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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도성과 성곽

1. 도성과 성곽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주몽이 졸본(卒本), 즉 흘승골성(紇升骨城)에 고구려를 세웠고, 유류왕(유리왕) 22년(3)에 도읍을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겼다. 이후 장수왕 15년(427)에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다시 평원왕 28년(586)에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을 옮겼으나, 보장왕 27년(668년)에 멸망하였다. 물론, 문헌에는 도읍을 옮긴 기사(이도, 천도, 이거 등)가 더 확인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시기에 대한 논란도 있으나, 도성의 위치에 따라 졸본, 국내, 평양으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은 지형적 특징상 고구려는 중기까지도 도읍을 둘러싼 대형 성곽이 확인되지 않으며, 6세기 후반에 평양 장안성으로 천도한 이후에야 비로소 도시를 감싸는 외성(外城)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고구려 도성의 기본구조는 방형 평면의 성곽도시의 형태를 갖춘 중국의 고대 도성과는 차이를 보인다. 고구려의 장안성 역시 대동강과 보통강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지형에 맞춰 석축 성벽을 쌓은 관계로, 축성방식이나 평면형태, 세부구조 등에서 중국의 도성구조와는 확연히 다르다.
고구려 도성에 대한 고고학적인 조사는 20세기 전반기에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는 1905년과 1912년에 환인(桓仁)과 집안(集安) 지역의 고구려 유적을 조사하였고, 1910년부터 평양 지역의 고구려 고분을 발굴조사한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역시 1913년에 집안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조사한 바 있다. 이들은 1914년 『사학잡지(史學雜誌)』에 국내 도성의 위치 및 고구려 도성제와 관련한 각자의 견해를 밝히며 주목을 받았다.
평양 도성에 대한 연구는 192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본격화되었다. 세키노 다다시는 평양 지역 고구려 도성이 평지성과 산성으로 이루어졌다는 본인의 주장을 구체화시켰다. 안학궁에서는 고구려 늦은 시기의 와당이, 그리고 청암리토성에서는 대성산성 출토품과 유사한 고식의 연화문와당이 출토되고 있으므로, 고구려의 전기 평양성은 대성산성과 청암리토성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關野貞, 1928). 다만 세키노는 과거에 안학궁을 평양성과 짝을 이루는 평지성으로 추정한 바 있으나(關野貞, 1914), 이 논문에서는 와당의 편년을 근거로 청암리토성을 왕성으로 비정하면서 안학궁은 고구려 후기의 별궁으로 견해를 수정하였다.
반면, 세키노와 달리 이병도(1931)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대성산성으로, 궁궐은 안학궁으로 보는 견해를 제시하였다(동북아역사재단, 2007).
한편, 조선총독부는 1929년과 1930년에 고적조사 특별보고 형식으로 『고구려시대의 유적(高句麗時代之遺蹟)』을 발간하였는데, 이 보고서에는 청암리토성, 안학궁, 대성산성, 평양성 등의 유적 사진과 지도 및 도면이 수록되었다.
평양 도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1930년대 중반으로, 조선고적연구회(朝鮮古蹟硏究會)가 중심이 되었다. 평양부립박물관(平壤府立博物館) 관장이었던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는 1935년과 1936년에 평양성을, 1938년과 1939년에는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와 함께 청암리토성을 조사하였다.
전기 평양성의 왕궁터로 추정된 청암리토성의 중앙부에 대한 조사에서는 팔각탑을 비롯한 금당으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발견되어 토성 내에 절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고이즈미는 지역 전승과 주변의 지명 조사를 통해 이 폐사지를 498년(문자왕 7)에 창건된 금강사(金剛寺)로 보았다(小泉顯夫, 1940). 이러한 조사 결과는 이후 연구에서 청암리토성이 고구려의 왕성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의 핵심 근거가 되었다.
집안 지역의 고구려 도성유적에 대한 고고학 조사는 만주국(滿洲國)이 성립된 1932년 이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1935년에는 일만문화협회(日滿文化協會)와 만주국 문교부의 후원으로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구로다 겐지(黑田源次), 미카미 쓰기오(三上次男) 등이 중심이 되어 집안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고구려 도성과 주요 고분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는 『통구(通溝)』(1938, 1940)라는 2권의 보고서로 간행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북한에서 먼저 고구려 도성에 대한 연구(황오, 1949; 채희국, 1957) 및 조사를 진행하였다. 특히 1958년부터 1961년까지 대성산성과 안학궁을 대대적으로 발굴조사하였다(채희국, 1964;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73).
