지 동쪽에 위치하는데, 서남쪽 300m에 태왕릉, 동북쪽 1.8km에 장군총이 자리한다. 비석은 화산암인 각력응회암(角礫凝灰巖)을 약간 다듬어 만들었는데, 높이 6.39m의 사각기둥 모양이다. 4면에 모두 장방형 테두리와 세로 방향의 괘선을 긋고, 9~12.5cm 크기로 네모반듯하게 1,775자를 새겼다(노태돈, 1992a).
비문 내용은 흔히 서문, 무훈 기사, 수묘 기사 등 세 단락으로 구분한다(那珂通世, 1893; 박시형, 1966). 그렇지만 한대(漢代) 묘비 형식을 빌려 비문을 작성했다는 점에서 6행 ‘기사왈(其辞曰)’을 기준으로 서문과 본문으로 구분되며(정인보, 1955; 이성시, 2008), 무훈 기사와 수묘 기사는 각기 본문 1·2에 해당한다고 파악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武田幸男, 1989a; 여호규, 2014c).
서문에는 건국설화, 시조 이래의 왕위계승, 광개토왕의 행장을 기술했다. 무훈 기사에는 광개토왕이 사방을 정복하며 세운 무훈을 연대순으로 일목요연하게 서술했다. 수묘 기사에는 왕릉을 지킬 수묘인의 징발 현황을 지역별로 열거하고, 관련 법령과 조치를 기술했다. 이처럼 능비는 분량이 방대하며 매우 다채로운 내용으로 이루어졌지만, 초창기 연구에서는 일제의 왜곡된 연구로 인해 충분히 주목받지 못하였다.
조선시대 사람들도 능비의 존재를 알았지만, 여진족이 세운 금의 유적이라 여겼다. 능비는 청의 봉금정책 해제로 회인현(懷仁縣)이 설치된 직후인 1880년 무렵 재발견되었는데(박시형, 1966; 武田幸男, 2007a), 두껍게 낀 이끼를 불태워 제거하는 과정에서 비석이 많이 박락되었다(楊守敬, 1909; 顧燮光, 1918). 또 능비가 워낙 거대하고 울퉁불퉁해 초창기에는 비면에 종이를 대고 글자 윤곽을 본뜬 다음 먹을 칠하는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나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을 제작했다.주 009 쌍구가묵본(묵수곽전본)은 글자 윤곽을 본뜨는 과정에서 제작자의 주관이 개입하므로 탁본보다 판독문에 가깝다.
비문을 직접 탁본한 원석탁본(原石拓本)은 1887~1889년에 제작되었다.주 010
각주 010)

원석탁본은 나진옥(羅振玉) 등 청의 학자들이 일부 활용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잊혀졌다. 1890년대 이후 석회탁본이 널리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석회탁본은 비면에 석회를 칠해 글자를 선명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변형과 왜곡이 일어났다.주 011 게다가 1903년 영희(榮禧)의 ‘고구려영락호태왕묘비난언(高句麗永樂好太王墓碑讕言)’처럼 모든 글자를 제멋대로 보입(補入)한 사실상 가짜 판독문도 나돌았다.주 012 능비 연구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한 것인데,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이 능비를 대륙침략의 도구로 악용하면서 더욱 심하게 왜곡되었다.담국환(談國桓)의 「수찰(手札)」에 따르면 1887년 봉천성(奉天省) 독학사(督學使) 양이(楊頤)가 6벌, 나진옥(羅振玉)의 「용려일찰(俑廬日札)」에 따르면 1889년 북경(北京)의 탁공(拓工) 이운종(李雲從)이 50벌을 제작했다(박시형, 1966). 현전하는 원석탁본 가운데 대만의 부사년을본(傅斯年乙本), 중국의 복대(北大)E본, 왕씨(王氏)소장본, 중국국가도서관본 등 4종은 1887년, 국내의 청명본(현 국립중앙박물관본, 규장각소장본 포함)과 혜정본, 대만의 부사년갑본(傅斯年甲本), 중국의 북대(北大) A·B·C·D본, 일본의 미즈타니 데지로본(水谷悌二郞本)과 가네코 오테이본(金子鷗亭本), 소장처 미상의 서통본(書通本) 등 10종은 1889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창기 연구는 청과 일본이 주도했다. 청의 학자로는 왕지수가 능비 건립연대를 414년으로 고증하고, 고구려의 위세가 신라, 백제, 왜, 동부여에 떨친 것을 기술했다며 고구려를 중심으로 고찰했다(王志修, 1895). 나진옥은 석회탁본과 함께 1889년에 제작된 원석탁본을 참조해 상당히 정확한 판독문을 작성했다(羅振玉, 1909). 유승간도 나진옥의 판독을 기초로 비문을 재판독하고 주요 기사를 해설했고(劉承幹, 1922), 유절은 비문을 재판독하는 한편, 문헌사료를 참조해 지명 고증을 시도했다(劉節, 1928). 청의 학자들이 일찍부터 능비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박시형, 1966; 王健群, 1984). 다만 이들은 능비를 면밀하게 분석하지는 못했는데, 주로 금석학의 관점에서 접근했기 때문이다.주 013
일본의 초창기 연구는 대륙침략을 획책하던 육군 참모본부가 주도했다. 청에 파견된 참모본부 스파이인 사코 가게노부(酒匂景信)가 1883년 10월경 탁본(사코본)을 일본으로 가져오자, 참모본부 주도로 연구를 진행해 1889년에 『회여록(會餘錄)』 5집에 발표했다. 이때 일제의 대륙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이른바 ‘신묘년’조를 대서특필하며 “백제와 신라가 왜(일본)의 신민으로 나온다”는 점을 강조했다(橫井忠直, 1889).
1890년대에 간 마사토모, 나카 미치요, 미야케 요네기치가 잇따라 논고를 발표했다(管政友, 1891; 那珂通世, 1893; 三宅米吉, 1898a). 특히 미야케 요네기치는 청일전쟁 이전에 제작된 고마쓰노미야본(小松宮本)을 참조해 사코본의 오류를 다수 바로잡았다(三宅米吉, 1898b). 이들은 국명과 지명을 고증하고, 무훈 기사를 분석해 능비 연구를 심화시켰다. 다만 이들도 무훈 기사를 『일본서기』 기사와 대비하며 왜의 한반도 진출을 강조했다(末松保和, 1959; 1996; 佐伯有淸, 1972a). 심지어 러일전쟁 직후에는 일제가 능비를 일본으로 밀반출하려 획책하기도 했다(李進熙, 1972; 1974; 이기동 역, 1982).
일본 학자들은 20세기 전반에 일제의 지원 아래 능비를 조사하며 이러한 연구경향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마니시 류는 1913년 능비 조사를 통해 석회탁본에서 탁출하지 않던 제3면 1행을 확인하고 몇 글자를 새롭게 판독했지만, 무훈 기사 해석에서는 여전히 왜의 한반도 진출을 강조했다(今西龍, 1915; 1970). 스에마쓰 야스카즈도 신묘년이 331년일 가능성을 제기하며 전치문설(前置文說)의 효시를 이루는 언급을 했지만, 왜가 한반도에 진출해 백제·신라의 건국에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했다(末松保和, 1935).
