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의의와 과제
6. 의의와 과제
이상과 같이 조선 후기에 평양성 석각 명문이 출토되고, 1880년 무렵에 광개토왕릉비가 재발견된 이래 무수한 고구려 금석문과 문자자료가 출토되었고,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개별 금석문과 문자자료에 대한 판독, 번역, 주석뿐 아니라 이를 활용한 고구려사 연구도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문헌사료의 부족과 결함을 메우고, 고구려사 나아가 한국고대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가령 집안고구려비, 광개토왕릉비, 모두루묘지에 고구려 건국설화가 나오는데, 이를 바탕으로 각종 문헌사료와 비교해 건국설화의 정립 과정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박시형, 1966; 서영대, 1991; 노태돈, 1999). 5세기 금석문에는 주변국과의 관계나 인식을 보여주는 명문이 풍부하게 나오는데,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의 외교관계와 천하관을 체계적으로 고찰했다(서영수, 1982; 양기석, 1983; 노태돈, 1999; 여호규, 2009; 2023c). 관등과 관직을 분석하여 관등제, 중앙관제, 지방제도를 고찰한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武田幸男, 1989a; 임기환, 2004; 김현숙, 2005; 여호규, 2014a).
이러한 점에서 금석문과 문자자료는 고구려사를 새롭고 다채롭게 연구하기 위한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다만 금석문과 문자자료를 더욱 정확하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판독과 역주 등 기초적인 연구작업을 더욱 충실하게 진행할 필요가 있다. 1992년 한국고대사회연구소가 추진한 금석문 역주작업이 연구를 크게 활성화한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2019년 충주고구려비에 대한 동북아역사재단·한국고대사학회 공동판독회(동북아역사재단, 2021)나 광개토왕릉비의 원석탁본 관찰(고광의, 2014a; 2014b; 여호규, 2023a; 2023b) 등을 통해 다수 글자를 새롭게 판독한 사실은 정밀한 판독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금석문과 문자자료는 당대인이 작성했다는 점에서 객관적인 사실을 전할 것이라고 전제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에 많은 연구자가 금석문·문자자료와 문헌사료가 상충할 경우, 금석문·문자자료에 입각해 문헌사료를 비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광개토왕릉비에는 찬자의 인식에 따른 윤색이 다수 확인되며, 고구려 유민묘지명에도 찬자의 입장이 많이 투영된 사실이 확인된다. 금석문과 문자자료도 문헌사료와 마찬가지로 엄정한 사료비판을 거쳐 연구자료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