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분과 벽화
2. 고분과 벽화
고구려 고분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20세기 들어서이다. 1907년에 프랑스인 에두아르 샤반(Edouard Chavannes)은 국내성 일대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면서 집안 산연화총을 소개하여 고구려 벽화고분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유발한 바 있다. 또한 1910년에는 세키노 조사단이 평양 사동고분(寺洞古墳)을 발굴하면서 고구려 고분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주로 평양 일대의 고구려 고분이 발굴조사되었는데, 한왕묘(漢王墓, 경신리1호분), 강서삼묘, 간성리 연화총 및 매산리 사신총, 화상리의 대연화총과 성총, 용강대총(안성동 대총), 쌍영총 등이 있다. 당시 일본인들은 고구려 벽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발굴 후 벽화의 모사도를 작성하여 일본 내에서 전람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1916년 이후 세키노 조사단 등은 평양과 평안도, 황해도 일대, 그리고 집안 일대의 고구려 고분군을 조사하였으며, 당시 조사된 주요 벽화고분으로는 개마총, 호남리 사신총, 천왕지신총 등이 있다(양시은, 2010).
한편, 국내 도성 일대의 고구려 고분은 만주국 성립 이후에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케우치 히로시와 우메하라 스에지 등이 중심이 되어 도성 및 고분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1938년에 간행된 『통구』 보고서에는 국내성과 산성자산성, 광개토왕릉비, 장군총, 태왕릉, 천추총 및 오회분, 무용총, 각저총, 삼실총, 사신총, 모두루총과 환문총 등에 대한 조사 내용 및 사진, 도면 등이 기록되어 있어 현재까지도 고구려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광복 직후에는 주로 북한에서 고분에 대한 조사가 많이 이루어졌다. 1949년에는 황해도 안악고분군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안악3호분에서는 생생한 벽화와 함께 묵서가 발견되어 고구려 벽화고분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0년대에는 요동성총(1953년), 평양역전이실분(1954), 가장리벽화고분(1956), 약수리고분(1957~1958), 강서군 보림리·후산리·태성리 고분군(1958) 등이 조사되었다. 북한의 이러한 조사성과를 바탕으로 주영헌은 『고구려 벽화무덤의 편년에 관한 연구』(1961)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59년과 1960년에는 압록강과 독로강의 댐 건설과 관련한 구제발굴이 자성군 일대에서 실시되어 송암리, 조아리, 법동리 등에서 적석총이 대거 발굴되면서, 고구려 적석총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 되었다(정찬영, 1963).
이후 북한에서는 1962년에 평양 장산동고분, 1963년에 팔청리벽화고분, 복사리벽화고분, 전(傳)동명왕릉과 주변 고분군, 1971년에 수산리벽화고분, 1976년에 덕흥리고분, 지경동1호분 등 주요 벽화고분이 발굴되었다. 1987년에는 초산군 연무리고분군을 비롯한 자강도 일대의 고분이, 1988년에는 평양시 대성구역 안학동, 삼석구역 로산동 일대의 고분 20여 기와 동암리고분, 평정리고분, 월정리고분 등 벽화고분이 새롭게 발굴되었다. 1990년에는 자강도 운평리고분군과 평양의 고산동20호분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으며, 1991년에는 덕화리3호분, 1993년에는 룡흥리벽화고분, 1995년에는 평양 호남리 불당골고분과 승호구역 금옥리고분군이 발굴되었다. 이 밖에도 2000년 이후에는 영천리고분(2001)과 태성리3호분(2001), 송죽리고분(2002), 옥도리고분(2010) 등이 발굴되었다(최종택, 2015).
중국에서도 1950년대 후반부터 고구려 고분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는데, 환인 고력묘자고분군을 비롯하여 통화 강구촌(江口村) 및 동강촌(東江村) 고분군이 발굴되었다.