이처럼 일본 학자들은 일제의 대륙침략을 뒷받침하기 위해 방대한 비문 가운데 32자에 불과한 신묘년조를 대서특필했다. 특히 신묘년조 후반부를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百殘), ▣□, 신라를 격파해서 신민으로 삼았다(而倭以辛卯年, 來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로 해석한 다음, 이를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강조했다. 이를 통해 야마토(大和)정권이 4세기에 일본열도를 통일하고, 한반도 남부에 진출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했다(末松保和, 1949). 능비가 일제의 대륙침략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며 연구의 방향이 왜곡된 것이다.
2) 광개토왕릉비 신묘년조와 무훈 기사의 성격
초창기의 왜곡된 연구로 인해 능비 연구는 상당 기간 신묘년조를 둘러싼 공방전으로 전개되었다. 먼저 정인보는 당시 일본 학계의 통설을 비판하며 신묘년조 후반부의 ‘래도해(來渡海)’를 ‘래(來)’와 ‘도해(渡海)’ 두 개의 동사로 분리한 다음, ‘래’의 주어를 왜, ‘도해’의 주체를 고구려로 구분해 설정했다. 그런 다음 “왜가 신묘년에 침입해 오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하였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계하여] 신라를 침략하자, [대왕이 신라는 나의] 신민인데 어찌 이럴 수 있는가?”라고 해석했다. 왜가 백제나 신라를 격파해 신민으로 삼은 적이 없다고 반박한 것이다(정인보, 1955).
정인보의 해석은 북한 학계에 영향을 미쳐 박시형의 저서에 반영되었다(박시형, 1966). 다만 정인보의 견해는 짧은 문장에서 주어가 너무 자주 바뀌고 결자(缺字)를 임의로 보입(補入)했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에 김석형은 ‘도해’ 이하의 주어를 모두 고구려로 상정하여 “왜가 신묘년에 건너왔다.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제, □□, 신라(또는 加羅)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였다(김석형, 1966).
북한 학계가 정인보의 비문 해석을 바탕으로 신묘년조를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그런 다음 박시형은 능비의 신묘년조를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던 일본 학계의 통설과 제국주의적 침략사관을 강렬하게 비판했다. 김석형은 야마토정권이 4세기에 일본열도를 통일했다는 일본 학계의 통설을 비판하며, 능비의 왜는 북규슈로 건너간 백제계 이주민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정인보와 북한 학계의 연구성과는 일본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주 014
일본 학계는 일제가 대륙침략을 위해 능비를 악용한 점을 반성하는 한편(中塚明, 1971; 前澤和之, 1972; 旗田巍, 1973), 북한 학계의 신묘년조 해석을 수용하기도 했다(佐伯有淸, 1972b; 古田武彦, 1973). 또 육군 참모본부가 능비 연구를 주도한 상황을 고찰하는 가운데(佐伯有淸, 1972a; 1977), 육군 참모본부가 비문을 조작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석회를 칠했다는 비문조작설이 제기되었다(李進熙, 1972; 1974; 이기동 역, 1982).
이러한 가운데 하마다 고사쿠가 전치문설을 제기했다. 그는 무훈 기사를 ‘왕궁솔(王躬率)’형과 ‘교견(敎遣)’형으로 분류한 다음, 왕궁솔형 기사의 서두에는 광개토왕의 무훈을 칭송하기 위해 고구려에 불리한 상황을 서술한 전치문을 두었다고 보았다. 신묘년조도 영락6년 백제 정복전의 전치문이자 영락6~17년의 대전치문이라며, 실제 사실이 아니라 사신(史臣)의 필법에 의한 허구라고 보았다(濱田耕策, 1973; 1974).
전치문설은 일본 학계에 북한 학계의 비판이나 비문조작설에서 벗어나 종전의 통설을 유지할 방안을 제공했다.주 015
각주 015)

이에 따라 전치문설은 일본 학계에서 철안(鐵案)으로 받아들여졌다. 다만 일본 학계는 신묘년조를 허구로 본 하마다 고사쿠와 달리 사실성이 담겨 있다며(武田幸男, 1989a), 왜의 활동을 강조했다(鈴木靖民, 1985; 田中俊明, 2001). 1970년대 이후 일본 학계에서 4~5세기 일본열도 통일왕조설이나 임나일본부설은 퇴조했지만, 한반도에 대한 왜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견해가 이어진 것이다.이 무렵 니시지마 사다오(西嶋定生, 1974·1985)가 신묘년조 후반부의 ‘래도해(來渡海)’를 ‘래(來)’와 ‘도해(渡海)’ 두 동사로 분리한 정인보의 해석에 대해 이 구절의 ‘래(來)’는 ‘이래(以來)’를 뜻한다며 ‘도해(渡海)’의 주체를 왜로 보는 견해를 제기했다. 또 최근 최연식(2020)은 ‘래도(來渡)’의 목적어로는 목적지만 올 수 있다며 ‘해(海)’ 판독안을 부정했다. 그렇지만 ‘래도(來渡)’가 복합동사로 사용되면서 ‘해(海)’나 ‘강(江, 河)’을 목적어로 취하는 사례가 다수 확인되며(王仲殊, 1990; 기경량, 2022), ‘해(海)’ 판독안을 재확인한 연구도 제출되었다(기경량, 2020; 여호규, 2023a). ‘래도해(來渡海)’는 “바다를 건너오다”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국내 학계도 북한 학계나 비문조작설의 영향을 받으며 신묘년조를 본격적으로 검토했다. 정인보처럼 ‘도해’의 주어를 고구려로 상정한 견해(정두희, 1979)나 비문조작설(이형구·박노희, 1981; 1986)도 제기되었다. 그렇지만 다수 연구자는 ‘래도해파(來渡海破)’ 구절 가운데, 해(海)를 사(泗), 탕(盪), 인(因), 왕(王), 매(每), 시(是), 전(沺), 반(伴, 叛)으로 판독하거나, 파(破)를 고(故)나 조(助)로 판독해 비문을 새롭게 해석했다.주 016
이들 견해는 크게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해 영락6~10년 고구려의 정복활동을 총괄했다고 보는 집약문설주 017 및 “백제가 왜와 연계해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삼으려 했다)”고 해석해 영락6년 백제 정복의 이유를 기술했다고 보는 원인문설주 018로 구분된다. 최대한 고구려의 관점에서 해석하려 한 것인데, 비문 판독과 문장 구두(句讀)가 얼마나 정확한지가 관건이다. 한편 일본 학계의 통설적 해석과 전치문설을 수용한 다음, 능비 찬자가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비문 찬술 당시의 상황을 소급해 과장·윤색했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연민수, 1995; 기경량, 2022).