북한 학계는 전기 평양 도성이 안학궁과 대성산성으로 구성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청암리토성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고 199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성벽 및 일부 건물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진 바 있다(남일룡·김경찬, 1998; 2000). 토성 서쪽 구역의 초석 건물지에서는 벽화 파편이 발견되었는데, 고구려 건축물에서 벽화가 발견된 사례는 청암리토성이 유일하다.
중국에서 졸본과 국내 도성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80년대이다. 오녀산성, 국내성, 환도산성 등 도성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 역시 고구려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추진된 2000년대를 전후한 시점에 이루어졌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물론 1950년대 중후반부터 간헐적으로 오녀산성, 국내성, 하고성자성 등이 조사되었으나, 1970년대 중반에 성벽 절개조사가 이루어진 국내성(集安縣文物保管所, 1984)을 제외하면 1980년대 이전까지의 구체적인 조사 내용은 거의 알려진 바 없다.
위존성(魏存成, 1985)은 중국 고고학계에서 고구려 초기 및 중기의 도성 문제를 가장 먼저 다루었다. 산성과 평지성의 결합을 고구려 도성의 가장 큰 특징으로 판단한 그는, 초기 도성(졸본)은 환인의 하고성자토성(下古城子古城)과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중기 도성(국내)은 집안의 국내성과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으로 비정하였다. 이후 그의 견해는 중국 학계의 통설이 되었지만, 최근에는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일부 다른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王志剛, 2016).
고구려 도성제에 대한 그간의 연구들은 『주서(周書)』에 기록된 평양성에 대한 내용과 개별 유적의 분포 양상을 토대로 평지의 왕궁과 위급 시 사용된 배후의 산성으로 이루어졌다는 세키노 다다시의 주장(關野貞, 1914)에 대체로 동조해 왔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개별 왕성(또는 궁성)유적의 축조 및 이용 시점에 대한 고고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후대까지 보존된 도성 내 유적의 분포 양상을 토대로 평지성과 방어용 산성이라는 고정된 틀에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하며 재검토되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하였다(양시은, 2021a).
한편, 고구려는 평지성을 쌓아 도시를 방어했던 고대 중국과 달리 산성을 기반으로 한 방어체계를 갖추었다. 고구려의 산성은 험준한 지세를 최대한 활용하여 축조하였기 때문에 점령이 쉽지 않았으며, 국경 외에도 도성으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에 산성을 쌓는 등 다중의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다.
다만 영토가 대폭 확장된 고구려 중기 이후부터는 군사방어적인 목적 외에도 효율적으로 지방을 지배하기 위해 중요 거점에는 치소성(治所城)을 축조하였다. 『구당서(舊唐書)』에는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 5부(部) 176성(城) 69만 7,000호(戶)였고, 『북사(北史)』에 요동이나 현도 등 수십 성에 모두 관청을 설치하여 통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또 치소성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큰 중대형의 포곡식산성에는 기와가 출토되는 경우가 많은데, 고구려는 오직 불사(佛寺)·신묘(神廟) 및 왕궁·관부(官府)만이 기와를 사용하였다는 『구당서』의 기록으로 볼 때 중기 이후 치소성에는 기와를 올린 행정관청 건물이 들어서 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양시은, 2016).
고구려 성에 대한 첫 번째 조사는 도리이 류조가 1895년에 봉성(鳳城) 봉황산산성(鳳凰山山城)을 답사한 것이며, 20세기 들어서는 일본인 연구자들의 답사를 통한 요동 지역 고구려 산성에 대한 현황 파악이 주가 되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1940년대에는 무순(撫順) 고이산성(三上次男·田村晃一, 1993)을 비롯한 일부 유적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 중국에서는 1956년에 집안 패왕조산성(覇王朝山城)이 조사된 이후, 문화대혁명 시기를 거치면서 한동안 조사가 중단되었으나 1980년대에 들어와 전면적인 현황 조사가 재개되었고, 각 지역의 『문물지(文物志)』 등을 통해 고구려 성에 대한 기초 자료가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무순 고이산성(高爾山城)이나 심양(瀋陽) 석대자산성(石臺子山城) 등 일부 산성이 발굴조사되었으나, 관련 내용은 학술지에만 간략하게 보고되었다. 2000년대에 이르러 중국은 오녀산성, 국내성, 환도산성을 대대적으로 발굴조사하였고, 이례적으로 보고서도 간행하였다. 2000년대 후반부터는 환인 고검지산성(高儉地山城), 봉성 봉황산산성, 서풍(西豊)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 등탑 연주성(백암성), 통화 자안산성(自安山城), 유하(柳河) 나통산성(羅通山城), 개주 고려성산성(청석령산성), 길림 용담산성(龍潭山城) 등이 발굴조사되었다. 그중 『석대자산성』(2012)과 『나통산성』(2024)은 보고서가 발간되었다.