1962년부터는 집안 통구고분군(通溝古墳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오회분 4호분과 5호분, 통구12호분, 마선구1호분 등 주요 벽화고분에 대한 재조사 외에도 산성하332호분, 산성하983호분, 만보정1368호분 등이 새롭게 발굴되었다. 1968년에는 통구고분군에서 500여 기에 달하는 고분을 발굴하기도 하였다. 1970년에는 장천1호분, 1972년에는 만보정78호분, 우산하41호분 등을, 1975년에는 칠성산96호분, 1976년에는 우산하고분군 56기, 산성하고분군 37기, 칠성산고분군 26기, 마선구고분군 69기 등 모두 188기에 달하는 고분이 발굴되었다. 이 밖에도 1978년에는 집안 오도령구문고분, 1979년에는 전산자고분군 31기가 발굴되었다. 1981년에는 노호초고분군, 1983년에는 횡로9대고분, 고마령고분, 1984년에는 도로 건설을 위해 우산하고분군 113기가, 1985년에는 장천4호분 발굴과 절천정총에 대한 추가 조사가 이루어졌다. 1990년에는 장백 간구자고분군이, 1992년에는 환인 미창구장군총이, 그리고 1994년에는 우산하2112호분 등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다. 이러한 중국 측의 활발한 조사 및 연구 성과를 토대로 위존성은 『고구려 고고(高句麗考古)』(1994)를 간행하였는데, 해당 연구서는 중국에서 간행된 최초의 고구려 고고학 개설서로 학사적인 의미가 크다(강현숙 외, 2020).
한편, 중국에서는 1966년과 1970년, 1997년에 통구고분군에 대한 대대적인 측량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보고서인 『통구고묘군(洞溝古墓群)』(2002)은 지금도 통구고분군의 분포와 입지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2000년대를 전후해서는 고구려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한 발굴조사가 계획적으로 실시되었다. 특히 마선구2378호분, 산성하 전창36호분, 마선구626호분, 칠성산871호분, 임강총, 우산하2110호분, 칠성산211호분, 서대총, 우산하992호분, 마선구2100호분, 천추총, 태왕릉, 장군총 등 14기의 왕릉급 대형 적석총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고구려 무덤은 남한에서도 확인되는데, 임진강 유역의 연천 신답리고분, 강내리고분, 통현리고분을 비롯해 춘천, 화천, 홍천 등 북한강 유역, 용인, 성남, 화성, 판교, 신갈 등 내륙지역은 물론 남한강 상류의 충주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서 석실분이 조사되었다(최종택, 2015).
1) 적석총
적석총은 지상에 돌을 깔고 주검을 안치한 후 그 위에 다시 돌을 덮어 매장을 마감한 고구려의 특징적인 무덤 양식이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고구려조에는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무덤 둘레로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었다”고 하여, 주변 국가에서도 적석총을 고구려의 전통 묘제로 인식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적석총은 동으로는 중국 길림성 장백(長白), 서로는 중국 요령성 관전, 남으로는 북한 황해도 신원, 북으로는 혼강 유역의 환인과 통화에 이르는 넓은 범위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적석총은 보통 수 기에서 수백 기가 모여 군집을 이루고 있는데, 주로 강변 대지나 구릉 사면에 열 지어 분포한다.
적석총은 우선 분구의 축조방식에 따라 무기단(무단), 기단(방단), 계단(방단계제, 계대)으로 나누어볼 수 있으며, 주검이 안치되는 시설인 매장부는 매장방식에 따라 1명을 안치하고 1회로 매장이 마감되는 수혈식장법 구조인 석광(석곽)과 2명이 하나의 무덤방에 합장되는 횡혈식장법 구조(광실, 석실, 전실)로 대별된다. 분구와 매장부 구조를 조합해보면, 적석총은 무기단목곽(관)적석총, 무기단석실적석총, 기단목곽(관)적석총, 기단목실적석총, 기단석실적석총, 계단목실적석총, 계단(목개)석실적석총 등 7개 형식으로 구분이 가능하다(강현숙 외, 2020).
적석총은 기본적으로 높고 크게 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다. 분구는 무기단식에서 기단식으로 축조되면서 방형 평면으로 정형화되었고, 이후 계단식으로 발전하였다. 대형분의 경우에도 울타리를 두르듯이 쌓는 계장식(階墻式)에서 계단식으로 변화하였다. 또한 1명이 안치됨으로써 매장이 마감되는 수혈식장법에서 점차 2명 이상이 안치되는 횡혈식장법으로 변화하였다. 적석총의 변천 과정은 다음처럼 대략 세 단계를 거친 것으로 이해된다(양시은 외, 2021).
1단계는 고구려 적석총의 성립기로, 혼강과 압록강 중하류와 그 지류 유역에서 적석총이 축조되기 시작하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 3세기까지이다. 목관이나 목곽에 주검 1명이 안치되며, 분구는 무기단식과 기단식이다. 대형분은 계장식으로 축조된다.