이처럼 신묘년조를 둘러싼 논란이 가열되는 가운데 중요한 실증적 연구가 이루어졌다. 먼저 1959년에 발표된 미즈타니 데지로의 원석탁본 연구이다. 그는 석회탁본 이전에 원석탁본이 제작되었음을 밝히고, 비문을 재판독하여 종전 판독의 오류를 상당수 바로 잡았다(水谷悌二郞, 1959). 다만 원석탁본에 입각한 그의 연구는 처음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1970년대 중반 이후에야 널리 받아들여졌다(水谷悌二郞, 1977).주 019
북한의 박시형은 능비에 관한 방대한 저서를 처음 간행했다. 그는 1963년 현지에서 직접 비석을 관찰해 10여 자를 새롭게 판독했을 뿐 아니라, 4~5세기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며 비문을 재해석했다. 특히 문헌사료와 비교해 영락5년조의 정토대상을 거란으로 비정하고, 수묘역을 번상제로 파악하는 등 새로운 견해를 다수 제시했다(박시형, 1966).
중국의 왕건군은 비면 관찰과 주운태본을 바탕으로 89자를 새롭게 판독한 저서를 출간했는데,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 해석을 비롯해 능비 연구에 영향을 크게 미친 견해를 다수 제시했다. 특히 능비의 재발견 경위와 탁공 초천부(初天富)가 석회를 칠한 사실도 밝혔다.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한 ‘안라인수병’ 명사설을 비판하는 한편, 비문조작설이 성립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王健群, 1984).
이로써 왜곡되었던 능비 연구가 점차 제자리를 찾았다. 원석탁본을 바탕으로 비문을 판독하고 체계적으로 고찰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와 함께 국내의 청명본(임창순, 1973), 대만의 부사년 갑·을본(傅斯年 甲·乙本)(高明士, 1983; 1984; 1996), 일본의 가네코 오테이본(金子鷗亭本)(金子鷗亭, 1982; 1987) 등 원석탁본이 잇따라 발견되었다(武田幸男, 1988). 중국에서도 원석탁본 7종이 발견되었다(徐建新, 1993; 2006; 임기중 1995).주 020 이에 여러 연구자가 원석탁본을 검토해 비문을 재판독하는 한편,주 021 무훈 기사뿐 아니라 서문과 수묘 기사를 다각도로 고찰했다.
이를 통해 광개토왕의 정복활동, 고구려의 천하관·외교관계, 건국설화, 지방제도, 수묘제와 수취체계 등을 다각도로 검토했다.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논저가 있는데,주 022 주요 쟁점만 살펴보고자 한다. 다만 서문과 수묘 기사에 관한 연구성과는 집안고구려비와 겹치는 부분이 많으므로 제4소절에서 다루고자 한다.
무훈 기사는 영락5년(395)의 패려 정토, 신묘년(391)조, 영락6년의 백제 토벌, 영락8년의 숙신 시찰, 영락9년의 평양 순행, 영락10년의 신라구원전, 영락14년의 왜 정벌, 영락17년조, 영락20년의 동부여 정토, 무훈 총괄 등 총 10개조로 이루어져 있다.
영락5년의 정토 대상은 쌍구가묵본(묵수곽전본)이나 석회탁본에는 비려(碑麗)로 탁출되었지만, 원석탁본을 통해 패려(稗麗)로 판독할 수 있다(水谷悌二郞, 1959). 패려의 실체는 거란8부의 하나인 필혈부(匹絜部)로 서요하 상류 일대로 비정된다(박시형, 1966; 서영수, 1988). 후반부에는 광개토왕이 요동 일대를 순행하며 개선하는 장면을 기술했는데, 지명 판독과 위치 비정을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다(여호규, 2005; 서영수, 2013a).
영락6년조는 백제를 정벌해 58성을 공취하고, 백제왕의 항복을 받은 사실을 기술했다. 정복범위에 대해 임진강 유역과 한강 북쪽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된 가운데(이병도, 1975; 천관우, 1979), 이를 포함해 경기 서해안(박시형, 1966; 이인철, 1996), 북한강 유역(여호규, 2012), 충북 동북부(손영종, 1986a), 남한강 상류(이도학, 1988; 서영일, 2006), 충남 내륙(酒井改藏, 1955; 박성봉, 1979)까지 진격했다는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다.
영락8년의 정토 대상인 ‘▣신(▣愼)’의 ‘▣’자에 대해서는 ‘▼{白+而}=息’(橫井忠直, 1889; 박시형, 1966)와 ‘帛’(水谷悌二郞, 1959; 王健群, 1984) 판독안이 대립하는 가운데, ‘肅’(武田幸男, 1989a; 임기중, 1995; 徐建新, 2006; 기경량, 2020) 판독안도 제기되었다. 그 실체에 대해서도 숙신(읍루)설(橫井忠直, 1889; 박시형, 1966; 천관우, 1979; 武田幸男, 1989a)과 한반도 중남부 정치체설(管政友, 1891; 今西龍, 1915; 濱田耕策, 1974; 서영수, 1982; 王健群, 1984; 김영하, 2012)로 나뉜다. 다만 어디로 비정하더라도 시찰(視察)을 뜻하는 ‘관(觀)’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정복보다는 고구려에 편입된 세력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한 조치로 해석한다(천관우, 1979; 王健群, 1984).
영락9년조는 광개토왕이 왜와 화통한 백제를 압박하려고 평양에 순행했을 때, 신라가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한 사실을 기술했다. 신라 사신이 말한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하여 성곽을 궤파해(또는 궤파하니) 노객을 민으로 삼으니(또는 노객을 민으로 삼아) 왕에게 귀의하여 명을 청하옵니다(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구절의 ‘민(民)’을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다. 일찍이 일본 학자들이 ‘왜의 신민이나 속민’으로 해석했는데(管政友, 1891; 那珂通世, 1893), 정인보가 ‘고구려왕의 백성’으로 보는 견해를 제기해 국내와 북한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정인보, 1955; 박시형, 1966; 천관우, 1979).
영락10년조는 5만 대군을 보내 왜를 격퇴하고 신라를 구원한 사실을 기술했다. 3회나 나오는 ‘안라인수병’ 구절이 핵심 쟁점이었는데, 일본 학자들은 ‘안라(가야)인 수병’으로 해석한 다음, 왜군에 종속된 별동대로 보아 임나일본부설을 논증하고 왜의 영향력을 강조하려 했다(那珂通世, 1893; 三宅米吉, 1898a). 이에 대한 비판으로 백제의 부용병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어 국내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이기도 했다(천관우, 1979). 이런 가운데 중국의 왕건군이 “[고구려가] 신라인을 안치하여 수수(戍守)하게 했다”로 해석해 ‘신라인 수병설’을 제기했는데(王健群, 1984), 고구려 순라군설(高寬敏, 1990)이나 임나가라 수병설(이도학, 2006)로 발전하기도 했다(여호규, 2023c).
영락14년조는 왜가 백제와 연계하여 대방계(帶方界)를 침공하자, 광개토왕이 몸소 출정하여 왜를 격파한 상황을 기술했다. 대방계를 대동강 유역까지 포함하기도 하지만(管政友, 1891; 那珂通世, 1893; 今西龍, 1915), 대체로 황해도 남쪽 해안지역으로 비정한다(손영종, 2001). 영락17년조는 정토 대상을 기술한 부분이 박락되었다. 대체로 영락14년조와 연계해 백제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지만(三宅米吉, 1898a; 박시형, 1966; 王健群, 1984), 후연으로 보기도 한다(정두희, 1979; 천관우, 1979; 임기환, 1996; 공석구, 2012).
