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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4. 충주고구려비의 구성 내용과 건립시기

4. 충주고구려비의 구성 내용과 건립시기

1) 충주고구려비의 단락 구성과 내용
충주고구려비(옛 중원고구려비, 이하 ‘충주비’)는 1979년에 충북 충주시(당시 지명은 중원군 가금면 용전리 입석부락)에서 발견되었다. 비석은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었는데, 글자가 없는 백비(白碑)로 여겼었다.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이 예성동호회의 연락을 받고 판독작업을 진행하여 고려(高麗)라는 국명과 대사자(大使者), 발위사자(拔位使者), 대형(大兄) 등 고구려 관등명을 판독해 고구려비임을 밝혀냈다(정영호, 1979).
충주비는 남한 유일의 고구려비로 큰 관심을 끌었다. 내용상으로도 ‘동이(東夷) 매금(寐錦)’이나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 등은 고구려의 천하관이나 신라와의 외교관계와 관련해 많은 주목을 받았고(노태돈, 1999), 상기 관등명이나 ‘고모루성수사(古牟婁城守事)’는 관등제나 지방제도와 관련해 많은 주목을 받았다(임기환, 2004; 김현숙, 2005). 충주비가 고구려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를 제공한 것이다(장창은, 2006).
충주비는 높이 2m 정도의 사각기둥 모양으로 광개토왕릉비의 축소 모형 같다. 다만 오랜 풍화로 인해 글자가 많이 마멸되었다. 전면(前面)과 좌측면에서는 글자를 다수 판독했지만, 우측면과 후면에는 판독 가능한 글자가 거의 없다. 이에 비면의 수를 3면비로 보기도 했는데(변태섭, 1979; 신형식, 1979), 대체로 후면에도 각자의 흔적이 있다고 보아 4면비로 본다(정영호, 1979; 임창순, 1979; 이기백, 1979).
시작면에 대해서도 논란이 분분했다. 전면 상단에 제액(題額)이 있다고 보아 전면을 시작면으로 보기도 했지만(이병도, 1979; 이호영, 1979),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이에 전면의 서두가 연도 없이 ‘오월(五月)’로 시작하므로 시작면으로 볼 수 없고, 좌측면 마지막 행 하단에 공격(空隔)이 있으므로 마지막 면일 가능성이 있다면서, 우측면(이기백, 1979)이나 후면(정영호, 1979)을 시작면으로 상정하기도 했다.
충주비는 비면의 수와 시작면도 확정하지 못할 정도로 마멸이 심한 상태이다. 이로 인해 발견된 지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무수한 논란을 안고 있다. 더욱이 비석이 발견된 1979년을 비롯해 2000년(고구려연구회 편, 2000), 2019년 동북아역사재단·한국고대사학회 공동판독회(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2020; 동북아역사재단, 2021) 등 세 차례 판독회가 열렸는데, 그때마다 판독 내용이 조금씩 달라졌다.
가령 전면 1행 1~10자는 비석 건립시기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1979년에는 ‘고려대왕상왕공(高麗大王相王公)’이나 ‘고려대왕조왕령(高麗大王祖王令)’으로 판독했다. 2000년 판독회 이후 ‘고려대왕조왕령’ 판독안이 널리 수용되었지만, 2019년 판독회에서 다시 ‘고려대왕조왕공(高麗大王祖王公)’ 판독안이 유력해졌다. 또 ‘신유년(辛酉年)’으로 판독되었던 좌측면 3행 7~9자도 2019년에 ‘공이백육십(功二百六十)’으로 판독되었다.