이 시기는 가공하지 않은 돌로 쌓은 무기단적석총이 중심이 되는 단계와 기단적석총이 중심이 되는 단계로 세분이 가능하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는 무덤을 높고 크게 쌓기 위해 계장식무기단적석총이 등장하는데, 대표 사례로는 환인의 망강루 4호분과 6호분을 들 수 있다. 망강루고분군은 금제귀걸이를 비롯하여 부여에서 유행하던 물품 일부가 부장되어 관심을 받았는데, 주몽의 출자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부여의 전통 묘제는 토광목곽묘로 고구려의 적석총과는 차이가 있다.
기단적석총은 출현 시기를 특정하기가 쉽지 않지만, 대략 1세기경으로 본다. 이 시기에는 무기단식, 계장식식, 기단 적석총이 병존하고 있다. 최상위 무덤은 계장식 무기단적석총으로, 집안의 마선구2378호분, 마선구626호분, 칠성산871호분 등은 2~3세기대 고구려 왕릉급 무덤으로도 비정되기도 한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외, 2004c).
2단계는 적석총이 크게 유행하였던 성행기로, 계단식분구와 횡혈식장법의 매장부가 특징이다. 석재 가공 및 축조 기술의 발전에 따라 높고 큰 규모의 계단석실적석총 축조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최상위 무덤의 구조 변화에 따라 다시 두 시기로 세분이 가능하다.
2-1 단계는 3세기 말부터 4세기 전반까지로, 기술의 발전에 따라 계장식분구는 방형 평면의 계단상분구로 변화하였다. 매장부는 목실과 목개석실이 병존하며, 최상위 무덤은 계단목실적석총이다. 3세기 말로 비정되는 임강총(臨江塚), 4세기 초로 비정되는 서대총(西大塚), 4세기 전반으로 비정되는 우산하992호분 등이 대표적이다.
2-2 단계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대로, 횡혈식매장부에 봉토분구, 묘실벽화 등 새로운 요소가 더해지면서 여러 형태의 무덤이 병존하며, 중앙과 지방의 무덤 형식에도 차이를 보인다. 이 시기 최상위 무덤은 계단석실적석총으로, 천추총, 태왕릉, 장군총 등이 대표적이다.
3단계는 6세기 이후로 적석총의 쇠퇴기이다. 특히 국내도읍기 최상위 무덤 형식이었던 계단석실적석총이 더 이상 축조되지 않는다. 평양 지역에서도 6세기대의 적석총은 확인되지 않으며 압록강 중하류 유역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적석총은 더이상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무기단석실적석총의 경우 동실묘(洞室墓), 봉석묘(封石墓), 토석혼봉묘 형태로 고구려 멸망 이후까지도 지속된다.

그림5 고구려 적석총 - 1. 산성하고분군(ⓒ 최종택)

그림5 고구려 적석총 - 2. 장군총(ⓒ 양시은)
한편, 현존하는 적석총 중 가장 발전된 형식의 무덤은 집안 우산하고분군 중 가장 동북쪽에 위치한 장군총이다. 장군총은 한 변의 길이 30~31m, 높이 13m, 7층의 계단으로 조성된 계단석실적석총이다. 계단석은 잘 다듬은 화강암의 장대석을 이용하였으며, 가장자리에는 턱을 만들어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하였다. 각 변에는 3개의 대형 보호석(산수석)을 세워놓았다. 고분의 정상부는 백회를 섞은 흙으로 봉하였는데, 정상부 가장자리 계단석의 윗면에는 둥근 홈이 일정한 간격으로 파여 있어 무덤 위에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석실은 3층부터 기초를 마련하여 조성하였는데, 현실의 한 변은 5.5m 내외로 정방형이며, 높이는 5.1m이다. 평행고임을 한 다음 거대한 천장석 1매로 상부를 덮었다. 석실의 바닥에는 판석을 깔고 관대를 2개 놓았는데, 석실의 입구는 5층 계단에 있다.
적석총 주변에는 담장시설과 배총(陪塚), 제대(祭臺)로 추정되는 적석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장군총에서는 연화문와당을 비롯한 각종 기와와 금동제머리장식, 철제연결고리 등이, 배총에서는 연화문와당, 기와 및 각종 철기, 제대에서는 순금제귀걸이와 금동제 신발과 고리 등이 출토되었다.
