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유물
3. 유물
1) 토기
고구려 토기는 기본적으로 모든 기종이 평저(平底)로 제작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호류와 옹류의 경우에는 목과 구연(口緣)이 발달하였고, 운반을 위한 용기류에는 대상파수(帶狀把手)가 부착된다는 점 역시 삼국의 다른 토기와 구분되는 특징이다. 고구려 토기의 전체 기종은 30여 개에 달한다. 관방유적과 생활유적에서는 거의 모든 기종이 출토되고 있으나, 무덤에는 구형호, 심발, 사이장경옹, 원통형삼족기, 부형토기, 시루, 완, 반, 호자 등이 부장되고 있어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중기 이후의 부장 토기 중에는 시유(施釉)된 것도 상당수이다(최종택 외, 2023).
고구려 토기의 발전 과정은 대체로 전기(3세기 이전), 중기(4~5세기), 후기(6세기 이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전기의 토기는 태토에 굵은 사립이 섞인 조질태토에, 회전대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직접 빚은 토기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 시기에 확인되는 기종으로는 심발, 장경호, 호, 동이, 시루, 접시, 합, 잔, 뚜껑 등이 있는데, 모두 평저를 기본으로 한다. 그리고 심발과 장경호, 호에는 파수가 부착되는 경우가 많다.
고구려 토기는 일반적으로 고구려가 발원한 혼강과 압록강 유역 일대에서 청동기시대부터 이어지는 토기 제작 전통 위에 전국 말~한대 회도(灰陶)의 영향이 가미되어 창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박순발, 1999). 구체적으로 토기의 표면을 마연하는 방식이나 대상파수의 부착 등은 청동기시대 이래의 전통이고, 니질태토와 회색토기 등의 속성은 새롭게 유입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림9 고구려 토기 기종 구성도(©국립문화재연구소)
그렇지만 고구려의 첫 번째 도성이었던 환인 오녀산성이나 망강루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에는 니질태토와 마연기법이 확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특징은 마성자(馬城子)동굴유적을 시작으로 요동 지역 전체에 널리 퍼진 청동기시대 토기에서 관찰되며, 초기철기시대나 고구려 초기의 토기는 가는 석립이 혼입된 태토로 제작되고 있어 재지적 전통의 계승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뿐만 아니라 철기문화의 도입과 함께 한반도에 전해진 니질화된 태토, 타날기법, 가마 사용 등과 같은 새로운 기술적 요소 역시 고구려 초기 토기에서 확인되지 않으므로 이 역시 직접적인 영향관계를 상정하기 어렵다(양시은, 2021b).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동기시대 후기에서 초기철기시대로 이어지는 토기의 일부 기형과 파수가 고구려 초기 토기에서 확인된다. 따라서 고구려 토기는 혼강과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집단이 청동기시대 후기의 토기 제작 전통을 일부 계승하고, 부여를 비롯한 외부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현재로는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다.
이처럼 이른 시기의 고구려 토기는 조질태토에 손으로 제작한 것이 일반적이지만, 4세기 이후가 되면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운 점토질의 니질태토, 회전대(돌림판)를 사용한 성형기법, 평저 기형, 횡위(橫位) 대상파수, 일부 기종의 시유, 특정한 문양의 시문과 암문(暗文) 기법 등이 나타나게 된다.
고구려 중기부터는 거의 모든 기종이 등장하게 되는데, 옹과 직구옹 등과 같은 대형 토기는 중기 후반에, 광구호와 대부완은 후기에 나타난다. 동체부는 테쌓기와 함께 회전대를 보조적으로 이용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양시은, 2003). 5세기대 중후반 남한의 고구려 유적 출토품을 제외하고는 토기 겉면에서 타날(打捺) 흔적이 관찰되지 않는데, 고구려의 일반적인 토기 제작 과정에 본격적인 타날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양시은, 2014b).