이처럼 충주비는 판독하기 힘든 글자가 많을 뿐 아니라, 판독이 여러 차례 달라졌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충주비의 판독 및 그에 따른 여러 견해를 모두 소개하기는 어렵다.주 031
각주 031)
2005년까지의 여러 견해는 장창은, 2005·2006에 잘 정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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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2019년에 진행한 공동판독회와 필자의 판독을 바탕으로 비문의 단락 구성과 내용을 살펴본 다음, 핵심 쟁점인 건립시기와 그 성격을 검토하고자 한다.주 032
각주 032)
충주비의 비문 판독과 내용은 여호규, 2020에 의거하였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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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비는 크게 모년(某年) 사건을 기술한 A단락, 신유년 대고추가 공(共)의 군사활동을 기술한 B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A단락은 다시 5월에 고구려왕과 신라왕이 ‘궤영(跪營)’에서 거행한 복속의례를 기술한 A1, 12월에 신라 우벌성(于伐城)에서 시행한 모인(募人)활동을 기술한 A2로 나뉜다. 이 중 A1 문단은 다시 7개 구절로 구분된다.
서두에는 고려대왕의 조왕(祖王)과 공(公)이 신라 매금(寐錦)과 만나 수천(守天)하기를 원해 동쪽으로 온 상황을 기술했는데, A1 문단의 도입부이다. 그다음 신라왕인 매금 기(忌),주 033
각주 033)
‘기(忌)’를 ‘꺼리다’로 해석(이용현, 2020b)하기도 하는데, 내용 이해가 완전히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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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태자 공(共),주 034
각주 034)
최근 ‘공(共)’을 신라의 태자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이재환, 2021; 하시모토 시게루,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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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前部) 대사자 다우환노가 궤영에 이른 사실을 서술했다. 이들의 행위를 고구려왕보다 먼저 궤영에 도착해 준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임기환, 2000). 그런데 궤영은 고구려왕이 신라 매금으로부터 복속의례를 받는 장소이다(시노하라 히로카타, 2000). 당(唐)의 사례를 참조하면(石見淸有, 1998), 의례 주관자인 고구려왕이 먼저 궤영에 자리잡은 다음, 신라 매금 등이 입장한 것으로 보인다(이성제, 2020).
그에 이어 고구려왕이 신라왕 등에게 각종 위세품을 하사하며 복속의례를 거행한 장면을 네 구절로 묘사했다. 신라왕인 매금 기에게 태곽추(太霍鄒)라는 위세품을 하사한 장면, 기에게 식사와 의복을 하사하자 다른 노객인(奴客人)처럼 고구려왕에게 순종한 사실, 기를 수행한 신라의 신료에게 의복을 하사한 장면, 신라 매금에게 귀국한 다음주 035
각주 035)
“교동이매금답환래절(敎東夷寐錦遝還來節)”의 ‘답(遝)’자를 대체로 ‘부르다(召)’는 뜻으로 보아 “태왕이 교를 내려 동이 매금을 불러 되돌아오게 했다”로 풀이하는데(시노하라 히로카타, 2000; 임기환, 2000; 장창은, 2005), 이 경우 복속의례 도중 신라왕이 귀국했다가 다시 되돌아온 상황을 상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복속의례 도중 신라왕이 귀국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으므로 이렇게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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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영토 내의 제중인(諸衆人)에게 위세품을 하사하도록 한 장면 등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구려의 대위와 제위주 036
각주 036)
‘대위제위상하(大位諸位上下)’를 신라의 왕과 신료로 파악하기도 하며(변태섭, 1979; 이기백, 1979), 고구려 중앙의 관인이 아니라 한강 유역의 지방세력으로 보기도 한다(임기환, 2000; 심정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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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예복을 갖추어 입고 궤영에서 교를 받들도록 하여 복속의례를 마무리했음을 서술했다.
A2 문단은 12월 우벌성에서 일어난 사건을 서술했다. 5월 사건과 같은 해에 일어났고, 동일 인물이 참석했다는 점에서 복속의례에 따른 서약을 집행한 상황으로 파악된다(시노하라 히로카타, 2000; 임기환, 2000). A2 문단은 5개 구절로 구분된다. 첫머리에는 “12월 23일 갑인일에 동이 매금의 상하(上下: 관인)가 우벌성에 이른” 사실을 기술했다. 후술하듯이 ‘12월 23일 갑인일’은 비석 건립시기와 관련해 많은 주목을 받았다. 사건 발생 장소는 우벌성인데, 충주 일대로 보기도 했지만(변태섭, 1979; 김정배, 1979), ‘이벌지현(伊伐支縣)’으로 불린 영주 순흥 일대로 비정된다(손영종, 1985).