영락20년조는 동부여 정토 기사이다. 동부여의 실체는 일찍이 건국설화의 동부여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지만(박시형, 1966), 점차 285년 북옥저로 피신한 부여 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많아졌다(손영종, 1986a; 노태돈, 1989). 동부여의 위치는 종전에는 두만강 하류의 혼춘(琿春) 일대(천관우, 1979; 노태돈, 1989)로 보았지만, 연길(延吉)(김현숙, 2000; 여호규, 2017a)이나 목단강(牧丹江) 유역(손영종, 1986a; 임기환, 2012)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고구려에 내투한 5압로(鴨盧)의 실체는 성곽(那珂通世, 1893; 今西龍, 1915), 위호(位號)(三宅米吉, 1898a), 부족(이형구, 2014)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수장이나 귀족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박시형, 1966; 이병도, 1975; 王健群, 1984).
무훈 기사의 마지막 구절인 “무릇(凡) 공파한 것은 성이 64, 촌이 1,400이다”라는 동부여 정토의 결과로 보기도 하지만(末松保和, 1959; 손영종, 1986a; 공석구, 1990), ‘범(凡)’이 총괄을 뜻하므로 영락5~20년의 정토를 총결산한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성 64, 촌 1,400의 실체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는데, 크게 영락5년(600~700영), 영락6년(58성 700촌), 영락17년(6성)의 전과를 합한 것이라는 견해(武田幸男, 1989a) 및 영락6·17·20년의 전과를 합한 것이라는 견해(노태돈, 1999)로 나뉜다.
이상을 통해 무훈 기사의 쟁점을 살펴보았다. 종전 연구는 대체로 능비가 사실을 바탕으로 기술되었다는 전제 아래 진행되었다. 능비와 문헌사료가 다를 경우, 능비에 입각해 문헌사료를 비판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고구려와 백제가 390년대에 여러 차례 각축전을 벌인 것으로 나오지만, 능비에는 영락6년조에 일괄 기술했다(이기동, 1987). 더욱이 고구려는 400년 이후 후연과 치열한 각축전을 통해 요동평원을 확보했지만, 능비에는 관련 기술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능비 찬자가 광개토왕의 훈적을 현창하기 위해 주변국과의 각축전을 통합 기술하거나 윤색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해 거란 정벌(전반부)과 요동 순행(후반부) 기사로 이루어진 영락5년조가 주목된다. 『삼국사기』에도 광개토왕 즉위년에 거란을 정벌했다고 나오므로 전반부 기사는 실제 사실을 반영한다고 파악된다. 다만 후반부의 요동 순행 기사를 바탕으로 고구려가 395년에 이미 요동평원을 점령했다고 보기도 하지만(김영하, 1985; 서영수, 1988; 武田幸男, 1989a; 임기환, 2013), 고구려가 후연을 공격해 요동평원을 점령한 시점은 400~402년으로 후반부 기사를 실제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여호규, 2005; 노태돈, 2012).주 023
영락5년조에는 윤색된 부분이 섞여 있는 것이다. 대체로 능비 찬자가 첫 번째 무훈 기사에 고구려의 서쪽 방면인 거란 정벌과 요동 순행을 기술해 요하의 동방 지역을 고구려의 천하공간으로 상정한 다음, 조공·책봉관계를 맺었던 후연과의 각축전을 요동 순행으로 둔갑시켜 고구려 중심의 독자 천하관을 표방한 것으로 추정된다(여호규, 2009).
영락8년조도 주목된다. 정토 대상에 대해 논란이 분분한데, 대체로 ‘숙신(肅愼)’으로 그 실체는 읍루(挹婁)로 파악된다. 고구려 동북방의 읍루를 선진(先秦)시기의 숙신에 처음 비정한 것은 조위(曹魏)이다. 조위는 가장 동쪽의 읍루가 공헌(貢獻)하자, 숙신이 공헌한 것이라며 황제의 덕화(德化)가 천하에 미친 징표라고 내세웠다. 능비 찬자도 조위의 인식을 수용해 읍루를 숙신에 비정한 다음, 만주 일대의 여러 족속이 고구려 천하에 포섭된 것처럼 상정하고, 광개토왕의 덕화가 널리 미쳤다고 과시했다(여호규, 2017a).
이처럼 능비 찬자는 영락5년·8년조를 통해 고구려 중심의 독자 천하관을 표방했다. 신묘년조를 비롯한 무훈 기사에는 능비 찬자의 의도와 기획이 담겨 있는 것이다. 능비를 단순히 실제 사실을 기술한 사료가 아니라, 찬자를 비롯한 고구려인의 인식이나 천하관이 담긴 기록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노태돈, 1988; 1999). 이와 함께 능비 연구에 현재의 국가나 민족 단위의 역사의식을 과도하게 투영하기보다는 고구려인이 작성한 텍스트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李成市, 1994; 1996).
이와 관련해 종래 ‘논사(論事)’로 판독한 영락8년·10년조의 구절이 ‘영사(聆事)’로 새롭게 판독된 사실이 주목된다(고광의, 2014a; 2014b). ‘영사’는 주변국의 왕이나 수장이 직접 고구려에 와서 고구려 왕의 명을 들었다는 뜻인데, 신묘년조나 무훈 기사의 속민(屬民)과 조공(朝貢)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할 실마리를 제공한다. 종전에는 ‘속민’을 복속민이나 지배·예속적 관계를 뜻한다고 보고, 고구려가 지향한 이상적인 외교관계를 조공관계라고 이해했다(濱田耕策, 1974; 서영수, 1982; 양기석, 1983; 武田幸男, 1989a; 노태돈, 1999).
그렇지만 ‘속민’의 ‘속(屬)’은 ‘속하다’는 뜻으로 글자 자체에 지배·예속이라는 의미는 없다. 속민이라는 표현은 능비 찬자가 백제(백잔)나 신라가 고구려의 천하질서에 소속된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했고, 그 소속의 징표로 ‘조공’했다고 기술한 것이다. 고구려가 지향한 궁극적인 지배·예속적인 외교관계는 ‘영사’라는 용어에 잘 담겨 있다. 고구려가 영락10년의 구원전을 통해 신라를 예속국으로 삼은 다음, 신라왕이 직접 와서 고구려왕의 명을 듣는 ‘영사’ 행위를 한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여호규, 2023c).
그러므로 능비 연구를 더욱 심화시키기 위해서는 능비에 담긴 찬자의 인식과 실제 역사적 사실 사이의 간극을 더욱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논란 중인 신묘년조도 이러한 관점을 견지하며 분석해야 다수 연구자가 공감할 수 있는 해석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하마다 고사쿠와 서영수가 전치문설과 집약문설을 제시한 것처럼 무훈 기사의 서사구조를 더욱 체계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무훈 기사는 한대의 묘비 형식을 빌린 측면과 함께, 과거(서문), 현재(무훈 기사), 미래(수묘 기사)라는 시간의 흐름까지 고려해 작성한 면모가 확인되기 때문이다(임기환, 2014a).
