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울릉도학술조사대 출발

016 1947년 제1차 울릉도 학술조사 계획서 1947. 8. | 35×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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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 1947년 제1차 울릉도 학술조사 계획서 1947. 8. | 35×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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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8월 조선산악회가 제1차로 파견한 울릉도학술조사대의 학술조사 계획서이다.
학술조사의 취지 및 조사대의 편성과 과제, 활동 계획 등이 담겨있다.
학술조사대는 울릉도 뿐만 아니라 독도도 조사했다.
학술조사의 취지 및 조사대의 편성과 과제, 활동 계획 등이 담겨있다.
학술조사대는 울릉도 뿐만 아니라 독도도 조사했다.

서울역을 떠나는 조사대 일행 1947. 8. 16. | 촬영 남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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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을 떠나는 조사대 일행 1947. 8. 16. | 촬영 남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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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학술조사대 출발”
조선산악회 주최의 울릉도학술조사대 일행 63명은 예정과 같이 1947년 8월 16일 오후 7시 서울발 열차로 내려가 대구에서 강연회를 열고, 18일 포항을 떠났다고 한다. 조사대원은 모두 각 분야의 권위자들을 망라하여 이번에 그 업적은 클 것이다. 또한 일행은 도민을 위하여 의료품과 위문품도 대량을 가지고 가는 바, 더욱 독도 문제가 주목을 끄는 이때에 조사대의 파견은 더 한층 의의가 있다 할 수 있다.
출전 : 자유신문, 2면 | 1947. 8. 20.

017 제1차 울릉도학술조사대 편성명부 | 1947. 8. | 40×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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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 제1차 울릉도학술조사대 편성명부 | 1947. 8. | 40×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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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산악회에서는 8월 17일 해안경비대 포항기지 부사령관의 요청으로 최종 명단을 제출하기까지 몇 차례에 걸쳐 조사대 편성 명부를 작성하였다. 그 명부들 중에 「서기 1947년 8월 울릉도학술조사대(편성 명부)」로 되어있는 자료에는 과도정부 독도조사단이란 표시는 없지만 독도조사단에 참가한 일부 사람들의 이름이 있다.
그 편성 명부의 총원은 67명이고, 제일 마지막에 4명의 이름이 따로 적혀있는데, 과도정부 독도 조사원들이다.
그 편성 명부의 총원은 67명이고, 제일 마지막에 4명의 이름이 따로 적혀있는데, 과도정부 독도 조사원들이다.
이름과 소속(직위)은 신석호(申奭鎬)(국사관 부관장), 이봉수(李鳳秀)(문교부 편수사), 이준(李遵)(외무처 일본과), 최창근(崔昌根)(상무부 공업국 전기과 기사)까지 4명이다. 그리고 이름이 없이 소속만 적혀 있는 부분도 있는데 그 소속은 ‘수산국 수산과’로 되어 있다.
외무처 일본과 이준에 대해서는 연필로 삭선을 긋고 대신 ‘추인봉(秋仁奉)’이라는 이름을 적었다.
외무처 일본과 이준에 대해서는 연필로 삭선을 긋고 대신 ‘추인봉(秋仁奉)’이라는 이름을 적었다.
과도정부 독도조사단의 4명 중 신석호, 이봉수는 변경이 없었지만, 외무처 일본과의 이준은 과장 추인봉으로 변경되었고, 수산국 수산과 공무원은 한기준(韓基俊)으로 정해졌다. 그리고 상무부 공업국의 최창근은 울릉도학술조사대의 학술반원으로 재배치되었다.
이러한 변화 과정 속에서 과도정부의 독도조사단 일행 4명이 정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 과정 속에서 과도정부의 독도조사단 일행 4명이 정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