한편, 문헌에 기록된 고구려왕의 이름(왕호)은 상당수가 왕이 죽은 뒤에 묻힌 곳의 이름을 따 지은 것이다. 실례로 고국천왕(故國川王). 동천왕(東川王). 서천왕(西川王). 미천왕(美川王) 등은 강변에 장지(葬地)를 정한 왕들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 무덤 중 왕릉이 확실한 것은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전돌이 출토된 태왕릉밖에 없는데, 피장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있다.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이었던 집안 지역에는 그 규모와 형태, 입지 등에서 다른 적석총에 비해 배타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는 초대형 적석총이 여러 기 분포해 있다. 이들 적석총은 한 변의 길이가 30~70m가량으로 같은 시기 다른 무덤과 비교하였을 때 규모 면에서 압도적이다. 그리고 개활한 곳에 독립된 묘역을 가지고 있고, 적석분구 위 상당한 범위에서 기와 혹은 와당이 출토되며, 능원의 담장시설이나, 제대 및 배장묘 등을 갖추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들 초대형 적석총을 국내도읍기의 왕릉으로 판단하고 있는데, 특히 ‘태왕릉’이라는 명문전돌과 ‘신묘년호대왕(辛卯年好大王)’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방울이 출토된 태왕릉은 광개토왕릉비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점에서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태왕릉을 집안 지역 왕릉의 기준으로 삼아 구조적으로 좀 더 발전된 장군총은 장수왕의 수릉(壽陵)으로 판단하였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외, 2004c; 張福有 외, 2007).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남녀가 결혼하면 곧 죽어서 입고 갈 옷을 준비한다”는 기사를 근거로 장수왕이 살아 있을 때 미리 자신의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고 본 것이다. 다만 장수왕은 평양 천도 이후 평양 지역에서 세상을 떠났으므로, 장군총은 실제 매장이 이루어지지 않은 허릉(虛陵)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수릉제의 적용 여부에 따라 왕릉의 주인공은 크게 달라지므로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으며, 해당 기사만을 가지고 고구려 왕릉에서 수릉제가 적용되었다고 보는 것은 그 근거가 부족하다(이희준, 2006). 『수서(隋書)』 고구려전에는 “사람이 죽으면 집 안에 안치하여 두었다가 3년이 지난 뒤에 좋은 날을 가려 장사를 지낸다”라는 빈장(殯葬)의 기록이 있고, 광개토왕릉비에도 갑인년(414) 9월에 산릉(山陵)으로 이장하고 비석을 세웠다고 하니, 왕의 사후에 왕릉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고구려 왕릉의 묘주 비정 문제는 수릉제를 가정하기보다는 일반적인 고고학 방법론을 이용하여 관련 자료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태왕릉의 묘주 비정과 관련하여 집안 모두루총(牟頭婁塚)에서 발견된 묵서명에는 고국원왕을 ‘국강상성태왕(國岡上聖太王)’으로 지칭하고 있어, 태왕이 광개토왕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청동호우에 새겨진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𦊆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 명문의 사례주 001에서와 마찬가지로 신묘년명 청동방울은 여러 정황상 광개토왕이 선왕이었던 고국양왕의 장례를 위해 391년에 만든 물품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태왕릉의 묘주는 광개토왕이 아닌 고국양왕일 가능성이 크며, 그 경우 장군총이 자연스럽게 광개토왕의 능이 된다.
표1 집안 지역 초대형 적석총 현황(임기환, 2009, 표2 수정)
| 고분명 | 입지 | 형식 | 규모(길이×너비×높이) |
| 마선구2378 | 높은 언덕 정상 낭떠러지 변 | 전원 후방형 계장 | 46×30×4m |
| 산성하전창36 | 높은 언덕 급경사지 | 전원 후방형 계장 | 28×37.7×4.5m |
| 마선구626 | 높은 언덕 경사지 | 전원 후방형 계장 | 41×48×?m |
| 칠성산871 | 산기슭 경사지 | 방형 계장 | 40×48×9.7m |
| 임강총 | 높은 언덕 정상 | 방형 계단 석곽 | 76×71×10m |
| 우산하2110 | 완만한 경사지 | 장방형 계단 석곽 | 66.5×45×5.5m |