3) 집안고구려비의 내용과 성격
집안고구려비(이하 ‘집안비’)는 2012년 집안분지 서쪽의 마선하(麻線河)에서 발견되었다. 다만 넘어진 채 묻혀 있었다는 점에서 발견 지점을 건립 장소로 보기는 어렵다. 비석은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편평한 장방형으로 비수(碑首)는 규형(圭形)이다. 잔고(残高)는 173cm, 너비는 60.6~66.5cm로 정면과 뒷면에 비문을 새긴 2면비이다. 정면은 10행으로 1~9행은 행당 22자, 10행은 20자로 총 218자인데, 우상단 10자는 깨져 판독할 수 없다. 뒷면도 판독하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마멸되었다(集安市博物館 편저, 2013).
집안비도 광개토왕릉비처럼 서문과 본문 1·2로 이루어져 있다. 서문에는 건국설화와 왕위계승을 압축적으로 기술했다.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개창하셨도다(始祖鄒牟王之創基也.)”라는 구절은 능비와 일치하는 표현이지만, ‘천도(天道)’나 ‘원왕(元王)’은 능비에 없는 표현이다. 본문 1은 광개토왕 대 이전 수묘제의 시행 양상을 기술한 것인데, ‘사시제사(四時祭祀)’ 구절은 능묘제사의 시행을 전한다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본문 2는 광개토왕이 수묘제를 수복(修復)한 양상을 기술했는데, 관련 법령의 발포, 수묘비의 건립, 수묘인 매매금지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수묘비 건립과 수묘인 매매금지령과 관련한 기사는 능비의 수묘 기사와 거의 같다. 종전에 광개토왕이 “역대 선왕의 능묘에 수묘비를 건립하고 수묘인 매매금지령을 시행했다”는 능비의 기사를 신빙하지 않기도 했는데, 집안비의 발견으로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처럼 집안비는 능비와 겹치는 내용이 많다. 이에 두 비문을 비교하여 건국설화와 수묘제를 고찰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다. 다만 마멸로 인해 판독하기 힘든 글자가 많아 집안비의 내용, 건립시기, 성격을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다(강진원, 2013; 여호규, 2016).
집안비 보고서에서는 7행 10~11자의 간지(干支)를 ‘무자(戊子: 고국양왕5, 388)’로 판독한 다음, 고국양왕이 수묘제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고, 광개토왕이 이를 바탕으로 수묘비를 건립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비석 발견 지점을 천추총의 수묘인 거주구역으로 상정한 다음, 광개토왕이 부왕(고국양왕)의 무덤(천추총)에 건립한 수묘비로 파악했다. 집안비는 광개토왕이 역대 선왕의 능묘에 세웠다는 수묘비의 하나라는 것이다.
여러 중국 학자가 보고서를 바탕으로 심화 연구를 진행했다. 1차 조사를 주도한 경철화는 7행 10~11자를 ‘무신(戊申: 광개토왕18, 408)’으로 판독해 이해에 수묘제 관련 법률을 제정하고 수묘비를 건립했다고 보는 한편, 5행 7~11자의 ‘국강상태왕(國岡上太王)’을 광개토왕으로 비정해 5~6행에 광개토왕의 공적을 기술했다고 보았다(耿鐵華, 2013c). 임운은 7행 4~8자를 ‘계묘세간석(癸卯歲刊石)’으로 판독해 광개토왕 13년(403)에 건립했다고 보는 한편, 5행 7~11자의 ‘국강상태왕’을 고국원왕으로 비정해 고국원왕릉(천추총)의 수묘비로 보았다(林澐, 2013).
이에 대해 장수왕이 건립했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손인걸은 7행 4~8자를 ‘정묘세간석(丁卯歲刊石)’으로 판독해 장수왕 15년(427)에 건립했다고 상정하며, 평양 천도에 앞서 율령과 수묘제를 강화하기 위해 세운 율령비로 보았다(孫仁杰, 2013b; 2013c). 장복유도 유사한 견해를 제기했는데, 다만 7행 10~11자를 ‘무신(戊申)’으로 판독해 광개토왕 18년에 수묘제 관련 율령을 제정했다고 보았다(張福有, 2013c).주 024
국내 학계에서도 광개토왕대건립설과 장수왕대건립설이 양립했는데, 광개토왕대설이 우세한 편이다. 특히 장수왕대설의 핵심 논거인 7행 4~8자의 ‘정묘세간석’ 판독안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대체로 7행 4~8자를 ‘호태성왕왈(好太聖王曰)’로 판독해 광개토왕이 건립했다고 파악하는 한편, 5행의 ‘국강상태왕’은 고국원왕으로 보았다(윤용구, 2013; 여호규, 2013; 이성제, 2013). 또 수묘제 규정이 능비보다 상세하지 않은 점에 주목해 집안비가 먼저 건립되었다고 보는 한편(공석구, 2013a; 정호섭, 2013), 능비에 언급된 수묘제의 문제점 중 차착(差錯)과 매매(賣買) 현상에 대한 대책만 있고, 쇠잔(衰殘: 羸劣甚衰)현상에 대한 대책이 없다는 사실도 지적되었다(홍승우, 2013; 김창석, 2015).
이처럼 국내 학계는 광개토왕대건립설이 우세하다. 다만 그 성격에 대해서는 특정 왕릉의 수묘비로 보기도 하지만(여호규, 2013; 공석구, 2013a), 수묘제에 관한 법령이나 교령을 알리기 위한 비석이라는 견해가 다수 제기되었다(정호섭, 2013; 이성제, 2013; 조우연, 2013; 임기환, 2014b; 기경량, 2014).
한편 장수왕대건립론자는 7행 4~8자의 ‘정묘세간석’ 판독안을 받아들이는 한편(선주선, 2013; 정현숙, 2013; 권인한, 2016), 집안비의 문장이 능비보다 더 정형화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서영수, 2013b; 정현숙 외, 2013). 또 7~8행의 ‘기수복각어【선왕묘상】입비(其脩復各於 【先王墓上】立碑)’ 구절을 광개토왕이 건립한 수묘비를 장수왕이 수복했다는 의미로 해석하고(김현숙, 2013b), 수묘인 매매금지법은 장수왕이 시행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이천우, 2016).
이처럼 집안비의 건립시기는 광개토왕대설과 장수왕대설로 나뉘는데, 중국 학계는 장수왕대설이 우세한 반면, 한국 학계는 광개토왕대설이 우세하다. 다만 광개토왕대설의 경우, 중국 학계는 모두 특정 왕릉의 수묘비로 보는 반면, 한국 학계는 수묘비로 보지 않는 견해도 다수 제기되었다. 장수왕대설은 한중 모두 수묘비로 보지 않는다.