그에 이어 5월 복속의례에 참석했던 고구려의 전부 대사자 다우환노와 주부 귀덕이 왕명을 받아 300명을 모집하기 위해 왔고,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인 하부 발위사자 보노 등이 모인활동을 했음을 기술했다. 다우환노와 귀덕이 고구려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라면, 보노 등은 현지 실무자이다. 특히 보노는 신라토내당주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는데, 신라 영토 내에 고구려 지휘관이 주둔했다는 사실을 전한다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이기백, 1979; 정운용, 1989; 김현숙, 2002).
다음 구절에 ‘신라토내중인(新羅土內衆人)’이 나온다. 신라토내중인을 고구려가 모인(募人)활동을 한 대상으로 보기도 했지만(변태섭, 1979; 김창호, 1987), 문장구성상 목적어가 아니라 주어라는 점에서 그렇게 보기 어렵다. 신라 중앙에서 파견한 ‘매금의 상하’에 대응되는 인물로 재지세력이나 지방관으로 파악된다(시노하라 히로카타, 2000; 임기환, 2000; 이성제, 2020). 12월 사건에 참여한 신라의 인물도 고구려처럼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와 현지 실무자로 이루어진 것이다. 다만 글자의 마멸로 활동 양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촌사(村舍)’는 촌에 설치된 군사시설이나 관사(官舍)로 추정된다.
그다음 모인활동의 내용을 기술했는데, 2019년 판독회에서 다수의 숫자를 판독했다. 특히 종전에 ‘신유년’으로 판독했던 3행 7~9자를 ‘공이백육십(功二百六十)’으로 판독했다(고광의, 2020). 이를 바탕으로 필자도 ‘자공(刾功)’, ‘사공(射功)’ 등을 판독했다. ‘공(功)’자가 공역에 동원한 역부(役夫)를 지칭하므로(이기백, 1974; 이용현, 2020a; 2020b), 이 부분에는 모인을 통해 동원한 역부의 수를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자공과 사공은 각각 도검과 활 제작과 관련한 역부나 장인으로 추정된다(여호규, 2020).주 037
각주 037)
‘공(功)’을 공적 특히 전공(戰功)으로 보는 견해가 최근 제기되었다(하시모토 시게루,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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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신라 영토 내에서 도검과 활 등 무기 제작과 관련한 역부나 장인을 모집한 것이다(나유정, 2024).주 038
각주 038)
일찍이 木村誠, 1997에서도 모인활동의 성격을 역역(力役) 징발로 파악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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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A2 문단은 5월 복속의례의 후속조치로 12월에 신라의 우벌성 일대에서 이루어진 모인활동을 기술한 것이다. 신라와 고구려는 복속의례에 참여했던 관인을 현지에 파견하여 모인활동을 감독했고, 신라 현지에 주둔하던 고구려 군사지휘관인 신라토내당주와 현지에 있던 신라토내중인이 실무를 집행했다.
B 문단은 좌측면 5행 13자부터 말미까지로 ‘신유년’의 사건을 기술했다. 5행 19~23자에 ‘동이매금토(東夷寐錦土)’가 보이며, 6행 16자~7행 2자는 “대고추가(大古鄒加) 공(共)의 군대가 우벌성에 이르렀다”로 해석된다. 대체로 신유년에 대고추가 공이 신라의 우벌성 일대에서 군사활동을 전개한 사실을 기술한 것으로 추정된다.
 
2) 충주고구려비의 건립시기와 성격
충주비의 건립시기에 대한 견해는 광개토왕대설, 421년전후설, 449~450년설, 장수왕대후반설, 문자명왕대설, 평원왕대설로 나뉘는데(서영대, 1992c; 장창은, 2006), 핵심 쟁점은 전면 상단의 제액 유무, 1행 4~10자(高麗大王祖王公)의 판독과 해석, 7행 15~22자(十二月廿三【日】甲寅)의 판독, 좌측면 3행 7~9자의 간지(干支) 여부 등이다.
