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고구려 유민묘지명의 현황
5. 고구려 유민묘지명의 현황
1) 유민묘지명의 출토 현황
고구려 멸망 이후 보장왕을 비롯해 많은 고구려 유민이 당으로 끌려갔다. 이들은 당에서 이방인으로 회한의 삶을 살다가 사망한 다음, 가문의 내력과 자신의 이력을 적은 묘지명과 함께 묻혔다. 이로 인해 고구려 유민의 묘지명에는 문헌사료에서 보기 힘든 구체적인 사료가 많이 나온다. 고구려 유민묘지명이 처음 출토된 것은 1920년대였다. 당의 동도(東都)였던 낙양 북교(北郊)에서 보장왕의 손자인 고진(高震)을 비롯해 연개소문가의 천남생(泉男生), 천남산(泉男産), 천비(泉毖), 천헌성(泉獻誠), 책성도독 고량(高量)의 손자인 고자(高慈) 등 6명의 묘지명이 발견된 것이다(羅振玉, 1982; 박한제, 1992).
1980년 이후 당의 도성이었던 서안(西安)과 낙양에서 건설공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유민묘지명도 대거 출토되었다. 1998년 고현묘지명(高玄墓誌銘)이 국내에 소개된 이래(송기호, 1998) 수많은 개별 묘지명이 소개되었다. 이에 전체 출토 현황을 정리하는 한편(윤용구, 2003; 바이건싱(拜根興), 2008; 여호규, 2010; 윤용구, 2014), 집성작업이 이루어졌다(고구려연구재단 편, 2005; 곽승훈 외, 2015; 권덕영, 2021a). 아울러 유민묘지명에 대한 종합 연구가 이루어지는 가운데(拜根興, 2012; 김수진, 2017a), 역주작업도 이루어졌다(권덕영, 2021b).
김수진의 정리에 따르면 2017년까지 고구려 유민묘지명으로 거론된 것은 총 27개이다. 이 중 고요묘, 고제석, 이타인, 천남생, 고현, 천헌성, 고모, 고족유, 고질(고성문)과 고자 부자, 고을덕, 천남산, 천비, 유원정, 고씨부인, 고진, 남단덕 등 17명은 고구려 유민이 명확하다. 고목로, 왕경요, 고흠덕과 고원망 부자, 두선부, 고덕 등 6명은 선조가 중원대륙에서 고구려로 왔다고 하므로 선조의 내력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고구려 유민 여부가 갈린다. 반면 사선의일, 이인덕, 이은지와 이회 부자 등 4명은 고구려 유민으로 보기 힘든 점이 많다(김수진, 2017a, 253쪽 별표).
표1 고구려 유민 1세대의 묘지명 현황김수진, 2014, 302~306쪽; 여호규, 2017b, 394쪽.
| 인명 | 사망 | 입당 (入唐) | 관력(官歷) (고구려) | 주요 관력(당) | 출신지 | 장지 (葬地) | 소장처 |
| 고요묘 (高鐃苗) | 673 | 668 | 소장(小將) | 좌령군(左領軍) 원외장군(員外將軍) | 요동인 | 장안성(長安城) 남원(南原) | 서안(西安) 비림박물관(碑林博物館) |
| 고제석 (高提昔) | 674 (26세) | 증조(曾祖): 대상(大相) 요동성(遼東城) 대수영(大首領) | 조(祖): 역주자사(易州刺史) 부(父): 선위장군(宣威將軍) | 선조 국내성인(國內城人) | 만년현(萬年縣) 산천지원(滻川之原) | 미상 | |
| 이타인 (李他仁) | 675 (73세) | 667~668 | 책주도독(柵州都督) 겸총병마(兼總兵馬) | 우령군장군(右領軍將軍) 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 추증(追贈) | 요동 책주인(柵州人) | 장안성 동(東) 백록원(白鹿原) | 섬서성(陜西省) 고고연구원(考古硏究院) |
| 천남생 (泉男生) | 679 (46세) | 667 | 태막리지(太莫離支) | 사지절대도독(使持節大都督), 병(幷)·분(汾)·기(箕)·람(嵐) 주제군사(州諸軍事), 병주자사(幷州刺史)(679) | 요동군 평양성인(平壤城人) | 낙양(洛陽) 북망(北邙) | 정주시(鄭州市) 하남박물원(河南博物院) |
| 고현 (高玄) | 690 (49세) | 667 | 언급 없음 | 신평도좌삼군총관(新平道左三軍摠管)(689) 좌표도위행중랑장(左豹韜衛行中郎將)(690) | 요동 삼한인(三韓人) | 북망지원(北邙之原) | 신안현(新安縣) 천당지재(千唐志齋) |
| 천헌성 (泉獻誠) | 692 (43세) | 666 | 선인(先人) |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검교천추자래사(檢校天樞子來使)(690) | 선조 고구려국인 | 낙양 망산(邙山) | 소재 불명 |
| 고모 (高牟) | 694 (55세) | 668? | 미상[추기(樞機)] | 좌표도위대장군(左豹韜衛大將軍) | 안동인(安東人) 마읍(馬邑) | 낙주(洛州) 북망산 | 낙양 비지(碑誌) 탁편박물관(拓片博物館) |
| 고족유 (高足酉) | 695 (70세) | 667~668? | 미상 |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 행좌표도위대장군(行左豹韜衛大將軍)(690), 고려번장(高麗蕃長) 어양군개국공(漁陽郡開國公)(695) | 요동 평양인(平壤人) | 낙주 이궐현(伊闕縣) 신성지원(新城之原) | 이천현(伊川縣) 문관회(文管會) |