광개토왕대설과 장수왕대설의 핵심 쟁점은 능비와의 관계 설정이다. 그런데 두 비문의 용어나 문장을 비교하면, 집안비에는 ‘연호두(烟戶頭)’처럼 능비보다 앞선 것으로 보이는 표현이 다수 확인된다(공석구, 2013a). 또 능비 찬자가 집안비의 문장을 운문식으로 다듬은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여호규, 2013; 2015). 더욱이 7행 4~8자는 ‘정묘세간석’보다 ‘호태성왕왈’로 판독될 가능성이 더 높다. 특히 중국 학자들은 5행의 ‘국강상태왕’을 대부분 광개토왕으로 보지만, 이는 고국원왕의 시호가 ‘국강상성태왕(國岡上聖太王: 國岡上王)’임을 간과한 결과이다. 5행의 ‘국강상태왕’은 고국원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비석의 성격에 대해서는 수묘비설과 비수묘비설로 대별된다. 수묘비설은 “각 【선왕의 묘】에 비석을 세우고 그 연호두 20명을 새겼다(各於【先王墓上】立碑, 銘其烟户頭廿人名.)”는 구절이, 광개토왕이 “역대 선왕을 위해 능묘에 비석을 세우고 연호를 새겼다”는 능비의 구절에 해당한다며 수묘비의 하나로 파악한다. 이에 대해 비수묘비설은 특정 왕릉과 관련된 표현이 없고, 수묘제와 관련한 일반 법령을 기술했으며, 비석의 발견 위치가 특정 초대형 적석묘와 멀리 떨어진 마선구고분군의 중심이라는 점을 논거로 제시하고 있다.
수묘비설과 비수묘비설은 상반된 논거를 제시하고 있는데, 양자 모두 논거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 비수묘비설의 경우 광개토왕이 역대 왕릉에 여러 수묘비를 동시에 건립했다면, 앞면에 동일한 내용, 뒷면에 특정 왕릉과 관련한 사항을 새겼을 가능성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수묘비설의 경우, 비석 발견 위치가 왕릉급 초대형 적석묘와 멀다는 지적에 대해 적절한 답변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비석이 넘어진 상태에서 발견된 만큼 원위치를 다각도로 검토해야 하며, 능역(陵域)의 범위도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4) 건국설화의 정립과 수묘제의 정비 양상
능비는 집안비와 중복되는 기사가 많은데, 특히 서문의 건국설화와 본문의 수묘인연호 관련 기사에는 문장이 같은 구절이 상당수 있다. 이에 능비와 집안비의 비교를 통해 건국설화와 수묘제를 고찰하는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다.
고구려 건국설화는 여러 문헌과 금석문에 전한다. 5세기에 작성된 능비와 모두루묘지에는 시조 추모왕(주몽)의 아버지가 천제(天帝)나 햇빛으로 상정된 반면,주 025 이보다 늦게 편찬된 『구삼국사』나 『삼국사기』에는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解慕漱)로 인격화되었다. 이에 일찍부터 양자의 관계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는데, 능비나 모두루묘지의 건국설화가 천제와 시조를 직접 연결시킨 더 시원적인 것이고, 시조의 아버지를 인격화하여 해모수로 설정한 『구삼국사』나 『삼국사기』의 건국설화는 더 늦게 성립된 것으로 이해한다(박시형, 1966; 서영대, 1991; 노태돈, 1999).
그런데 집안비는 건국설화를 “필연적으로 천도(天道)를 내려주시니, 스스로 원왕(元王)을 계승하여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개창하셨다”라고 서술했다. ‘천도를 내려주시니’는 종전에 보이지 않던 표현이다. 천도가 천리(天理)를 뜻한다는 점에 주목해 ‘하늘이나 자연의 운동규율’로 파악하기도 한다(耿鐵華, 2013a; 王春燕·呂文秀, 2013). 또 전한 동중서(董仲舒)의 천도론에 의거한 표현으로 “만물의 조물주(元=天)가 시조에게 인간 세상을 운영하는 근거인 천도를 수여했다”는 뜻이며, 다른 고구려 건국설화의 “천제께서 보록을 주셨다(天帝授籙)”와 같은 표현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여호규, 2013; 조우연, 2013).
‘원왕’도 종전에 보이지 않던 용어이다. 원왕을 시조 추모왕(張福有, 2013c; 王春燕·呂文秀, 2013)이나 고국양왕(梁志龍·靳軍, 2013)으로 보기도 하는데, 문장구조상 원왕과 시조 추모왕을 동일시하기 어렵고, 건국설화에 후대 왕이 등장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에 부여계 원조인 동명(東明: 장병진, 2016), 해모수나 유화부인(조우연, 2013; 정호섭, 2014), 고구려 왕실의 조상신(권인한, 2016)으로 상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원신(元神)이 천제를 뜻한다는 점에서 원왕도 ‘천(天)’과 관련한 표현으로 동중서의 ‘元(만물의 본원)’ 개념을 모티브로 창출한 ‘천제’에 상응한 용어라고 파악된다(여호규, 2013).
이처럼 집안비는 천도나 원왕 등 유교식 용어를 거의 그대로 사용해 건국설화를 기술했다. 그런데 한대 유학사상의 군주관은 천명론과 왕도정치론에 입각하고 있지만, 고구려의 군주관은 시조가 천제의 혈연적 후손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성립하였다. 이에 따라 인의(仁義)를 핵심으로 하는 유교식 용어로는 시조의 신성성을 표현하기 힘들었다. 이에 능비에서는 유교식 용어를 ‘성(聖)’이나 ‘도(道)’와 같이 다중적 의미를 갖는 용어로 변용하여 고구려 시조와 후대 왕들의 신성성을 묘사하고, 고구려 천하의 운영원리를 표현했다. 집안비의 건국설화가 유교사상 수용의 초기적 모습을 보여준다면, 능비의 건국설화는 유교사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이를 변용한 양상을 반영한다(여호규, 2015).
시조 이후의 왕위계승을 능비에서는 “고명을 받은 세자 유류왕(儒留王)은 도로써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大朱留王)은 왕업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18세에 왕위에 올랐다”라고 서술했다. 이 구절은 시조를 정점으로 하는 일계적 왕통의식을 보여주는데, 집안비의 “후사로 이어져 서로 계승했다(繼胤相承)”도 같은 뜻이다. 이로 보아 능비 찬자가 시조 추모왕의 승천, 왕위계승, 광개토왕의 행장을 한 단락으로 묶어 기술한 것은 추모왕의 신성성이 광개토왕에까지 면면이 계승되었다는 일계적 왕통의 유구성을 강조하기 위한 필법으로 이해된다.
능비의 유류왕은 『삼국사기』의 제2대 유리명왕, 대주류왕은 제3대 대무신왕으로 비정되는데, 『삼국사기』의 고구려 초기 왕계는 능비를 건립하던 5세기 초에 이미 정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만 『삼국사기』의 계보상 광개토왕은 추모왕(동명성왕)의 13대손으로 혈연관계만 놓고 본다면 ‘17세손’이라는 표현은 성립하기 힘들다. 이에 ‘17세손’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는데(武田幸男, 1989a; 노태돈, 1999), 대체로 대무신왕을 기준으로 헤아린 왕대 수로 이해된다(橫井忠直, 1889; 今西龍, 1915; 박시형, 1966).주 026
능비 찬자는 혈연관계가 아니라, 선왕과 차기왕의 관계를 사자(嗣子)로 파악하던 전통적인 왕위계승 인식을 바탕으로 일계적 왕통의식을 확립한 것이다(여호규, 2014a). 그런 다음 능비 찬자는 광개토왕의 훈적을 총괄해 “[왕의] 은택이 하늘(皇天)에까지 통하였고주 027 위무는 사해(四海)에 떨쳤다”라고 서술했는데, 고구려 중심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잘 보여준다(양기석, 1983; 노태돈, 1988). 이처럼 능비 찬자는 집안비 단계의 유교식 용어를 변용해 천제의 혈연을 이은 시조의 신성성이 광개토왕에까지 면면이 이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 중심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상정했다.