| 칠성산211 | 산기슭 완만한 경사지 | 방형 계단 석곽 | 66×55×14.52m |
| 서대총 | 산기슭 경사지 | 계단 석곽 | 53.5×62.5×11m |
| 우산하992 | 완만한 경사지 | 계단 석곽 | 36×38×6.5m |
| 마선구2100 | 낮은 구릉 평탄지 | 계단 석곽 | 29.6×33×6m |
| 천추총 | 낮은 구릉 평탄지 | 계단 석실 | 63×63×11m |
| 태왕릉 | 낮은 구릉 평탄지 | 계단 석실 | 62×62×14m |
| 장군총 | 산기슭 구릉 평탄지 | 계단 석실 | 30.15×31.25×13.07m |
표1 집안 지역 초대형 적석총 현황(임기환, 2009, 표2 수정)
| 고분명 | 고분 구성 | 주요 시설 | |||||
| 매장부 | 호석 | 배장묘 | 제대 | 담장 | 포석층 | 건물지 | |
| 마선구2378 | ○ | ||||||
| 산성하전창36 | ○ | ||||||
| 마선구626 | ? | ○ | |||||
| 칠성산871 | ? | ○ | ○ | ||||
| 임강총 | 석곽 | ○ | |||||
| 우산하2110 | 석곽(2) | ○ | |||||
| 칠성산211 | 석곽 | ○ | |||||
| 서대총 | 석곽 | ○ | ○ | ○ | |||
| 우산하992 | 석곽 | ○ | ○ | ||||
| 마선구2100 | 석곽 | ○ | ? | ○ | ○ | ||
| 천추총 | 석실 가형 석곽 | ○ | ? | ○ | ○ | ○ | |
| 태왕릉 | 석실 가형 석곽 | ○ | ○ | ○ | ○ | ○ | |
| 장군총 | 석실 | ○ | ○ | ○ | ○ | ○ | ○ |
표1 집안 지역 초대형 적석총 현황(임기환, 2009, 표2 수정)
| 고분명 | 와당, 전 | 기와 | 금제 장식 | |||
| 권운문 | 연화문 | 전 | 명문 | 지두문 | ||
| 마선구2378 | ||||||
| 산성하전창36 | ||||||
| 마선구626 | ||||||
| 칠성산871 | ||||||
| 임강총 | ○ | |||||
| 우산하2110 | ||||||
| 칠성산211 | ○ | |||||
| 서대총 | ○ 329 | ○ (1) | ○ | ○ | ||
| 우산하992 | ○ 338 | ○ (1) | ○ | ○ | ○ | |
| 마선구2100 | ○ | ○ | ○ | |||
| 천추총 | ○ | ○ | ○ | ○ | ○ | ○ |
| 태왕릉 | ○ | ○ | ○ | ○ | ○ | |
| 장군총 | ○ | ○ | ||||
표2 고구려 왕릉의 비정(임기환, 2009, 표3 수정)
| 연구자 (연구소) | 마선구2378 | 산성하 전창36 | 마선구626 | 칠성산871 | 임강총 | 우산하2110 | 칠성산211 |
| 아즈마 우시오(東潮) | |||||||
|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2002) | 동천왕 | ||||||
|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2004) | 서천왕 | ||||||
| 여호규 | 동천왕 | ||||||
| 장복유 (張福有) | 차대왕 | 신대왕 | 대무신왕 | 태조왕 | 산상왕 | 고국천왕 | 서천왕 |
| 위존성 (魏存成) | 산상왕 | 동천왕 | 중천왕 | 서천왕 미천왕 | |||
| 임기환 | 산상왕 | 신대왕 고국천왕 | 동천왕 | 중천왕 | 서천왕 | ||
| 이희준 |
표2 고구려 왕릉의 비정(임기환, 2009, 표3 수정)
| 연구자 (연구소) | 서대총 | 우산하992 | 마선구2100 | 천추총 | 태왕릉 | 장군총 |
| 아즈마 우시오(東潮) | 미천왕 | 고국원왕 | 미천왕 2차 | 고국양왕 | 소수림왕 | 광개토왕 |
|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2002) | 서천왕 | 고국양왕 | 광개토왕 | 장수왕 | ||
|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2004) | 미천왕 | 고국원왕 | 소수림왕 | 고국양왕 | 광개토왕 | 장수왕 |
| 여호규 | 미천왕 | 고국원왕 | 고국양왕 | 광개토왕 | ||
| 장복유 (張福有) | 미천왕 | 고국원왕 | 봉상왕 | 소수림왕 | 광개토왕 | 장수왕 |
| 위존성 (魏存成) | 미천왕 | 고국원왕 | 소수림왕 | 고국양왕 | 광개토왕 | 장수왕 |
| 임기환 | 미천왕 | 고국원왕 | 소수림왕 | 고국양왕 | 광개토왕 | |
| 이희준 | 고국양왕 |
2) 석실봉토분
석실봉토분은 주검이 안치된 석실을 흙으로 덮고 쌓아 매장을 마감한 무덤이다. 석실의 문과 통로(연도)를 통하여 추가 매장이 가능한 횡혈식 구조이다. 고구려에서는 4세기 중엽에 처음 등장하였으며, 이후 고구려 후기의 대표 묘제로 자리매김하였다. 혼강과 압록강 중하류 및 그 지류에 집중 분포하고 있는 적석총과 달리 고구려 전 영역에 걸쳐 확인되는 관계로, 석실봉토분의 분포를 통해 확대된 고구려의 영역 추정이 가능하다(강현숙, 2013). 고구려에서 봉토분은 석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석실 도입 초기에는 벽돌로 무덤방을 축조한 전실(塼室)이나 벽돌과 함께 천장 부분을 돌로 축조한 전석혼축실이 드물게 발견되기도 한다.