광복 이후 도성을 중심으로 발굴 및 연구를 하였던 북한에서는1980년대에 들어 주요 고구려 산성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황주성, 신원 장수산성, 피현 걸망성, 성천 흘골산성, 단천 가응산성 등에 대한 조사가 간헐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성과는 『조선고고연구』 등 학술잡지에 간략하게 보고되었다. 그나마 북한 사회과학원에서 발간한 『조선고고학전서: 고구려의 성곽』(2009)이나 1990년대 후반 북한 고구려 산성을 답사하고 관련 자료를 정리한 서일범(1999)의 「북한지역 고구려 산성 연구」, 동북아역사재단의 『남포시 용강군 옥도리 일대 역사유적』(2011)과 『황해도 지역 고구려 산성』(2015), 『평안도 지역 고구려 산성』(2017) 등을 통해 북한 소재 고구려 산성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 확인이 가능하다.
남한에서는 1988년 서울 몽촌토성의 발굴조사를 통해 남한 내 고구려 관방유적의 존재 가능성을 처음으로 인식한 이후, 1990년대 후반부터 구리 아차산4보루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고구려 성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와 연구가 진행되었다. 남한의 고구려 성은 크게 임진·한탄강 유역, 양주 일대, 한강 유역, 금강 유역에 분포하고 있는데, 한강 유역의 아차산 일원에 가장 많은 고구려 보루가 밀집해 있다. 그동안 임진·한탄강 유역에서는 연천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무등리1·2보루, 고성산보루, 전곡리 목책유구와 파주 덕진산성이, 양주 일대에서는 천보산2보루, 태봉산보루, 독바위보루가, 한강 유역에서는 아차산3·4보루, 홍련봉1·2보루, 용마산2보루, 시루봉보루, 구의동보루가, 안성 지역에서는 도기동 목책유적이, 그리고 금강 유역에서는 청원 남성골산성과 대전 월평동유적이 발굴조사되었다.
이처럼 남한 지역의 고구려 성은 중국이나 북한과 달리 소규모 보루가 대부분이지만, 성벽과 성 내외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를 통해 고구려의 축성기술과 성의 구조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축적할 수 있었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5세기 이후에야 남한 지역에 성을 축조하는 것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고구려 중·후기 편년 설정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며, 조사 내용이 모두 보고서로도 간행되어 연구자료의 활용 가치가 크다(양시은, 2016).
다음에서는 졸본, 국내, 평양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도성의 현황과 이에 따른 방어체계를 함께 검토하도록 하겠다.
 
1) 졸본 도성과 방어체계
『삼국사기』에는 동명왕 즉위년(기원전 37년)에 주몽이 “졸본천에 이르러,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마침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으므로 일단 갈대를 엮어 비류수 위에 살았다”라고 하며, 얼마 후(기원전 34년)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광개토왕릉비에는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고 하고, 『위서(魏書)』에는 “흘승골성에 이르러 마침내 자리를 잡았다”라고 한다.
졸본은 이른 시기의 고구려 성과 적석총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곳이어야 하는데,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은 현재 요령성 환인과 길림성 집안 지역뿐이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와 집안고구려비가 소재한 집안 지역이 국내성이므로, 환인 지역이 졸본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중국 요령성 환인 일대에는 오녀산성과 하고성자토성을 비롯하여 망강루고분군(望江樓古墳群), 상고성자고분군(上古城子古墳群), 고력묘자고분군(高力墓子古墳群) 등 이른 시기의 적석총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그림2 환인 일대의 고구려 유적 분포도
험준한 절벽으로 둘러싸인 산 정상부(해발 806m)에 위치하여 방어가 용이한 오녀산성에는 고구려 초기(3기 문화층)와 중·후기(4기 문화층)에 해당하는 유구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산 정상부는 길이 600m, 너비 110~200m가량의 넓은 평탄지이며, 샘이 있어 안정적인 식수 공급이 가능하다. 산성에서 발견된 여러 유구 중에서 오수전(五銖錢)과 대천오십전(大泉五十錢)이 출토된 1호 대형 초석 건물지의 규모와 건축 구조는 동시기 다른 유적에 비해 월등하므로 고구려 초기 왕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오녀산성은 별도의 성벽을 쌓지 않고도 충분히 방어가 가능한 천혜의 요새이자 환인분지 어디에서나 조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초기 왕성으로 상징성을 갖기에 충분하다. 발굴조사 결과(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고구려 초기에 활용되었음이 밝혀진 만큼, 건국 당시 산 위에 성을 쌓아 도읍으로 삼았다는 흘승골성으로 보기에 무리가 없다.