한편 집안비와 능비의 수묘제 기사도 겹치는 부분이 많다. 다만 집안비는 수묘제 시행 초기의 양상도 기술했지만(본문 1), 능비는 광개토왕 대의 양상만 기술했다. 이에 집안비를 통해 수묘제 초창기의 모습을 고찰한 연구가 다수 이루어졌다. 먼저 ‘사시제사(四時祭祀)’라는 구절을 통해 수묘제 시행 초기에 능묘제사가 중시되었을 것으로 파악했다(공석구, 2013a; 강진원, 2014). 그에 이어 “세월이 오래되어 … 연호가 … 열악하고 매우 쇠약해졌다(劣甚衰)”라고 서술했는데, 일찍부터 수묘제가 문란해졌음을 전한다(여호규, 2013).
집안비의 5행에는 국강상태왕 등 3명의 왕이 나온다. 중국 학자들은 대부분 국강상태왕을 광개토왕의 시호로 보지만, 이 견해는 집안비가 장수왕 대에 건립되었다고 볼 경우에만 성립한다. 이에 국내 학계에서는 국강상태왕을 고국원왕으로 비정한 다음, 그 앞뒤의 왕을 미천왕과 소수림왕(또는 고국양왕)에 비정한다(여호규, 2013; 이성제, 2013; 조우연, 2013). 그러면서 5행 하단과 6행의 ‘흥동서(興東西)’와 ‘세실(世室: 종묘)’을 연결해 “수묘제 문란으로 능묘의 제사시설이 망실되자 종묘제를 새롭게 정비한” 것으로 파악했다(여호규, 2013; 이성제, 2013). 이에 따라 수묘제 시행 초기의 능묘제사가 종묘제사로 전환했다고 보았다(공석구, 2013a; 강진원, 2014).
집안비의 본문 2는 광개토왕이 수묘제를 수복하기 위해 율(律)·영(令)의 제정과 발포, 수묘비 건립, 수묘인연호 매매금지령 제정을 시행한 사실을 기술했는데, 상응한 내용이 능비에서 모두 확인된다. 다만 집안비는 광개토왕의 교령을 직접 전하는 방식으로 기술한 반면, 능비는 이를 축약해 4·6자의 운문체로 작성했다. 능비 찬자가 집안비에 전하는 광개토왕의 교령을 바탕으로 수묘 기사를 작성한 것이다. 이는 집안비가 광개토왕이 수묘제를 수복하며 건립한 수묘비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여호규, 2013).
종전에는 광개토왕이 역대 능묘에 건립했다는 수묘비가 발견되지 않아 실제로는 시행하지 않았다고 보기도 했다(박시형, 1966; 김현숙, 1989; 이도학, 2002; 기경량, 2010). 또 수묘인 매매금지령을 광개토왕이 아니라 장수왕이 제정했다고 파악하기도 했다(노중국, 1979; 김현숙, 1989). 그렇지만 집안비의 발견으로 수묘비의 건립과 수묘인 매매금지령 모두 광개토왕에 의해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집안비 7행의 “무자년에 율(律)을 제정한 이래, 조정에 교하여 영(令)을 발포하여 다시 수복하였다”는 구절은 고구려 율·령의 성격과 관련해 많은 주목을 받았다. 종전의 통설처럼 ‘율’을 형법전, ‘영’을 행정법전으로 보는 가운데(김수태, 2013), 진·한대의 단행법(單行法)체계에 주목하여 왕명에 기초한 단행법령을 집성한 것(홍승우, 2013; 2016; 전덕재, 2015)이나 교령법(敎令法)(김창석, 2014)으로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집안비 7~8행의 “각 【선왕의 묘상】에 비석을 건립하고 연호두 20명의 명단을 새겨 후세에 전한다”는 구절의 ‘연호두(烟戶頭)’는 처음 확인된 용어인데, 호주설과 관리자·대표자설로 나뉜다. 호주설의 경우, 국내 학자들은 ‘연호두 20명’을 각 왕릉에 배치된 수묘인연호 전체의 호주 명단(여호규, 2013; 공석구, 2013a; 임기환, 2014b)으로 보는 반면, 중국 학자들은 능비의 국연(國烟)과 간연(看烟) 중 국연의 호주(耿鐵華·董峰, 2013; 林澐, 2013)라고 보았다. 한국 학자들이 각 능묘에 배치된 수묘인연호를 20가로 파악한 반면, 중국 학자들은 국연 20가에 간연 200가, 총 220가로 상정한 것이다. 다만 양자 모두 집안비는 광개토왕이 건립한 수묘비로 연호두 명단을 비석 뒷면에 새겼다고 보았다.
관리자·대표자설은 ‘호두’가 호주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은 수(隋)대이고, 고구려에서는 ‘두(頭)’자가 ‘영두(領頭)’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음을 강조한다. ‘연호두 20명’은 각 왕릉 수묘인연호의 관리자나 대표자로 도성 지역의 왕릉 전체를 아울렀다는 것이다. 이에 집안비의 성격도 여러 왕릉을 아우른 율령비(교령비)로 이해한다(김현숙, 2013b; 이성제, 2013; 정호섭, 2013; 孫仁杰, 2013c; 荊目美行, 2015; 張福有, 2013c; 徐建新, 2013).