전면 상단의 제액설은 비석 발견 직후부터 제기되었다.주 039
각주 039)
‘건흥사(建興四)’(이병도, 1979; 손영종, 1985), ‘□희칠년세신□□(□熙七年歲辛□□)’(이호영, 1979) 판독안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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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판독회에서도 ‘영락칠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설이 제기되었고(고광의, 2020; 이용현, 2020b; 이재환, 2021), 최근 ‘□가칠년기미(□嘉七年己未)’설도 제시되었다(하시모토 시게루, 2022). 그렇지만 좌측면이 마지막이고, 우측면에서도 각자 흔적이 있으므로 전면을 시작면으로 보기 힘들다. 제액은 일반적으로 제1면에 새긴다는 점에서 제액설은 성립하기가 쉽지 않다. 한편 좌측면 3행 7~9자의 ‘신유년(辛酉年)’ 판독안은 481년 건립설의 핵심 논거였는데(변태섭, 1979), 2019년 판독회를 통해 ‘공이백육십(功二百六十)’으로 판독되었다.
전면 1행 4~10자의 판독과 해석도 핵심 쟁점이다. 발견 직후 ‘고려대왕상왕공(高麗大王相王公)’으로 판독한 경우, ‘고려대왕과 상왕공’이나 ‘고려태왕의 상왕공’으로 해석해 고려대왕(태왕), 즉 장수왕이 비석을 건립했다고 보았다(변태섭, 1979; 김창호, 1987). 반면 ‘고려대왕조왕령(高麗大王祖王令)’으로 판독한 경우, 문장 주어는 고려대왕의 조왕인 장수왕이지만, 비석 건립 주체는 고려대왕, 즉 문자명왕이라고 보았다(이병도, 1979; 손영종, 1985).
2000년 판독회 이후 ‘고려대왕조왕령’ 판독안이 널리 수용되는 가운데 문장 해석에 따라 비석 건립시기가 다양하게 설정되었다. ‘고려대왕이 조왕의 영(令)으로’라고 해석해 ‘고려대왕’을 비석 건립 주체로 상정한 다음 장수왕(이도학, 2000; 장창은, 2006)이나 문자명왕(박성현, 2010; 서지영, 2012)으로 비정했다. ‘고려대왕(장수왕)과 조왕인 영’(임기환, 2000), ‘고려대왕(장수왕)인 조왕’(박진석, 2000)으로 해석하여 장수왕을 비석 건립주체로 보기도 했다. 또 비문 해석을 유보한 채 ‘고려대왕’은 사건 발생 당시의 왕으로 비석 건립시기에도 생존했다며 장수왕으로 상정했다(정운용, 1989). 이에 대해 이 구절을 ‘고려대왕의 조왕’으로 해석한 다음, 전면의 사건은 조왕인 장수왕 대에 발생했지만, 비석의 건립 주체는 고려대왕인 문장명왕으로 파악하기도 했다(김현숙, 2002; 최장열, 2004).
이처럼 1행 4~10자의 해석을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했던 것은 2000년 이후 ‘고려대왕조왕령’ 판독안이 널리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의 주어를 ‘고려대왕 조왕’으로 상정하면 이어지는 ‘영(令)’이 사역동사가 되어 “동이 매금으로 하여금…동쪽으로 오게 했다”라고 해석되는데, 동이 매금의 이동 방향인 ‘북쪽’과 부합하지 않는다. 이에 ‘영’을 사역동사가 아니라 율령이나 인명 등으로 파악함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런데 2019년 판독회를 통해 1행 4~10자는 ‘고려대왕조왕공(高麗大王祖王公)’임이 명확해졌다. 이 구절은 문법상 ‘고려대왕과 조왕과 공’, ‘고려대왕의 조왕공’, ‘고려대왕의 조왕과 공’ 등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다만 고구려왕이 주관한 신라왕과의 복속의례가 이어진다는 점에서 왕을 2명 상정하는 ‘고려대왕과 조왕과 공’이나 왕을 상정하지 않는 ‘고려대왕의 조왕공’ 등의 해석안은 성립하기 힘들다.
