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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자료집

4. 국민에게 조사결과를 보고하다

한국산악회자료집

4. 국민에게 조사결과를 보고하다

The Scientific Expedition Team’s Reported Research Result to the Citizens
039 통지문(울릉도학술조사대의 보고 및 전람회에 관한 상의의 건) | 1947. 9. 25. | 17×25
- 문서
1947년 제1차 울릉도학술조사대의 보고 및 전람회에 관한 상의를 위해 출석을 요청하는 통지문이다.
040 1947년도 회무사업개황(보고) | 1948 | 20×29
- 문서
040 1947년도 회무사업개황(보고) | 1948 | 20×29
- 문서
1947년 제1차 울릉도학술조사대의 귀환 보고 강연회와 보고전람회 등 울릉도·독도 조사 이후의 활동을 조선산악회 회원들에게 보고하는 문서이다.
제1차 울릉도학술조사보고 전람회가 열린 부산일보 앞 1947. 11.
- 독도·울릉도 산악회
제1차 울릉도학술조사보고 전람회가 열린 부산일보 앞 1947. 11.
- 독도·울릉도 산악회
울릉도학술조사 보고강연회가 열린 울릉도 우산중학교 1948. 1.
- 독도·울릉도 산악회
『서울신문』, 2면, 1947. 9. 9.
“울릉도조사대의 귀환 보고 강연회”
조선산악회에서 파견한 울릉도학술조사대는 지난번 많은 성과를 거두고 일행 62명주 001
각주 001)
1차 조사단의 인원은 63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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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사 귀경하였는데 금번 그 귀환보고 강연회를 오는 10일 오후 2시부터 시내 왜성대 국립과학박물관 강당에서 연다고 한다. 연제와 강사는 다음과 같다.
사회경제(홍종인), 언어(방종현), 지리(정홍헌), 고고(김원용), 동물(석주명), 농림(김용수), 지리(옥승식)주 002
각주 002)
지질(옥승식)의 오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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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학(조중삼)
 
『부산신문』, 2면, 1947. 11. 5.
“울릉도 보고전 서울서 개최”
조선산악회(朝鮮山岳會)의 울릉도학술조사보고 전람회가 오는 10일부터 18일까지 시내 동화(東和)백화점에서 열기로 되었는데 동 전람회에는 산악회 사진을 비롯하여 동물, 식물, 광물, 농림 관계 표본 등을 진열하리라 하며 석기시대 이래 고고학, 민속학 자료 조사 결과 등 각 반의 수확을 종합 진열하여 울릉도와 독도의 전모(全貌)를 보여주리라 하며 각 방면의 기대가 크다 한다. (서울발 합동)
 
동아일보, 2면 | 1952. 10. 11.
- 신문 스크랩
“울릉도 조사단 보고회 성황”
산악회 주최의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단’ 일행은 외군기의 뜻하지 않은 폭격으로 독도의 답사를 수행치 못하고 동해의 유일한 해상 기지인 울릉도만을 답사한 후 다대한 성과를 거두고 수일 전 귀환하였는데 지난 9일 하오 2시 부산시의회 의사당에서 회원을 비롯하여 일반 방청객이 다수 모인 가운데 지질, 생물, 고고, 역사, 측지, 지리, 수산, 의학 등 전반적인 학술적 관점을 중심으로 한 연제의 성대한 조사단 보고 강연회와 45매의 천연색 기록사진 영사가 있은 다음 뜻 깊은 보고회를 마치었다 한다.
 