그렇지만 험준한 산 정상부에 위치한 오녀산성은 접근도 쉽지 않고, 겨울에는 눈과 추위로 인해 정주(定住)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평상시 왕이 거처하며 정무를 보는 곳은 평지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동일한 이유로 고구려 중기 이후 오녀산성은 치소성이 아닌 방어성으로만 기능하였다.
한편, 위존성(魏存成, 1985)은 졸본 도성이 하고성자토성과 오녀산성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 다만 고구려 건국 초기에는 토성을 축조하는 전통이 없었기 때문에, 한이 축조한 것을 고구려가 연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혼강(渾江) 변에 위치한 하고성자토성은 성벽의 전체 둘레가 0.8km인 평면형태 장방형의 토성이다. 1998년에는 기저부 너비 15.2m, 잔고 1.4m인 사다리꼴 단면의 토루를 조사하였는데, 성벽 축조 이전에 만들어진 구덩이에서 고구려 이른 시기의 토기편이 출토되었다(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이를 통해 하고성자토성은 한이 아닌 고구려가 축조한 것임이 밝혀졌다.
졸본 평지도성과 관련하여서는 하고성자토성의 정확한 축성 시기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데, 아직까지도 발굴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간접적인 추론만 가능한 상황이다. 우선 광개토왕릉비에서는 홀본의 서쪽 산 위에 도읍을 세웠다고 하므로, 오녀산성의 서쪽에 위치한 하고성자토성은 평지도성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인근의 상고성자고분군은 토성 거주 집단의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큰데, 고분군은 기단적석총이 중심을 이루고 있고 부장유물 또한 무기단적석총으로 구성된 망강루고분군보다 시기가 늦다는 점에서 조성 시기가 고구려 초기보다는 약간 늦을 수 있다.
이처럼 하고성자토성을 고구려 건국 당시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하기에는 고고학적인 근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왕면후(王綿厚, 2002)나 이신전(李新全, 2008) 등 중국 연구자들은 여전히 하고성자성을 졸본 평지도성으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고구려 건국 초기에 평지성이 존재하였다는 기록은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환인 일대에서 또 다른 평지성도 확인되지 않으므로, 오녀산성이 산상도읍이자 흘승골성으로, 단독으로 초기 도읍을 구성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오녀산성 내부에 고구려 초기 건물지가 거의 없고 일상생활이 불편하다는 점에서 환인댐으로 인해 지금은 수몰된 고력묘자고분군 일대가 평상시 왕이 거주하고 있었던 평지 거점의 유력한 후보지로 논의되고 있다. 고력묘자고분군은 무기단적석총, 기단적석총 및 계단적석총은 물론이고 봉토분까지 확인되고 있어 환인 일대에서 규모가 가장 클 뿐만 아니라 고분군의 조영 기간도 가장 길어, 인근의 오녀산성과 함께 고구려 초기 도읍을 구성하였을 가능성이 크다(양시은, 2016).
환인의 외곽에는 졸본으로 향하는 주요 길목을 통제할 수 있는 지점에 산성이 분포하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신빈(新賓) 흑구산성(黑溝山城)과 전수호산성(輾水湖山城), 관전(寬甸) 소성자산성(小城子山城) 등이 있다. 이들 성은 모두 험준한 산 정상부에 축조된 석성으로, 절벽이나 험준한 자연지형을 천연성벽으로 활용하면서 필요한 일부 구간에만 석축 성벽을 쌓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처음부터 잘 치석된 성돌로 성벽을 정연하게 쌓지는 못했을 것이고,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방어하다가 돌을 다루는 기술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이후에야 본격적인 축성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재 산성에 남아있는 정연한 석축 성벽은 고구려 초기가 아닌 국내도읍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고구려가 이른 시기부터 산성을 이용한 방어전략을 구축하였음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대무신왕 11년(28)이나 신대왕8년(172) 기사 등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신대왕 8년에 한이 공격해오자 명립답부(明臨答夫)는 왕에게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을 비워서 대비하면, 그들은 반드시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리고 궁핍해져서 돌아갈 것입니다. 이후 우리가 날랜 군사로 공격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하여, 고구려군의 승리를 이끈 바 있다.