| 고질 (高質) | 697 (72세) | 667~668? | 삼품위두대형겸대장군(三品位頭大兄兼大將軍) | 로하도토격대사(瀘河道討擊大使), 청변동군총관(淸邊東軍摠管)(696), 좌옥검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 좌우림군상하(左羽林軍上下)(697) | 요동 조선인(朝鮮人) | 낙양 합궁현(合宮縣) 평락향(平樂鄕) | 신안현(新安縣) 천당지재(千唐志齋) |
| 고자 (高慈) | 697 (33세) | 667~668? | 장무장군(壯武將軍), 행좌표도위익부낭장(行左豹韜衛翊府郎將)(696) | 조선인 | 낙양 평락향 | 나진옥(羅振玉) 소장, 현소재 불명 | |
| 고을덕 (高乙德) | 699 (82세) | 661 | 중리소형(中裏小兄), 귀단도사(貴端道史) | 우위람전부절충장상(右衛藍田府折衝長上)(662), 검교본토동주장사(檢校本土東州長史)(668), 좌청도렬부빈양부절충(左淸道率府頻陽府折衝)(674),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691) | 변국(卞國) 동부인(東部人) | 두릉지북(杜陵之北) | 미상 |
| 천남산 (泉男産) | 701 (63세) | 668 |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 | 요양군(遼陽郡) 개국공(開國公), 영선감대장(營繕監大匠), 원외치동정원(員外置同正員) | 요동 조선인 | 낙양현 평음향(平陰鄕) | 정주시(鄭州市) 하남박물원(河南博物院) |
2018년 이후 고빈(高賓, 502~572)(김영관, 2018), 환관 고연복(高延福, 661~723)(조범환, 2023), 이인회(李仁晦, 683년경 출생)(王連龍·黃志明, 2022), 여항군(餘杭郡) 태부인 천씨(泉氏, 808년 사망)(拜根興, 2022) 등이 고구려 유민으로 소개되었다. 이 가운데 태부인 천씨는 연개소문의 손자인 천헌성의 증손녀이다. 다만 고빈은 『주서』 열전에도 입전되었지만, 생몰년상 고구려 유민으로 보기 힘들며, 묘지명에도 고구려와 관련한 내용은 찾아지지 않는다. 고연복과 이인회도 묘지명의 내용만으로 고구려 유민이라고 확정하기가 쉽지 않다. 유민 1세대의 묘지명 현황을 간략히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2) 유민묘지명의 연구현황
유민묘지명 연구는 개별 묘지명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1992년에 이루어진 유민묘지명 6기에 대한 역주는 유민묘지명 연구의 전환점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박한제, 1992). 그 이후 1998년 고현묘지명을 시발로 무수한 묘지명이 소개되었는데, 그때마다 충실한 역주가 이루어졌다. 묘지명을 소개한 연구자들이 유민묘지명을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이다.주 043
묘지명은 특성상 가문의 내력과 본인의 관력(이력)이 주요 내용을 이룬다. 이에 따라 고구려 유민묘지명에도 고구려의 관등이나 관직이 다수 나온다. 가령 연개소문가의 묘지명에는 가문 대대로 막리지(莫離支)를 계승하고, 연개소문이 태대대로(太大對盧)를 역임한 것으로 나온다. 특히 천남생묘지명과 천남산묘지명에는 연령별 관등 승진 양상이 기재되어 있는데, 장자인 천남생만 관등 앞에 ‘중리(中裏)’를 관칭한 점이 많은 주목을 받았다.
고을덕묘지명에도 고을덕 가문이 대대로 중리계 관등을 역임하며 목마(牧馬)와 관련된 상사(垧事)라는 직임을 잇고, 대로관(對盧官), 평대지직(平臺之織), 사부대부(司府大夫) 등과 함께 여러 지방관을 역임한 사실이 나온다. 그 외에도 관등과 함께 중앙이나 지방의 관직도 다수 확인된다. 특히 이타인묘지명에는 이타인이 “책성도독겸총병마(柵州都督兼總兵馬)로 파견되어 고려(高麗) 12주(州)와 말갈(靺鞨) 37부(部)를 통할(統管)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지방제도의 운영 양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에 유민묘지명을 활용해 관등제(武田幸男, 1989a; 임기환, 2004), 지방제도의 운영 양상(노태돈, 1999; 김현숙, 2005) 등을 다각도로 검토했다. 중리계 관등도 많은 관심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국왕의 근시직이나 근시기구로 이해(武田幸男, 1989a; 이문기, 2003; 이규호, 2015; 이동훈, 2019)했다가, 고을덕묘지명 발견 이후에는 귀족가문의 권력세습 통로(이성제, 2016)나 귀족가문의 정치적 위상을 승계할 자제에게 수여한 관등(여호규, 2016)으로 파악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또 이타인묘지명을 바탕으로 두만강 유역의 지방제도 운영양상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기도 했다(여호규, 2017b).