한국산악회는 1954년 5월 6일 서울대 치대 강당에서 1953년 3차 울릉도·독도 학술조사에 관한 보고강연회를 개최했다.
독도 영유권 문제(홍종인), 독도의 측량과 지도(박병주), 역사상으로 본 독도(이숭녕), 울릉도와 독도의 인문(김광용), 지리학상으로 본 울릉도와 독도(이지호), 울릉도와 독도의 생물(임기홍), 독도 운행 문제(김정태) 등의 내용을 발표했으며, 이용민이 촬영하고 문공부가 제작한 문화영화 〈독도〉를 상영했다.
041 『사해(史海)』 창간호 | 조선사연구회 | 1948. 12. 12. | 14.8×20.9 | 독도박물관 소장
- 문서
041 『사해(史海)』 창간호 | 조선사연구회 | 1948. 12. 12. | 14.8×20.9 | 독도박물관 소장
- 문서
1947년 제1차 학술조사에 참가한 신석호는 이듬해 12월 12일 발행한 『사해』 창간호에 「독도의 소속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신석호는 이 논문에서 여러 가지 한국과 일본의 사료와 지리적 근거를 들어 독도가 우리 고유의 영토임을 입증했다. 신석호의 연구는 이후 현재까지 독도의 역사, 지리, 법적 연구의 이정표가 되었다.
송석하는 제1차 학술조사 후 ‘울릉도학술조사대장 송석하’라는 이름으로 울릉도·독도에 관한 기고문을 『국제보도』 제10권(1947. 12. 1.)에 한글과 영어로 게재했다. 한글 제목은 “고색 창연한 역사적 유적 울릉도를 찾어서”이고, 영어 제목은 “Oolnungdo, Historic Island of Korea”이다.
기고문은 내용상 울릉도와 독도,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먼저 울릉도의 위치, 역사, 산업 등에 대해 서술한 다음 독도에 관해서는 독도의 지리(위치, 현황), 삼봉도 탐사 등에 관해 기술하고 1947년 조사 때 삼형제굴바위를 ‘사자섬’이라 명명한 사실도 서술했다. 송석하는 독도의 명칭을 한글(한자)로 ‘독섬(獨島)’, 영어로는 ‘Toksum’으로 표기했다. 이 기고문의 영어 번역문은 독도에 관해 영어로 작성된 최초의 글로 파악된다.
042 송석하 육필 원고 ‘고색창연한 역사적 유적 울릉도를 찾아서’ 송석하 | a. 1947 | 17.2×24.3
- 문서
042 송석하 육필 원고 ‘고색창연한 역사적 유적 울릉도를 찾아서’ 송석하 | a. 1947 | 17.2×24.3
- 문서
042 송석하 육필 원고 ‘고색창연한 역사적 유적 울릉도를 찾아서’ 송석하 | a. 1947 | 17.2×24.3
- 문서
042 송석하 육필 원고 ‘고색창연한 역사적 유적 울릉도를 찾아서’ 송석하 | a. 1947 | 17.2×24.3
- 문서
조선산악회장 송석하가 1947년 제1차 울릉도학술조사를 다녀온 뒤 「국제보도」에 투고한 원고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다. 교정한 흔적이 있다.
042 송석하 육필 원고 ‘고색창연한 역사적 유적 울릉도를 찾아서’ 송석하 | b. 1947 | 15×22
- 문서
042 송석하 육필 원고 ‘고색창연한 역사적 유적 울릉도를 찾아서’ 송석하 | b. 1947 | 15×22
- 문서
042 송석하 육필 원고 ‘고색창연한 역사적 유적 울릉도를 찾아서’ 송석하 | b. 1947 | 15×22
- 문서
유적(遺跡) 울릉도(鬱陵島)를 찾어서!(1947. 12. 1.)
국제보도연맹(國際報道聯盟), 1945~1950,
『국제보도(Pictorial Korea)』 10권(올림픽특집) 3권 1호(신년호)
1948년 1월 서울 :International Publicity League of Korea
포항에서 수로(水路) 1백24해리 동쪽 바다 속에 세상에서 저버림을 받은 것 같은 울릉도가 역사상에 나타나기는 신라 지증왕 13년(AD 512)이며 지금으로부터 1430여 년 전이다. 그 후 고려 태조 13년(930) 때에는 토민(土民) 백길(白吉) 토두(土豆) 등이 방물(方物)을 받쳤으므로 정위(正位)와 정조(正朝)벼슬을 주었다. 또 의종 11년(AD 1159)에 명주감창(溟州監倉) 김유립(金柔立)을 보내어 본 결과 촌락 기타 7개소와 석불, 철종, 석탑 등은 있으나 주민이 살기에는 불편하다고 보고하였다. 그 후 조선 태종 17년(AD 1417)에는 안무사(安撫使) 김인우(金麟雨)가 울릉도에서 대죽(大竹), 수우피(水牛皮), 면자(綿子), 검박목(檢樸木) 등을 헌상하였다고 한다. 이들 역사적 기록은 동 섬 북서편 유적지역에서 출토하는 유물로 능히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세종지리지나 상식적으로 알녀진 큰대(大竹) 큰복숭아(大桃) 같은 것은 지금은 그림자조차 없고 다만 향나무가 옛날의 자취를 말하듯 절벽 위에 겨우 남아있을 따름이다. 울릉도의 사람 연기는 수차의 무인도 시대를 겪은 후 지금으로부터 64년 전에 개척민의 이주로부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렀는데 현존한 당시의 이주민은 겨우 한 사람이 사동(沙洞)이라는데 남아있을 따름이다. 이들의 이주 당시의 산물이든 목재는 그 후 남벌(濫伐)로 인하여 하나도 없고 전도(全島)에 있던 기이한 곽새와 바다의 특산 전복은 지금은 멸종에 가까워 이번 조사에도 발견 못했다.
울릉도에서 다시 동편으로 48해리를 가면 요즘 각광을 받은 독섬(獨島)이 있다. 동서 독섬으로 되어 서쪽 섬이 좀 커서 고도 157미터이며 서도는 분화구가 있으나 지금은 막혀서 그 하부에는 바다물이 들락날락한다. 두 섬의 사이에는 함몰한 잔해가 남아있어 이 잔해를 이번 조사대에서는 사자섬이라고 명명했다. 역사적으로 조선 성종 3년에서 12년(1472~1481)까지 10년간 이 섬의 문제가 비등하야 박종원(朴宗元)을 경차관(敬差官)으로 해서 우리나라 도잠자(逃潛者)를 찾으려고 한 일이 있으며 부령인(富寧人) 김한경(金漢京) 등이 가서도 도잠민(逃潛民)에 겁을 먹어 상륙 못하고 도형(圖形)만 그려왔다 한다. 소위 삼봉도(三峰島) 수람(搜覽) 문제이다. 현재 어민의 유일한 생명선적 산업은 오징어 어업이다. 7·8·9월의 석달 동안은 어민의 거의 전부인 남자는 석양만 되면 발동기선으로 바다에 나가 온 밤 동안 포획해서 아침 일찍 항구에 돌아온다. 이 바다의 혜택이 전도민 1만 5천의 생명을 이어준다.
 