 
2) 국내 도성과 방어체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내 도성은 중국 길림성의 집안 지역으로, 국내성과 환도산성(산성자산성)을 비롯하여 태왕릉(太王陵)과 장군총(將軍塚) 등 왕릉으로 비정되는 초대형 적석총, 그리고 광개토왕릉비와 최근 새로 발견된 집안고구려비 등이 분포해 있다. 북쪽의 노령산맥에서 뻗어 내린 용산(龍山), 우산(禹山), 칠성산(七星山) 등이 집안분지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서쪽으로는 통구하(通溝河)가 흐르고 있어 자연방어벽을 형성하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유리왕 22년(3)에 “국내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런데 현재 집안 지역에서 확인되는 국내성과 환도산성은 지금까지의 발굴조사 결과만 놓고 본다면, 유리왕 대 국내 천도를 입증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졸본에서 국내로의 천도 시점에 대해서는 유리왕대천도설(魏存成, 1985; 박순발, 2012 등)을 비롯하여 태조왕대천도설(여호규, 2005; 강현숙, 2015; 권순홍, 2019 등), 신대왕대천도설(임기환, 2015; 기경량, 2017 등), 산상왕대천도설(심광주, 2005a; 노태돈, 2012 등)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삼국지(三國志)』에는 건안(建安)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고구려를 공격할 당시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발기(拔寄)가 공손강에게 투항했다가 돌아와 비류수(沸流水) 유역에 살았고, 이이모(伊夷模)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 [고구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라는 내용도 전한다. 고구려본기에는 이와 유사한 내용이 고국천왕 즉위년(189)과 산상왕 즉위년(197) 기사에 각각 기록되어 있는데, 건안 연간(196~219)이라는 시기를 고려할 때 이 기사는 산상왕 대의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산상왕 2년(198)에 환도성(丸都城)을 쌓고, 13년(209)에는 왕이 환도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246년 위 관구검(毌丘儉, 혹은 모구검)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점령되자, 동천왕 21년(247)에는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 및 사직(廟社)을 옮겼다. 또한 고국원왕 12년(342)에는 다시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았으며, 같은 해 8월 환도성으로 옮겨 거처하였다고 하고, 다음 해(343)에는 거처를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상의 천도 기사들은 2세기 말에서 3세기 전반에 고구려의 수도가 두 번이나 함락되면서 일어난 복잡한 상황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1906년에는 통구분지의 소판차령(小板岔嶺)에서 관구검기공비(毌丘儉紀功碑)가 발견되어 이러한 역사적 사건이 실제임이 밝혀진 바 있다.
집안 지역 통구평원에 조성된 국내성은 전체 성벽 둘레가 2.74km에 달하는 평면형태 방형의 석축 평지성이다. 성벽 아래에서 토축 다짐층의 흔적을 발견하였다는 1970년대의 시굴조사 결과(集安縣文物保管所, 1984)를 바탕으로 한동안은 이를 한의 고구려현성(高句麗縣城)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魏存成, 1985)도 있었다. 그렇지만 2000년대에 실시된 발굴조사에서는 이러한 토루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고, 조사단 역시 기초부와 석축 성벽의 축조 시기를 4세기 이후로 판단하였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외, 2004a; 2012). 사실상 해당 토축 다짐층은 한대 토성의 흔적이 아니라 고구려가 성벽 축조를 위해 조성한 기초 성토층으로 봐야 하며(양시은, 2013), 이러한 성토층은 연천의 호로고루나 당포성 등의 기초부에서도 확인된다.
그림3 집안 지역 주요 고구려 유적 분포도
국내성은 석축 성벽 내부의 토축부에서 고구려 중기에 해당하는 토기가 출토되었고, 성 내부에서도 4세기보다 이른 시기의 건물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러한 고고학 조사 결과(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외, 2004a)를 고려해본다면, 국내성은 축성 기사가 있는 고국원왕 12년(342)에 완공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환도산성은 국내성에서 북쪽으로 2.5km가량 떨어져 있는데,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으로도 불린다. 남쪽 계곡 입구를 정문으로 삼고 주변의 험준한 산 능선을 따라 석축 성벽을 쌓아 전체 둘레가 7km인 전형적인 포곡식산성이다. 문헌에는 산상왕 2년(198)에 환도성을 축조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까지의 발굴조사에서는 5세기대 이후의 유물만 출토되었을 뿐 이른 시기의 유물이나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성 내부에서는 11동의 초석 건물지가 들어선 남북 95m, 동서 86m 범위의 4단으로 구성된 대지가 발견되었다. 2호 대지에는 팔각 건물지 2개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는데, 최근에는 이를 목탑지로 추정하기도 한다(양은경, 2023). 이 부지에서는 와당과 기와를 포함한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발굴보고서에는 342년 전연(前燕)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함락되었을 때 소실되어 폐기된 궁전지로 판단하고 있으나(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외, 2004b), 이 건물지에서 출토된 연화문와당이나 양이부호 등은 5~6세기대 남한의 고구려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고, 6세기대 문헌에도 여전히 환도성의 명칭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4세기대 폐기설은 문제가 있다(양시은, 2016).