이 구절은 ‘고려대왕의 조왕과 공’으로 해석되며, ‘고려대왕의 조왕’이 복속의례를 주관했다고 보아야 한다. A1 문단의 사건은 고려대왕의 조왕(祖王) 시기에 일어난 것이다. 충주비가 대체로 5세기의 상황을 반영하므로 ‘고려대왕’은 문자명왕, ‘고려대왕의 조왕’은 그의 할아버지인 장수왕으로 파악된다(이병도, 1979; 손영종, 1985; 김현숙, 2002; 최장열, 2004; 여호규, 2020). 비석 건립시점과 전면의 사건 발생시점이 다른 것이다.
전면 7행의 ‘십이월입삼【일】갑인(十二月廿三주 040
각주 040)
기노시다 레이진(木下礼仁, 1981)은 ‘십이월입오일갑인(十二月廿五日甲寅)’으로 판독하여 403년으로 비정했고, 고광의(2020)는 ‘십이월입칠일경인(十二月廿七日庚寅)’으로 판독하여 397년으로 비정하기도 했다(2020). 다만 ‘삼(三)’을 ‘오(五)’나 ‘칠(七)’로 판독할 만한 종선(縱線)을 인정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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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甲寅)’은 모년 12월 사건의 발생시점이다. 5세기를 전후해 12월 23일이 갑인일인 연도는 449년(장수왕37), 480년, 506년(문자명왕15)이 있다(변태섭, 1979). 이 중 고구려왕이 신라왕과 복속의례를 거행할 만한 시점으로는 449년이 가장 타당하다. 실제 『삼국사기』 신라본기 눌지왕34년조에는 양국이 450년 직전에 수호(修好)한 사실이 나온다(김정배, 1979; 임창순, 1979; 정운용, 1989; 시노하라 히로카타, 2000; 임기환, 2000; 이성제, 2020).
문자명왕이 492년에 즉위했으므로 전면의 사건 발생시점과 비석 건립시점 사이에는 43년 이상의 시간차가 있다. 이와 관련해 ‘공(共)’이라는 인물을 전면에서는 ‘태자 공’, 좌측면에서는 ‘대고추가 공’으로 기술한 사실이 주목된다. 양자를 다른 인물로 보기도 하지만(임기환, 2000), 이름이 같고 고구려 왕족 가운데 고추가(古鄒加)를 칭한 사례가 다수 확인되므로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더 높다(김창호, 1987; 박진석, 2000). 이로 보아 공은 문자명왕의 아버지로 고추대가를 지낸 조다(助多)로 추정된다(김영하·한상준, 1983; 김현숙, 2002; 최장열, 2004). 공이 태자에 봉해졌다가 장수왕이 장기간 재위하면서 대고추가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이에 비문 작성 시에도 공이 젊었을 때는 태자, 나이가 들었을 때는 대고추가로 구별해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좌측면의 “대고추가 공의 군대가 우벌성에 이른” 사건은 전면의 사건 발생시점인 449년으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흐른 다음에 일어난 것이다. 또 우벌성이 영주 순흥 일대로 비정되므로 대고추가 공은 소백산맥 남쪽에서 군사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문헌사료상 449년 이후 소백산맥 남쪽 일대에 대한 고구려의 군사작전은 481년에 처음 확인된다.주 041
각주 041)
『삼국사기』 신라본기3 소지마립간 3년 3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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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고추가 공도 481년에 우벌성 일대에서 군사작전을 전개한 것인데, 실제 좌측면 5행 13~14자의 ‘신유(辛酉)’는 481년에 해당한다.