석실봉토분 중에는 돌로 기단을 만든 후 석실을 조성하고 흙으로 봉분을 덮은 기단봉토분도 확인된다. 이러한 기단봉토분은 적석총의 기단 축조방식과 석실봉토분의 축조방식이 결합된 무덤 형식이다. 평양 지역에서 확인되는 대형 기단봉토석실분 중에는 평양 천도 이후 왕릉으로 추정되는 것들도 존재한다.
이 밖에도 석실봉토분 중에는 석실 내부에 그림을 그려 장식한 벽화분도 있다. 벽화가 그려진 석실은 벽화와 없는 석실에 비해 석실의 규모가 크고 구조도 복잡하며 천장 가구도 여러 가지가 함께 사용된다.
다만 고구려의 석실봉토분은 주로 벽화분을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된 관계로, 분량상 이 글에서도 고분벽화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3) 고분벽화
고분벽화는 중국 한대에 유행하였던 장의예술 중 하나로, 고구려에는 영역 확장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4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중국 동북 지방을 통해 도입되었다. 무덤방 내에 그림을 그리는 고분벽화는 벽화 자체의 예술적인 아름다움은 물론이고 문헌기록이나 고고자료로서 확인하기 힘든 당대의 생활상과 문화상을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인의 죽음과 내세에 대한 관념세계까지도 파악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석실봉토분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으나, 적석총 내 석실이나 전실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벽화분은 현재 중국의 환인과 집안, 그리고 북한의 평양과 안악 등에서 127기가 보고된 바 있다(전호태, 2020).
고구려 고분벽화의 주제로는 크게 생활풍속, 장식도안, 사신(四神)이 있으며, 벽면에 회를 바른 뒤 그림을 그리거나 잘 다듬은 돌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모두 확인된다. 고구려에서는 처음에 주인공의 삶을 묘사한 생활풍속을 주제로 한 벽화가 도입되어 한동안 유행하였으나, 점차 죽은 자의 세계를 지키는 신수(神獸)로서의 사신이 벽화의 전면을 차지하게 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의 전통적인 묘제는 적석총이었다. 4세기가 되면 고구려의 도성이었던 집안 지역에는 계단식적석총의 매장주체부가 석실로 변화하고, 석실봉토분이라는 새로운 묘제가 등장하였다. 집안 지역의 초기 벽화분으로는 만보정1368호분이 있는데, 벽면에 백회를 바른 후 기둥과 들보, 서까래 등을 그렸다. 이 무덤은 장방형 현실의 우편재 연도로, 벽에 비해 천장이 높다는 점에서 4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강현숙 외, 2020).
그런데 이보다 비슷하거나 조금 이른 시기에 고구려의 지방이었던 황해도와 평안남도 일원에서도 석실봉토분이 출현하고 있어 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지역은 고구려가 장악하기 전에는 낙랑군과 대방군의 영역이었던 관계로 중국 중원의 전통 묘제인 횡혈식장법의 전실묘(塼室墓)가 유행하였던 곳이다. 벽면에 적힌 묵서명으로 인해 무덤의 축조시기와 피장자의 내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안악3호분(357년 조성)과 덕흥리고분(408년 조성)은 황해도와 평양 일대에 축조된 이른 시기의 석실봉토분이자 벽화무덤이다.
묵서명에 따르면 안악3호분의 동수(冬壽)는 ‘유주 요동 평곽 도향 경상리(幽州遼東平郭都鄕敬上里)’ 출신으로, ‘사지절 도독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창려·현도·대방태수 도향후(使持節都督諸軍事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相昌黎玄菟帶方太守都鄕侯)’를 지냈는데, 영화(永和) 13년에 69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 내용으로 볼 때, 동수는 전연을 세운 모용황의 사마(司馬)로 336년에 고구려로 망명한 동수(佟壽)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정호섭, 2011).