이상과 같이 집안 지역의 왕성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국내 천도 시점부터 도성의 구조가 평지성과 방어용 산성으로 이루어졌다는 기존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님이 확인되었다. 그렇지만 국내성과 환도산성의 축조 시점이 유리왕 대 국내 천도 기사와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244년 고구려의 환도성을 공격한 관구검이 남긴 관구검기공비와 167년 신대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 그리고 2세기 전반으로 편년되는 초대형 무기단적석총인 마선구(麻線溝)2378호분 등으로 볼 때, 적어도 2세기대에는 집안 지역이 고구려의 도성이었음은 분명하다.
이로 인해 초기 국내 도읍은 졸본과 마찬가지로 평지 거점과 방어성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새로운 견해가 등장하게 되었다. 여호규(2005)와 강현숙(2015)은 3면이 산줄기로 둘러싸여 있어 별도의 성곽을 축조하지 않아도 평상시 거점으로 삼기에 충분한 천혜의 요새지인 마선구 일대에 평지 거점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건강(建疆)유적에 주목한 바 있다. 반면 왕지강(王志剛, 2016)이나 기경량(2019)은 현 국내성이 자리한 통구평야에 평지 거점이 있었으며, 4세기대에 국내성을 축조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고구려의 미천왕은 서안평(311), 낙랑군(313), 대방군(314), 현도성(315년)을 차례로 점령하여 영역 확장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고국원왕은 355년에 고구려 서북 방어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신성(新城)을 축조하였다. 요동 지역에서 당시 도성이었던 집안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소자하(蘇子河) 내지는 태자하(太子河) 유역을 따라 이동하여야 한다. 소자하 유역의 교통로는 고이산성을 기점으로 심양 또는 무순에서 신빈으로 이어지며, 태자하 유역의 교통로는 요양(遼陽)에서 본계(本溪)를 거치는 경로로, 요동성(遼東城)에서 시작한다. 다만, 요동성은 5세기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이용되었을 것이므로, 4세기 중국에 대한 방어체계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한 성은 고구려의 최전선에 축조된 신성, 즉 고이산성이었다.
고이산성은 무순시의 북쪽에 있는데, 동성을 중심으로 서성, 남위성, 북위성 및 동남쪽의 세 작은 성(小城)으로 구성되며, 전체 둘레는 4km에 달한다. 동성은 둘레가 2.8km이며 하곡평지형 포곡식 토축 산성이다. 요동평원과 동부 산간지대의 접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혼하(渾河)와 소자하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실린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방의 요해지로 먼저 점령하지 않고서는 나머지 성들도 쉽게 빼앗을 수 없다”라는 당 장수 이적(李勣)의 언급은 고이산성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고구려는 요동평원에서 국내 도성으로 진입이 가능한 소자하나 태자하를 따라 새로운 성을 축조하거나 기존의 산정식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교통로를 중심으로 한 관방체계를 구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새롭게 축조된 산성은 험준한 산 정상부에 조성한 기존의 성들과는 달리 계곡을 끼고 산성을 축조함으로써 보다 많은 병사가 장기간 주둔하며 방어할 수 있게끔 규모가 확대되었다. 그리고 험준한 산 정상부에 조성된 산정식산성 역시 이 시기에 정연한 석축 성벽으로 전면 개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가 교통로를 따라 방어체계를 구축하였음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2년(342)에 전연의 모용황(慕容皝)이 고구려를 침입할 당시 “고구려에는 두 길이 있는데, 북도는 평탄하고 넓고, 남도는 험하고 좁다”는 기록과 『위서』 고구려전에 남도의 목저(木底)에서 전연의 군대가 고구려를 대파하고 환도에 이르렀다는 기사, 그리고 소자하와 태자하 유역 고구려 산성의 분포 양상을 보더라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한편, 당시 도성이었던 집안 지역은 외곽에 있는 노령산맥으로 인해 외부에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제한되어 있었다. 고구려는 왕도로의 진입이 가능한 주요 길목마다 협곡을 막고 관애(關隘)를 축조하였는데, 이처럼 도성 외곽의 교통로에 차단벽을 설치한 방식은 국내 도성이 유일하다.