이처럼 ‘연호두’에 대한 견해는 호주설과 대표자·관리자설로 나뉘는데, 능비에 기술된 수묘인연호의 성격에 대한 이해와 연관되어 있다. 능비의 수묘인연호 기사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예전부터 수묘역을 수행한 구민(舊民)의 몰락을 염려해 자신이 몸소 약취(略取)한 신래한예(新來韓穢)만 징발하라고 유언했다. 이에 장수왕이 신래한예 220가를 뽑았다가, 법칙을 모를까 염려해 구민 110가를 더해 총 국연 30가, 간연 300가를 징발했다. 능비 건립 당시 수묘인연호가 국연과 간연으로 구분된 것인데, 이에 국연과 간연의 성격 및 330가의 편성방식을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일반적으로 국연과 간연은 본래 신분적으로 차이가 있고, 국연이 감독자나 관리자라면 간연은 실제 수묘역을 담당했다고 이해한다(那珂通世, 1893; 武田幸男, 1989a; 조인성, 1988; 김현숙, 1989). 이에 대해 국연만 수묘역을 수행했고, 간연은 국연의 보조자(박시형, 1966; 조법종, 1995), 예비 수묘호(김락기, 2006), 원거주지에 머무른 자(이도학, 2020)로 이해하기도 한다. 또 국연은 광개토왕릉, 간연은 다른 왕릉을 수묘했다고 보기도 한다(기경량, 2010; 2014). 수묘역의 수행방식도 천사설(遷徙說)이 우세한 가운데, 번상입역설(番上立役說)도 제기되었다(박시형, 1988; 임기환, 1994; 손영종, 1986b).주 028
330가의 편성방식에 대해서는 국연 3가(구민 1가, 신래한예 2가)와 간연 30가(구민 10가, 신래한예 20가)를 합해 33가로 1개조씩 총 10개조를 편성했다는 견해(박시형, 1966; 조인성, 1988; 武田幸男, 1989a)가 우세한 가운데, 구민 10가와 신래한예 20가를 합해 30가를 1개씩 총 11개조를 편성했다는 설(기경량, 2010; 2014)도 제기되었다. 또 330가가 수묘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광개토왕릉만 수묘했다는 견해(손영종, 1986b; 임기환, 1994; 조법종, 1995; 김락기, 2006; 공석구, 2013b)와 집안 지역의 왕릉 전체를 수묘했다는 견해(조인성, 1988; 김현숙, 1989; 이성시, 2008)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수묘연호 편성조직을 10개조로 상정해 산상왕대국내천도설을 뒷받침하거나(이성시, 2008), 11개조로 상정해 신대왕대국내천도설을 주장하기도 했다(기경량, 2010).주 029
이처럼 능비의 국연·간연의 성격, 330가의 편성방식과 수묘 대상에 대해 논란이 분분한데, 집안비에 따르면 각 선왕의 능묘에 비석을 건립하고 연호두 20명의 명단을 새겼다고 한다. 연호두를 일반 수묘인연호의 호주로 보면 각 능묘에 배치된 수묘인연호의 수는 20가가 된다. 반면 연호두를 능비의 국연에 해당하는 관리자·대표자로 본다면 각 능묘에 배치된 수묘인연호의 수는 간연 200가를 포함해 220가가 된다.
그런데 고구려 신대왕이 국상 명림답부의 무덤에 수묘호 20가를 배치한 사례나 신라 문무왕이 역대 선왕의 능원에 각각 20가를 안치한 사례를 참조하면,주 030 수묘인연호의 기본단위는 20가였을 가능성이 높다. 집안비의 연호두 20명은 각 능묘에 배치된 수묘인연호 20가의 호주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능비의 경우, 신래한예에서 차출한 간연 20가가 실제 수묘역을 담당하는 자이고, 국연 2가는 이를 감독하거나 관리하는 자, 그리고 구민 11가(국연 1가, 간연 10가)는 신래한예를 도와주는 보조자였다고 파악된다. 능비의 330가는 10개조로 나뉘어져 집안 지역의 왕릉 전체를 수묘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집안비와 능비 사이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집안비는 연호두 20명이 이끄는 20가가 각 능묘를 수묘하던 기본단위인 반면, 능비는 신래한예로 이루어진 국연 2가와 간연 20가 총 22가가 기본단위이고 구민 11가(국연 1가와 간연 10가)는 이를 도와주는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집안비의 연호두가 능비의 국연과 간연으로 분화했다고 상정할 수 있는데(공석구, 2013a; 임기환, 2014b), 장수왕 대 초기 수묘제의 재정비와 관련해 매우 주목되는 양상이다.
한편 집안비의 8~10행에는 수묘인연호 매매금지령을 명시했는데, 능비의 기술 내용과 거의 같다. 매매 대상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수묘인 자신의 인신(人身)이나 노동력(김현숙, 1989; 기경량, 2010; 정호섭, 2012)으로 보지만, 수묘호에 지급한 토지(조법종, 1995), 수묘호가 소유한 동산(動産: 이인철, 1997)으로 보기도 한다. 매매 대상을 사는 주체는 두 비석에 모두 “부족지자(富足之者)”라고 명시했는데, 대체로 도성의 귀족(武田幸男, 1979; 김현숙, 1989;李成市, 2008; 공석구, 2011)으로 보지만, 수묘인 가운데 부자(김석형, 1974), 지방의 세력가나 호민(임기환, 1994)으로 보기도 한다. 또 주로 수묘인 사이에 수묘역을 거래하는 행위를 금지한 것이며, 부족지자로 불린 귀족이 매매하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보기도 한다(기경량, 2014).
두 비석 모두 금지령 위반자에 대한 처벌규정이 있지만, 집안비는 약간 모호하게 서술했다. 양자를 비교하면 집안비의 “후세토록…계사하게 한다(後世継嗣▣▣)”는 구절이 능비의 “산 자는 왕명으로 수묘하게 하라(買人制令守墓之)”에 상응하고, 집안비의 “그 비문을 보아 죄과를 부여한다(看其碑文, 与其罪過.)”는 구절은 능비의 “판 자는 형벌에 처한다(賣者刑之)”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죄과를 부여할 때 본다는 ‘그 비문’의 실체가 논란인데, 장수왕대건립론자는 능비 말미의 처벌규정이라고 본 반면, 광개토왕대건립론자는 각 왕릉에 건립한 수묘비의 뒷면에 새긴 수묘연호두 명단으로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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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0)
담국환(談國桓)의 「수찰(手札)」에 따르면 1887년 봉천성(奉天省) 독학사(督學使) 양이(楊頤)가 6벌, 나진옥(羅振玉)의 「용려일찰(俑廬日札)」에 따르면 1889년 북경(北京)의 탁공(拓工) 이운종(李雲從)이 50벌을 제작했다(박시형, 1966). 현전하는 원석탁본 가운데 대만의 부사년을본(傅斯年乙本), 중국의 복대(北大)E본, 왕씨(王氏)소장본, 중국국가도서관본 등 4종은 1887년, 국내의 청명본(현 국립중앙박물관본, 규장각소장본 포함)과 혜정본, 대만의 부사년갑본(傅斯年甲本), 중국의 북대(北大) A·B·C·D본, 일본의 미즈타니 데지로본(水谷悌二郞本)과 가네코 오테이본(金子鷗亭本), 소장처 미상의 서통본(書通本) 등 10종은 1889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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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5)
이 무렵 니시지마 사다오(西嶋定生, 1974·1985)가 신묘년조 후반부의 ‘래도해(來渡海)’를 ‘래(來)’와 ‘도해(渡海)’ 두 동사로 분리한 정인보의 해석에 대해 이 구절의 ‘래(來)’는 ‘이래(以來)’를 뜻한다며 ‘도해(渡海)’의 주체를 왜로 보는 견해를 제기했다. 또 최근 최연식(2020)은 ‘래도(來渡)’의 목적어로는 목적지만 올 수 있다며 ‘해(海)’ 판독안을 부정했다. 그렇지만 ‘래도(來渡)’가 복합동사로 사용되면서 ‘해(海)’나 ‘강(江, 河)’을 목적어로 취하는 사례가 다수 확인되며(王仲殊, 1990; 기경량, 2022), ‘해(海)’ 판독안을 재확인한 연구도 제출되었다(기경량, 2020; 여호규, 2023a). ‘래도해(來渡海)’는 “바다를 건너오다”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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