한편, 표면을 마연하는 기법은 고구려 토기의 특징적인 요소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토기 전체를 마연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고구려 중기 이후 태토가 니질화되다 보니 기벽을 정면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부분적인 마연 효과가 나타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토기에서 문양 시문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문양은 중기 이후부터 확인되는데, 기종 역시 매우 제한적이며, 종류도 단순하다. 주로 병이나 호의 어깨 부위에 중호문(重弧文)이나 파상문, 점열문 등이 횡침선대(橫沈線帶) 구획 안에 시문된다.
중기 이후에는 암문기법도 확인된다. 암문이란 토기의 표면을 단단한 도구로 문질러 시문하는, 일종의 마연기법에 의한 문양 장식을 말하는데, 종방향이나 횡방향의 암문 외에도 연속 고리문이나 격자문 등이 있다. 암문은 니질화된 태토로 제작된 토기에서만 관찰되지만, 호·옹·시루·동이 등 다양한 기종에서 폭넓게 확인된다. 암문은 고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시기를 달리하며 확인되는 매우 특징적인 시문기법으로, 흉노·삼연·북위·거란 토기를 비롯하여 고구려 토기의 영향을 받은 사비양식 백제 토기와 발해 토기에서도 발견된다.
이 밖에도 3세기 말, 늦어도 4세기 초에는 저화도 녹갈유가 시유된 토기가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시유토기는 그 출토량이 많지 않고 주로 고분에서 출토된다.
한편, 한강 유역 출토 고구려 토기를 통해 6세기를 전후하여 약간의 변화가 있음이 확인된다. 5세기대 토기는 구연부 끝이 둥글거나 직선으로 마무리되는 비중이 높은 반면, 6세기 이후의 토기는 아가리 끝을 밖으로 말아 접은 구연의 비중이 높아진다. 또한 5세기대 토기는 동체 상단부에 횡침선과 함께 점열문, 파상문, 중호문 등 문양이 새겨진 경우가 있지만, 6세기대에서는 문양이 시문된 토기를 찾아볼 수 없다.
남한의 5세기대 토기 중에는 동체부 성형 과정에서 점토띠의 접합을 위해 타날을 실시하고 회전대를 이용하여 물손질을 함으로써 표면의 타날 흔적을 지운 경우가 다수 발견된다. 다만 475년 백제 수도인 한성 점령 당시 고구려 군대가 본토에서 가져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몽촌토성 출토 토기와 6세기 전반 아차산보루군 출토 토기에서는 타날 흔적이 남아있는 토기가 거의 없다. 이처럼 남한에서만 확인되는 타날기법의 고구려 토기는 제작 과정에서 현지의 백제 장인이 참여한 결과로 추정된다.

그림10 한강 유역 출토 고구려 토기(©서울대학교박물관)
고구려 토기는 실용성이 강한 편으로, 동이와 같은 대형 토기는 조리용, 저장용, 운반용 등 다용도로 활용이 가능하다. 심발은 기벽에 그을음이 남아있거나 표면이 박락된 것이 많아 직접적으로 불에 닿는 조리용기로 추정된다. 시루 역시 그 형태적인 특징이 오늘날의 찜기와 같아 조리용기로 구분할 수 있다. 완, 대부완, 종지, 접시, 이배(耳杯), 구절판 등은 크기와 형태상 개인용 배식용기로 구분이 가능하다. 이들 토기는 아궁이 주변에서 주로 발견되어, 이곳에 간단한 형태의 부엌을 마련하여 비치해 두고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토기의 바닥이나 내면에는 다양한 부호가 새겨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 소성 후에 새겨졌다는 점에서 식별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대형 옹이나 직구옹은 토기의 용량으로 볼 때 저장용기로 구분이 가능하다(양시은, 2014b).