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아, 한 명이 관(關)을 지키면 만 명이 당할 수 없다”는 『삼국사기』 신대왕8년(172) 기사는 관애를 활용한 고구려 방어체계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고구려는 과거에 비해 넓어진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이 시기 주요 교통로에 축조한 성을 활용하여 지방통치를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치소로 활용된 성은 주로 포곡식산성이나 강안평지성으로, 혼하 유역의 고이산성, 소자하 유역의 오룡산성(五龍山城)과 한대 토성이었던 영릉진고성(永陵鎭古城), 태자하 유역의 태자성(太子城) 등인데, 성에서는 모두 기와가 출토되었다. 이 밖에도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서안평(西安平)의 치소였던 애하첨고성(璦河尖古城)과 북쪽 길림 지역에서 집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화 자안산성에서도 고구려 기와가 출토되었다. 이상의 성은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각 지역의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어, 이 시기 고구려가 중앙집권화된 군사 및 지방 지배체제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3) 평양 도성과 방어체계
고구려는 장수왕 15년(427)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주서』 고려전에는 “치소는 평양성이다. 그 성은 동서가 6리이며 남쪽으로는 패수(浿水)에 닿아 있다. 성 내에는 오직 군량과 무기를 비축하여 두었다가, 적이 침입하면 모두 들어가 굳게 지킨다. 왕은 그 곁에 별도의 집을 지었는데, 항상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라는 기사가 전한다. 이 기록은 그간 고구려의 도성제가 평지성과 방어용 산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주요 근거로 이용되었는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 중 기까지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고고학적인 조사 결과가 확인 되지 않으므로 재고되어야 한다(양시은, 2021a).
그림4 평양 지역 고구려 왕성유적 분포도(朝鮮總督府, 1929)
평양 천도 당시의 평양성으로는 대성산성, 청암동토성, 안학궁이 거론되고 있다. 안학궁과 대성산성(채희국, 1964 등), 혹은 청암동토성과 대성산성(양시은, 2013 등)을 전기 평양성으로 보거나, 대성산성만을 전기 평양성으로 비정(기경량, 2017; 권순홍, 2019 등)하기도 한다.
우선 대성산성은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산(해발 274m)에 있는 6개의 봉우리와 그 능선에 성벽을 쌓은, 둘레가 7km에 달하는 대형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주작봉과 소문봉 사이 계곡에 위치한 남문이 정문이다. 성내에서는 기와 건물지 20여 동을 비롯한 고구려 건물지와 샘을 비롯한 집수시설이 다수 발견되었다(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73).
청암동토성은 반달모양의 평면형태를 띤 평지성으로 성벽의 전체 둘레는 3.5km이다. 1938년 왕궁지로 추정되던 토성의 중앙부를 발굴조사한 결과 팔각탑을 비롯한 1탑3금당식의 사찰 건물지가 발견되었다(小泉顯夫, 1940). 1990년대 후반에는 토성 내 서쪽 구역에서 길이 50m, 너비 20m 규모의 초석 건물지가 발견되었는데, 연화문, 원문 등의 다양한 문양을 표현한 채색벽화편과 금가루를 입힌 벽화편 등이 출토되었다(남일룡·김경찬, 1998: 2000).
이들 유적에서는 국내도읍기의 왕릉인 천추총(千秋塚)과 태왕릉에서 출토된 연화문와당과 유사한 양식의 와당이 출토되고 있어 대성산성과 청암동토성 모두 평양 천도 이전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에서 전기 평양성으로 판단하고 있는 안학궁은 평면형태가 마름모꼴에 가까운 방형 토성으로, 전체 둘레는 2.5km가량이다. 내부에는 남북 중심축을 중심으로 5개의 건축군이 분포하고 있는데, 각 건물지들은 회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전체 21기의 건물터와 31기의 회랑터가 발견되었으며, 그 외에도 정원과 연못, 우물 등이 확인되었다(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73).
안학궁의 축조 시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있는데, 특히 고구려 석실분을 파괴하고 궁성이 들어섰다는 점과 통일신라시대 이후로 편년되는 토기와 와당이 주를 이룬다는 점이 그러하다. 다나카 도시아키(田中俊明, 2005)나 박순발(2012)은 안학궁을 고려시대의 건축물로 판단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안학궁에서는 고구려시기의 유물도 발견되므로,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427년보다 늦은 시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양시은, 2013).