이상과 같이 충주비의 건립 주체는 고려대왕인 문자명왕이지만, 전면과 좌측면의 사건 발생시점은 문자명왕(고려대왕)의 할아버지(祖王)인 장수왕 대이다. 이 가운데 A 단락에는 449년 사건, B 단락에는 481년 사건을 각기 기술했다. 전면과 좌측면에는 비석 건립의 주체인 문자명왕 대의 상황이 전혀 기술되지 않은 것이다. 이에 필자는 후면을 제1면으로 추정하고 이곳에 문자명왕이 비석을 건립한 이유를 서술했을 것으로 보았는데(여호규, 2020), 비문 판독이 불가능하여 추론의 영역으로 남겨 놓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충주비가 문자명왕 대에 건립되었다면, 가장 유력한 건립시점은 문자명왕이 남쪽으로 순수한 495년(문자명왕4)으로 추정된다(남풍현, 2000; 최장열, 2004).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예속에서 벗어나려 했는데, 493년에는 백제와 혼인동맹을 맺었다. 이로 보아 495년 문자명왕의 남쪽 순행은 백제를 군사적으로 압박하면서 신라에 대해 종전처럼 고구려 우위의 외교관계를 관철하겠다는 목표 아래 추진되었다고 파악된다.
이에 문자명왕은 충주비를 건립해 과거 고구려왕과 신라 매금의 복속의례를 기술함으로써 고구려 우위의 외교관계를 복구하겠다는 목표를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아버지인 태자 공(대고추가 공, 조다)이 신라에 대한 외교나 군사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사실을 부각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도 강화하려 했다고 파악된다(여호규, 2020).

  • 각주 031)
    2005년까지의 여러 견해는 장창은, 2005·2006에 잘 정리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32)
    충주비의 비문 판독과 내용은 여호규, 2020에 의거하였음을 밝혀둔다. 바로가기
  • 각주 033)
    ‘기(忌)’를 ‘꺼리다’로 해석(이용현, 2020b)하기도 하는데, 내용 이해가 완전히 달라진다. 바로가기
  • 각주 034)
    최근 ‘공(共)’을 신라의 태자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이재환, 2021; 하시모토 시게루, 2022). 바로가기
  • 각주 035)
    “교동이매금답환래절(敎東夷寐錦遝還來節)”의 ‘답(遝)’자를 대체로 ‘부르다(召)’는 뜻으로 보아 “태왕이 교를 내려 동이 매금을 불러 되돌아오게 했다”로 풀이하는데(시노하라 히로카타, 2000; 임기환, 2000; 장창은, 2005), 이 경우 복속의례 도중 신라왕이 귀국했다가 다시 되돌아온 상황을 상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복속의례 도중 신라왕이 귀국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으므로 이렇게 보기 어렵다. 바로가기
  • 각주 036)
    ‘대위제위상하(大位諸位上下)’를 신라의 왕과 신료로 파악하기도 하며(변태섭, 1979; 이기백, 1979), 고구려 중앙의 관인이 아니라 한강 유역의 지방세력으로 보기도 한다(임기환, 2000; 심정현, 2018). 바로가기
  • 각주 037)
    ‘공(功)’을 공적 특히 전공(戰功)으로 보는 견해가 최근 제기되었다(하시모토 시게루, 2022). 바로가기
  • 각주 038)
    일찍이 木村誠, 1997에서도 모인활동의 성격을 역역(力役) 징발로 파악한 바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39)
    ‘건흥사(建興四)’(이병도, 1979; 손영종, 1985), ‘□희칠년세신□□(□熙七年歲辛□□)’(이호영, 1979) 판독안이 제기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40)
    기노시다 레이진(木下礼仁, 1981)은 ‘십이월입오일갑인(十二月廿五日甲寅)’으로 판독하여 403년으로 비정했고, 고광의(2020)는 ‘십이월입칠일경인(十二月廿七日庚寅)’으로 판독하여 397년으로 비정하기도 했다(2020). 다만 ‘삼(三)’을 ‘오(五)’나 ‘칠(七)’로 판독할 만한 종선(縱線)을 인정하기 어렵다. 바로가기
  • 각주 041)
    『삼국사기』 신라본기3 소지마립간 3년 3월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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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충주고구려비의 구성 내용과 건립시기 자료번호 : gt.d_0010_0030_003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