한편, 안악3호분 주인공의 초상은 요양 상왕가촌(上王家村)의 서진대 벽화묘와 4세기대 초중반 사이로 편년되는 조양(朝陽) 원대자(袁台子)벽화묘의 초상과 많이 닮아 있다. 이들 주인공은 장막 내 평상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비단옷을 입고 관을 쓰고 있으며, 한 손에는 부채를 들고 있다는 점 등이 공통된다. 주변에 수발을 드는 시종들은 주인공보다 작게 그리고 측면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러한 주인공의 표현은 408년에 축조된 덕흥리고분과도 연결된다.
안악3호분은 회랑을 갖춘 석실봉토분인데,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에 있는 태성리3호분을 제외하면 고구려 석실봉토분에서는 이러한 회랑 구조를 찾아보기 어렵다. 회랑은 동한 말기 화상석 무덤에서 유행하였던 구조로, 요양 지역의 위·진시기 벽화묘에서도 발견된다.
이처럼 안악3호분의 피장자인 동수가 모용선비의 관리였고, 정치적인 이유로 고구려로 망명하여 과거 대방군의 영역이었던 황해도 일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면, 그가 거처하였던 요서 지역의 서진대 혹은 모용선비의 문화가 고구려로 자연스럽게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고구려의 수도가 아닌 변방이었던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 고구려의 전통 묘제인 적석총이 아니라 벽화로 장식된 석실봉토분이 새롭게 등장한 점, 낙랑군과 대방군이 멸망한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이 지역에 변형된 전실묘가 여전히 축조되고 있는 점, 그리고 당시 고구려가 중국의 유이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왔던 점 등은 고구려와 북중국 세력 간의 문화교류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석실분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무덤을 축조하거나 고분벽화라는 새로운 장의예술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장인이 있어야만 가능했을 것이므로, 망명 과정에서 장인집단도 함께 고구려로 이주해왔을 가능성이 크다(양시은, 2022).

그림6 안악3호분 - 1. 평면도(천장부)(동북아역사재단, 2009)

그림6 안악3호분 - 2. 전면 투시도(동북아역사재단, 2009)

그림6 안악3호분 - 3. 묘주 초상(동북아역사재단, 2009)
다만 고구려가 고분벽화라는 외래적인 문화요소를 수용하고 소화하는 방식은 선택적이며 제한적이었다. 벽화 도입 초기에는 전연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삶을 묘사한 생활풍속을 공통의 주제로 삼으면서도 위·진시기 요양 지역의 고분벽화에서 주요한 제재이던 연음백희(宴飮百戱) 장면이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생략되거나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무덤 주인의 위세를 보여주는 행렬도와 사냥도는 주요한 제재로 취급되었다(전호태, 2021).

그림7 고분벽화 비교 - 1. 요양 상왕가촌벽화묘(李慶發, 1959)

그림7 고분벽화 비교 - 2. 조양 원대자벽화묘(서울대학교박물관, 2001)

그림7 고분벽화 비교 - 3. 평양 덕흥리고분(동북아역사재단, 2009)
또한 인물의 복식이나 기물 벽화에는 고구려 실생활의 모습이 담겼다. 안악3호분 동쪽 측실 내부에 그려진 부엌의 부뚜막이나 쌓여 있는 접시, 우물가의 동이와 옹 등은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되는 실제 유물과 동일하다. 행렬도에 그려진 각종 무구나 중장기병의 모습 등도 마찬가지이며, 더욱이 무덤에 부장된 유물 역시 고구려의 것이다. 또한 천장부의 제재와 구성방식이 매우 다양하다는 점에서 해, 달, 별자리 위주의 비교적 단순한 구성의 삼연 벽화와도 차이를 보인다.
이처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벽화고분들이 지역에 따라 무덤의 축조방식이나 구조가 통일되지 않고 벽화의 제재에서도 차이가 발견된다는 점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의 도입 과정은 결코 단선적이거나 획일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분벽화라는 외래의 문화를 수용하는 방식 역시 도입의 매개가 된 모용선비와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도입된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이후 자체적인 발전을 겪었다. 고분의 구조와 벽화의 주제를 함께 고려해 볼 때, 세 단계에 걸친 변화를 상정해볼 수 있다(양시은, 2023a).
제1기는 고구려에 고분벽화가 도입되는 4세기경부터 5세기 초로, 고분의 구조가 아직 정형화되지 않은 시기이다. 방이 여러 개인 다실묘가 주를 이루며, 벽화의 중심 주제는 생활풍속이다. 이 시기의 고분벽화는 주로 벽면에 회칠을 한 다음 회가 마르기 전에 밑그림을 그리고 이어 채색을 하는 방식으로 그려진다. 벽화의 제작 도중에 안료가 백회에 스며들기 때문에, 안료의 산화와 퇴색이 덜하여 오랜 시일이 흘러도 처음의 명도와 채도가 유지된다.