한편, 고구려의 도읍은 6세기 후반 장안성으로 천도하면서 기존의 도성 구조와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도시를 감싸는 외성이 조영되었고, 외성 내에는 도로를 기반으로 거주민을 통제하는 데 적합한 방리제(方里制)가 실시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양원왕 8년(552)에 장안성을 쌓기 시작하여, 평원왕 28년(586)에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장안성은 현 평양성으로, 그동안 발견된 각자성석(刻字城石)을 통해 552년 공사에 착수하여 566년에 내성을 쌓고, 586년 천도한 이후에 589년에 외성을 쌓았으며, 전체 완공은 착수 시점으로부터 42년이 지난 593년에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평양성은, 북쪽 구간은 모란봉과 을밀대, 만수대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고, 나머지 3면은 대동강과 그 지류인 보통강을 자연해자로 활용하면서 자연 절벽과 능선에 석축 성벽을 쌓았다(최희림, 1978). 성은 북성, 내성, 중성,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성벽 외곽의 전체 둘레는 16km, 안쪽 성벽까지 포함한 성벽의 총연장 길이는 23km이다. 산성과 평지성이 합쳐진 평산성 구조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존의 고구려 도성과 달리 주민의 거주지역이 포함된 도시를 방어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한편, 고구려는 광개토왕의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영토가 비약적으로 확장된 데다가 평양 천도로 도성의 위치가 바뀌면서, 평양도읍기에는 국내도읍기와는 다른 새로운 방어체계가 필요하게 되었다.
특히 수와 당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고구려는 서부 국경인 요하를 경계로 동쪽에 산성들을 축조하였다. 특히 요하의 평원지대가 천산산맥(千山山脈)과 만나는 중심 거점에 요동성과 같은 대형 평지성이나 고려성산성(高麗城山城, 청석령산성),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 탑산산성(塔山山城), 고이산성, 최진보산성(崔陣堡山城) 등 중대형 포곡식산성을 축조하여 적이 쉽게 요하를 넘어올 수 없게 하였다. 영류왕 대인 631년에 착수한 동북의 부여성(扶餘城)부터 서남쪽 바다에 이르기까지 천 리에 걸쳐 쌓았다는 천리장성(千里長城) 역시 중국의 위협을 막기 위한 고구려 국경 방어전략의 일환이었다.
고구려는 요동에서 압록강을 거쳐 평양으로 이어지는 주요 교통로에도 다수의 산성을 축조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국내도읍기에 구축한 기존 관방체계는 요동에서 집안을 향하는 교통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요하부터 압록강을 거쳐 평양으로 향하는 육상교통로와 산동반도에서 평양으로 향하는 해상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에 성을 축조하여 고구려의 방어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당시 서북방 국경 방어의 중심은 요양의 요동성이었고, 요동 일대 방어의 중심은 봉성의 봉황산산성이었다. 고구려의 지방관 중 가장 높은 등급인 욕살(褥薩)이 거주하였던 오골성(烏骨城)으로 비정되는 봉황산산성은 둘레가 16km나 되는 고구려의 최대급 산성이다.
고구려의 관방체계는 주요 거점성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운영되었는데, 이는 668년 당이 부여성을 공략하자 인근 40여 성이 항복했다는 기록이나, 645년 요동성을 구원하기 위해 신성과 국내성에서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보냈다는 기록, 648년 박작성(泊灼城)을 구원하기 위해 오골(烏骨)과 안지(安地)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 명이 모였다는 『삼국사기』기록 등을 통해서도 짐작해볼 수 있다.
한편, 요동에서 압록강을 지나 평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거나 내륙교통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고구려는 이들 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는 곳에도 중대형 산성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평양 도성의 외곽에도 산성을 축조하여 도성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고, 최종적인 방어는 평양 내 성곽을 활용하였다.
이와 같이 요하를 경계로 한 국경 방어와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향하는 요동의 모든 교통로에 성을 축조한 고구려의 방어체계는 수·당과의 전투에서 매우 효과적이었다. 산성은 적군이 쉽게 함락시키기 어렵고, 이를 지나쳐 가더라도 후미의 보급이 차단될 우려가 있어, 결국 성을 점령하지 않으면 사실상 진군이 불가능하다. 고구려의 산성은 지형적인 특성상 방어가 쉬운데, 특히 요동 지역에 있는 대형 산성은 계곡을 끼고 있어 수원 확보가 용이하므로 오랜 기간 항전할 수 있어 대군을 맞아 적은 병력으로도 효과적인 운용이 가능하였다. 고구려는 산성의 장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수·당과의 전쟁에서 이러한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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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성과 성곽 자료번호 : gt.d_0010_0030_004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