한편, 고구려 토기 중 완, 이배, 동이, 양이부호, 연통 등은 사비기 백제 토기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한강 유역에서 확인되는 통일신라시대의 토기 중 생활용기류는 고구려 토기의 기형을 그대로 가지고 있거나 일부 요소를 받아들이고 있어서, 고구려 토기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토기 제작 전통은 발해에 그대로 이어졌으며, 고려 및 조선의 생활용기에도 그 전통이 이어져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옹기의 원형이 되었다고 생각된다(최종택 외, 2023).
2) 기와
기와는 가옥의 지붕을 덮는 건축 부재로, 제작틀을 사용하여 양질의 점토를 재료로 일정한 모양을 만든 다음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 제작한다. 이런 기와를 지붕에 사용하면 내구성과 방화성 등에서 유리할 뿐만 아니라, 고대에는 건축물의 존엄성과 장엄성을 나타내며 위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게 된다(백종오, 2023).
이와 관련하여 『구당서』에는 고구려의 경우 “대부분 볏단으로 지붕을 얹었으나, 불교사원과 신묘, 왕궁, 관청 등은 기와를 사용하였다”라는 기사가 전하고 있어, 당시 기와건물이 권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기와건축물은 다량의 기와를 지붕에 올리기 때문에 막대한 하중을 견딜 수 있는 고도의 건축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량의 기와를 제작하기 위한 장인집단은 물론이고 이를 생산하고 유통할 수 있는 경제력도 요구된다.
한편, 집안 지역에서 출토된 기와에는 “조와소(造瓦所)”에서 만들었다는 기록과 “10곡의 주민이 만들었다(十谷民造)”는 등 명문이 확인되고 있어, 당시 기와를 만드는 관청과 관련 제도가 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또한 ‘관(官)’이나 ‘사(寺)’ 등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많이 출토되는 점으로 미루어 관청이나 사찰에 기와를 조달하는 수공업집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최종택, 2020).
고구려에서 기와가 처음 사용된 시점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지 않으나 집안 지역의 마선구2378호분에서 기와가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늦어도 1세기경에는 기와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나(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외, 2004c), 후대의 수즙(修葺) 등을 고려하면 확언하기 어렵다. 현재 연대를 비정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기와로는 집안 국내성에서 발견된 태녕4년(太寧四年)명 권운문와당이 있다. 태녕은 중국 동진 명제(明帝)의 연호로, 이 유물은 326년에 해당한다.
고구려에서 발견되는 기와는 기본적으로 암키와와 수키와를 비롯하여, 수막새(와당), 마루수막새, 현월화, 착고, 배와, 치미, 기타 변형와 등이 있다(주홍규, 2021). 드림새에 문양이 장식되는 암막새는 고구려에서 확인되지 않지만, 집안 지역 출토 암키와류에는 지두문(指頭文) 등 단순한 문양을 암키와 끝부분에 반복적으로 장식한 것들이 초대형 적석총에서 발견된 바 있다.
평기와는 건물의 지붕 전체를 덮는 가장 기본적인 기와로, 서까래의 위를 덮는 반원형의 수키와와 그 사이를 덮는 장방형의 암키와가 있다. 수키와는 단의 유무에 따라 토수기와(무단식)와 미구기와(유단식)로 구분이 가능하다. 미구기와는 기와 하단부에 언강으로 불리는 턱을 만들고 미구를 달아 다른 기와와 겹쳐 쌓도록 만들었으며, 토수기와는 하단부의 지름이 상단의 지름보다 좁게 만들어 다른 기와와 겹쳐 쌓을 수 있도록 하였다(최종택, 2020). 임진강이나 한강 유역에서는 토수기와만 확인되는 데 비하여 서대총, 태왕릉, 임강총, 우산하2110호분, 서대총, 태왕릉 등 집안 지역의 고분에서는 토수기와와 미구기와가 모두 출토되었다. 경우에 따라 언강부와 미구 등부분에 빗물을 차단하는 절수홈이 있거나, 기와가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한 못구멍이 뚫려 있는 것도 발견된다(백종오, 2023).