한편 유민묘지명에는 고구려의 멸망 과정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가령 천남생묘지명과 천헌성묘지명에는 남생이 당에 투항한 과정, 그리고 당군과 합세해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과정이 상세히 적혀 있다. 고효묘묘지명의 주인공은 668년 평양성 함락 당시 당과 내응하여 성문을 열어주었던 요묘(饒苗)와 동일인으로 밝혀졌다. 이타인묘지명에는 책성도독을 역임하다가 이적에게 투항하는 과정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에 유민묘지명을 바탕으로 고구려 멸망 과정을 새롭게 검토하는 연구가 다수 이루어졌다.
유민묘지명은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의 기미지배 구축 양상과 부흥운동에 대해서도 새로운 내용을 많이 전한다. 남단덕묘지명과 고흠덕·고원망 부자의 묘지명에는 당이 기미지배를 구축하던 양상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또 이타인묘지명에는 부여 지역이나 두만강 유역에서의 부흥운동, 고을덕묘지명에는 당이 673년경 고구려 부흥운동을 진압하고 신라와의 전면전에 착수하던 양상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에 유민묘지명을 바탕으로 고구려 부흥운동을 새롭게 고찰한 연구가 다수 이루어졌다(김강훈, 2022).
유민묘지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부분은 당에서의 활동이다. 이에 많은 연구자가 당에서 이루어진 유민의 활동에 주목했지만, 주요 관심사는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이었다. 묘지명의 출자 표기를 분석하여 정체성 변화 양상을 고찰한 것이다(김현숙, 2001; 이문기, 2010; 김수진, 2014; 안정준, 2016). 대체로 세대가 내려갈수록 고구려 정체성이 약화되며 당인(唐人)으로 동화한 것으로 보았다. 이에 대해 당 국가권력의 고구려 정체성 말살 시도(최진열, 2009), 당 사회의 시선을 의식한 출자 표기 양상(이성제, 2014), 당인 찬자의 인식 투영(김수진, 2018a; 2019)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되었다.
이처럼 주로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당에서의 활동은 충분히 검토되지 못했다. 가령 고족유묘지명에는 고구려 유민이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천추(天樞) 조성에 참여한 사실, 고현묘지명에는 당이 고구려 유민 출신 장수와 병사를 대돌궐 방어전에 동원한 사실, 고질·고자부자묘지명에는 696년 거란의 흥기 직후 요동 지역 고구려 유민의 동향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당의 정세와 관련해 유민의 활동을 다각도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여호규·拜根興, 2017). 이러한 점에서 유민의 사제(私第)와 장지, 당에서의 출사, 절충부 복무 등을 고찰한 연구가 주목된다(김수진, 2017b; 2018b; 2023).
한편 고구려로 유망했던 중국계 망명객이나 그 후손의 묘지명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사료로 한기묘지명(韓曁墓誌銘)을 들 수 있는데, 520년대 북위 분열 시에 고구려가 요서 지역을 공략한 사실과 550년대 초반 북제와의 외교관계를 재조명할 단서를 제공했다(朱子方·孫國平, 1986; 井上直樹, 2001; 李成制, 2001). 유민으로도 분류되는 두선부묘지명(豆善富墓誌銘)에도 두선부(684~741)의 6대조인 보번(步蕃)이 서위의 하곡(河曲)을 진수하다가 북제에게 패하고 고구려로 도망 온 사실이 나오는데(바이건싱(拜根興), 2008), 6세기 중반 고구려와 북제·서위의 외교관계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또 수·당의 고구려 원정에 참여했던 인물의 묘지명을 비롯한 금석문도 다수 확인되었다(拜根興, 2002b; 고구려연구재단 편, 2005; 곽승훈 외, 2015). 이러한 금석문은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한다. 산동 봉래 북해의 탁기도(駝譏島) 석각문에는 당의 장량(張亮)이 645년 출병에 앞서 용왕제를 지낸 사실, 하북의 대당신법사미타상비(大唐信法寺彌陀像碑, 658)에는 645년 당의 해군으로 출정했던 병사 100여 명의 무사귀환을 기원한 사실, 장위묘지명(强偉墓誌銘)에는 선박 건조에 동원된 남방민의 전쟁에 대한 인식 등이 나온다. 이에 수 양제의 고구려 원정에 참여한 인물의 묘지명을 통해 전쟁 양상을 고찰하고(정동민, 2022), 탁기도 석각문을 통해 645년 당 해군의 움직임을 조명하기도 했는데(문영철, 2023), 향후 이들 자료를 더욱 다각도로 검토하면 고구려의 대수·당전쟁을 새롭게 재조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