생활풍속이 주제인 벽화는 무덤의 구조와 벽면 벽화의 내용에서 무덤 주인공의 생활모습을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무덤칸의 모서리와 벽면 윗부분에는 갈색안료로 기둥과 들보 등을 그려 넣어 무덤방을 마치 목조가옥의 내부처럼 꾸며 놓고, 벽면에는 무덤 주인공의 현실생활에서의 여러 장면을, 천장에는 하늘과 천상세계를 표현하였다. 일상생활의 여러 장면이 사실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당대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무덤 주인공의 초상화, 출행도(出行圖), 빈객도(賓客圖) 등과 같이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는 장면 외에도 부엌, 방앗간, 푸줏간 등과 같이 풍족한 삶을 볼 수 있는 부속건물의 모습, 무용이나 씨름, 사냥 등과 같이 여가생활의 장면이 잘 나타나 있다. 천장에는 해와 달, 별자리를 비롯하여 각종 선인과 길상동물을 그려 넣음으로써 이상적인 천상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제2기는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초에 해당하는 시기로, 무덤의 구조는 두칸과 단칸 형식이 혼재되어 있다. 여전히 회벽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지속되나, 회가 마른 다음 그림을 그리는 방식도 사용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제작된 벽화는 선명도가 매우 높지만, 빛과 공기, 습기 등에 장기간 노출되면 안료의 특정 성분이 산화되어 벽화가 변색되거나 탈색되기 쉽다.
5세기 중엽이 되면 고구려 고분벽화의 구조와 주제, 제재 구성 전반에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생활상을 재현한 것 외에도 상징성이 높은 장식무늬를 주제로 하거나 천문신앙을 바탕으로 성립한 사신(四神)을 주제로 삼은 것이 모두 발견된다. 즉, 생활풍속, 장식무늬, 사신을 중심 주제로 삼거나 여러 주제를 다양한 비중으로 혼합한 사례도 확인된다(전호태, 2021).
생활풍속과 천상세계 및 사신이 등장하는 집안 지역의 무용총(舞踊塚)을 비롯하여, 불교의 영향으로 연꽃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된 환인 지역의 미창구장군묘(米倉溝將軍墓), ‘왕(王)’자나 동심원무늬로 가득 찬 집안 왕자묘(王字墓)나 환문총(環文塚)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집안 지역의 삼실총(三室塚)이나 장천1호분에서 보이는 인물 묘사는 매우 세련된 수준에 도달해 있음이 확인된다. 장식무늬 가운데 구름무늬나 불꽃무늬는 점차 단순해지는 반면, 연꽃무늬와 인동당초무늬는 좀더 복잡하고 화려해진다. 사신과 상서로운 동물에 대한 묘사기법 또한 점차 세련되어진다.
제3기는 6세기 중엽부터 고구려 멸망기인 7세기 중엽까지이다. 죽은 자의 세계를 지키는 신수로서의 사신(청룡, 백호, 주작, 현무)이 벽화의 전면을 차지하게 된다. 고분벽화에서 유일한 제재로 등장하는 사신은 벽화의 기원지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만의 독특한 것이다.

그림8 고구려 고분벽화에 표현된 사신의 비교 - 1. 오회분4호분(동북아역사재단, 2009)

그림8 고구려 고분벽화에 표현된 사신의 비교 - 2. 강서대묘(동북아역사재단, 2009)
사신도가 그려진 고분벽화는 방형 현실과 중앙 연도, 평행삼각고임구조의 단칸무덤으로 정형화되며, 벽화는 대체로 석실의 벽면과 천장고임의 석면을 잘 다듬은 뒤 그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려진 벽화는 그림 속 사신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한 느낌을 주게 되며, 회벽 위에 그려진 벽화에 비해 비교적 오랫동안 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
이 시기 사신은 현실 벽면 전체를 장식하게 되는데, 평양 지역의 강서대총에서는 별다른 장식 없이 사신이 전면에 그려지지만, 집안 지역의 오회분 4호분과 5호분에서는 날아가는 구름, 연꽃, 화염 무늬 등이 사신의 배경으로 나타나면서 보다 화려해진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현실의 고임과 천장에는 여러 장식무늬, 해와 달, 별자리, 연꽃, 선인 및 황룡 등을 그려 넣어 하늘세계를 표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