평양 천도 이후 출토되는 기와류는 적갈색 계통이 많지만, 집안 지역 고분에서 출토되는 기와류는 대체로 회색 계통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고분에서 출토된 암키와는 승문과 무문이 주를 이루지만, 집안의 임강총과 칠성산211호분과 우산하992호분에서는 격자문이 타날된 기와도 소량 확인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초대형 적석총에서는 지두문으로 장식된 암키와도 발견된다.
남한 임진강 유역의 호로고루에서도 적갈색 계통의 기와류가 발견되었다. 태토에는 한강 유역 고구려 토기와 마찬가지로 산화철 성분의 붉은색 덩어리가 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암키와의 성형은 원형의 와통에 포목을 두르고 점토띠나 점토판 소지를 붙여 제작하였다. 와통은 좁은 각재를 둥글게 연결하여 만든 모골와통을 사용하였으며, 기와 등면에는 승문, 거치문, 횡선문, 격자문, 사격자문, 복합문 등을 타날하였다. 하단부 모서리를 잘라 귀접이를 한 경우도 상당수가 확인된다. 반면 수키와는 타날 후 문양을 지운 것이 주를 이룬다(심광주, 2005b).
고구려의 수막새는 와당면의 문양에 따라 크게는 권운문, 연화문, 인동문, 귀면문, 복합문 와당으로 구분할 수 있다. 권운문와당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4세기경에 출현한 것으로, 현재까지 발견된 와당 중에 출현 시점이 가장 빠르다. 이후에는 구획선(복선)이 있는 연화문와당이 4세기 후엽에 출현하였으며, 5세기 후반경부터는 연화문 계열의 수막새들이 본격적으로 제작된다(주홍규, 2021). 연화문와당은 고구려 와당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문양의 종류도 다양하다.

그림11 고구려 수막새
- 1. 권운문와당 2. 구획선(복선) 연화문와당 3. 복합 연화문와당
- 1. 권운문와당 2. 구획선(복선) 연화문와당 3. 복합 연화문와당
이 밖에도 집안 및 평양에서는 와당면 전체에 귀면을 시문한 귀면문와당도 발견되었다. 귀면문와당은 커다랗게 튀어나온 반구형의 두 눈과 코, 과장되게 표현한 입과 송곳니 등을 특징으로 한다.
고구려의 현월와는 중국의 전국시대나 한대의 반와당과는 달리 와당면과 수키와를 직각으로 접합하지 않고 비스듬하게 접합한 것이다. 평양 지역에서만 발견되었으며, 지붕이 연결되는 경사면에 사용한 특수 기와이다(주홍규, 2021). 지붕마루 중 추녀마루나 내림마루의 끝단에 사용되는 곱새기와는 집안 환도산성이나 평양 안학궁에서 출토되었다. 지붕마루 밑의 공간을 막는 착고는 집안의 우산하3319호분과 천추총, 그리고 남한의 연천 호로고루에서도 출토되었다. 용마루 좌우에 얹어 지붕을 장식하는 치미는 안학궁과 호로고루에서 출토되었다.
3) 무기와 무구
일반적으로 공격용 무기는 활(弓)과 화살, 쇠뇌(弩)와 같은 원거리 무기와 도(刀)·검(劍)·도끼(斧)·창(矛)·꺾창(戈)·극(戟)·낫(鎌) 등 근거리 무기, 그리고 성을 공격할 때 사용되는 충차와 포차, 사다리 같은 공성용 무기로 나뉜다. 방어용 무기로는 갑옷(甲)과 투구(冑) 및 방패와 같은 개인용 방어구 외에도 마름쇠, 노포(弩砲)와 포노(砲弩) 등과 같이 성을 지키기 위한 것들이 있다.
이들 중 공성용 무기와 방패는 아직까지 실물로 발견된 사례가 없지만, 고분벽화를 통해 보병이 착용하고 있는 방패에 대한 기본 형태는 파악이 가능하다. 벽화에 그려진 중장기병의 모습에서 말갑옷인 마갑(馬甲)과 투구인 마주(馬冑)의 사용도 확인된다.
활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원거리 무기로,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어렸을 때부터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실물자료로는 동리묘(佟利墓)로도 알려진 평양역전이실분에서 출토된 골제활부속구가 유일하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고구려에서는 ‘맥궁(貊弓)’이라고 하는 우수한 활이 생산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여러 활이 묘사되어 있는데, 길이 1m가 넘지 않는 단궁(短弓)이 기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단궁은 말 위에서 쏘기에 적합한 기마용 활로 알려져 있다.
화살은 화살촉과 화살대, 깃, 오늬 등으로 구성되지만, 유적에서는 철촉만 다수 확인된다. 철촉의 세부적인 형태는 매우 다양하지만, 대체적으로는 그 형태적 특징에 따라 넓은잎모양의 광엽형(廣葉形), 날이 직선인 도끼날형(斧形), 세 갈래 날개가 달린 삼익형(三翼形), 도끼날형 철촉에 비해 촉신이 좁고 긴 형태의 착두날형(鑿頭刃形), 단면이 마름모꼴인 능형(菱形), 오각형의 납작한 촉두와 단면 방형의 긴 촉신에 좁고 긴 슴베를 가진 뱀머리 형태의 사두형(蛇頭形) 등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이처럼 다양한 철촉의 형태는 기능적인 차이에 따른 것으로 이해되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한 장면에 다양한 철촉이 등장하거나, 유적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철촉이 함께 출토되기 때문이다(양시은, 2023b). 고구려 중기 이후에는 이른 시기에 주로 확인되는 광엽형 철촉 대신 그 이전보다 슴베의 길이가 길어진 세장한 형태의 철촉이 유행하게 된다(김보람, 2013).
쇠뇌는 방아쇠를 사용하여 화살을 발사하는 원거리 무기로, 보통의 활보다 사정거리가 길고 파괴력도 강하다. 쇠뇌는 기본적으로 보병의 병기인데, 강력한 쇠뇌로 무장한 보병부대는 기병이 보유한 활의 사정거리 밖에서 기병을 제압하여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쇠뇌의 보급은 기병의 장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어 투구와 갑옷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으며, 말에게도 철갑옷을 입힌 중무장기병의 탄생을 재촉하였다고 할 수 있다(김길식, 2005).
고구려의 쇠뇌는 아직까지 실물로 발견된 바 없다. 그렇지만 문헌기록에는 6세기 후반 고구려가 우수한 쇠뇌 제작에 힘을 기울였고, 이어 612년 수와의 전쟁 당시 성곽전투에서 이를 적극 사용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정동민, 2020).
근거리 무기인 고구려 도의 경우 고분벽화에는 모두 손잡이 끝부분에 둥근 고리가 있는 환두도(環頭刀)가 기본이지만, 실제 유적에서는 환두가 없는 도가 다수 발견된다. 일부에서는 이들 무환두 역시 원래는 고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나무자루가 달린 목병도였을 가능성도 제기된 바 있다(성정용, 2000). 삼국의 다른 국가와 달리 고구려의 환두도는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만 환인 고력묘자15호분, 집안 마선구1호분, 평양 병기창유적에서 세 갈래의 잎이 장식된 삼엽문(三葉文) 계통의 환두도가 출토된 바 있다.
전투용 도끼는 도구로 사용되는 보통의 철제도끼(鐵斧)와 마찬가지로 몸체 측면에 자루를 가로로 착장한 횡공부(橫銎斧)를 말한다. 투부(鬪斧)는 중장기병에 대항하기 위한 보병의 무기로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투부는 기본적으로 타격을 위주로 하는 근접무기로, 철제갑주에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 도끼가 무기로 사용되었음은 안악3호분이나 약수리고분의 벽화에서 확인이 가능하며, 환인 오녀산성이나 구의동보루를 비롯한 한강 유역의 아차산보루군에서도 실물자료가 출토된 바 있다. 이들 도끼는 한쪽에만 날이 있는 단인(單刃)의 횡공부와 양쪽에 날이 있는 양인부(兩刃斧)로 구분이 가능한데, 횡공부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 밖에도 날의 위치나 형태에 따라 상인부(上刃斧)와 월형부(月形斧)도 있다.
장병기를 대표하는 창은 목제자루에 철로 만든 창끝(鐵鉾)과 하단부에 끼우는 물미인 창고달(鐵鐏)을 착장하여 사용한다. 문헌에서는 창을 길이에 따라 기병용 장창인 삭(矟), 보병용 창인 모(矛), 단창인 연(鋋)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실제 고고자료는 목제자루 없이 철제로 된 창끝과 창고달만 잔존하고 있어 명확한 구분은 불가능하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창을 들고 있거나 창을 가지고 전투하는 장면이 많이 묘사되어 있어 창이 고구려군의 중요 무기였음을 알 수 있다. 벽화에서 창은 보병과 기병이 모두 소지하고 있어 병종에 상관없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보병이 소지하고 있는 창은 병사의 키보다 조금 긴 단창이고, 기병이 소지하고 있는 창은 길이가 훨씬 더 긴 장창이다.
창끝은 형태에 따라 유관직기형(有關直基形), 무관직기형(無關直基形), 유관연미형(有關燕尾形)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투겁과 창날 부분을 경계 짓는 관부(關部)의 형성 여부와 함께 끝부분의 형태를 가지고 구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관직기형이 유관연미형에 비해 먼저 출현하고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무관직기형은 출토 사례가 많지 않다.
이 밖에도 봉부의 형태에 따라 광봉형(廣鋒形)과 협봉형(狹鋒形)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광봉형은 고구려 전기에 주로 출토되고 있을 뿐이며, 고구려 중기 이후에는 대체로 협봉형이다. 봉부의 길이에 따라 장봉과 단봉으로 구분하기도 하나, 단봉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삼국시대의 갑옷은 기본적으로 비늘갑옷인 찰갑(札甲)과 철제판을 이어 붙여 만든 판갑(板甲)으로 구분되지만, 고구려에서는 작은 철편을 이어 붙여 활동성과 방어력을 높인 찰갑을 기본으로 한다. 고구려 찰갑의 완전한 형태는 연천 무등리2보루를 제외하면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평안남도의 덕흥리고분, 약수리고분, 감신총, 평양의 개마총, 그리고 중국 집안의 통구12호분, 삼실총 등과 같은 고분벽화에서 갑주의 형태가 잘 묘사되어 있어 참고가 된다.
갑옷과 함께 세트를 이루는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구이다. 가늘고 긴 철판을 횡으로 연결하여 만든 투구인 종장판주(縱長板冑)와 작은 철판을 이어 붙여 만든 소찰주(小札冑)가 대표적이다. 간혹 복발이 없는 채로 확인된 투구의 경우에는 정수리 부분에 유기질로 된 막음장치가 있었을 것이며, 이마가 닿는 투구 하단의 외연은 가죽으로 감쌌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투구가 확인된다. 안악 2호분과 3호분, 감신총(龕神塚)과 약수리고분 등에서는 종장판주가 묘사되어 있다. 집안 삼실총 2실 서벽의 무사나 통구12호분의 무사는 오각형이나 사각형의 작은 철판을 이어 붙여 만든 소찰주가 묘사되어 있다. 고분벽화에 그려진 투구 중에는 깃털로 장식을 하거나 뿔을 부착하여 장식한 것도 있다.
투구와 관련한 실물자료는 중국 환인 오녀산성과 무순 고이산성, 북한 롱오리산성, 남한의 구리 아차산4보루, 연천 무등리2보루, 양주 태봉산보루 등과 같은 관방유적에서 주로 발견되었다. 이 중 종장판주는 고이산성과 롱오리산성에서, 소찰주는 아차산4보루에서 확인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