043 ‘독섬(獨島)’ 육필 원고 | 송석하 추정 | 17.2×24.3
- 문서
1947년 제1차 학술조사 후 조선산악회장이자 울릉도학술조사대장 송석하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독도에 관한 원고이다.
이 원고의 내용은 『국제보도』에 기고한 독도 관련 한글 내용과 유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독도의 지리(위치, 현황)와 조선시대 삼봉도 탐사 등에 관해 기술되어 있다. ‘독섬(獨島)’라는 제목으로 시작한 첫 번째 페이지만 남아있고 전체 몇 페이지가 작성됐는지는 알 수 없다.
원고의 제목을 ‘독섬(獨島)’이라고 한 것은 민속학자였던 송석하가 1947년 1차 학술조사 당시 울릉도 주민들이 독도를 ‘독섬’이라고 부르고 한자로 ‘獨島’로 표기한 것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송석하는 조선시대 삼봉도 경차관 박종원의 파견이나 김한경의 삼봉도 탐사를 독도 탐사로 보면서 독도의 역사적 근거를 찾고자 했다.
독섬(獨島)
울릉도에서 동남으로 약 48해리에 있는 동서 2도(島)와 그에 부속된 점점한 조고만한 섬들로 되어있는 소군도이다.
  이 섬은 이조 성조 때 유민(流民)들이 잠투(潛投)하였다.
하야 국가에는 박종원을 경차관(敬差官)으로 보내고 또 함경도 부령인(富寧人) 김한경은 도형(圖形)을 그려온다. 하든 소위 삼봉도(三峯島) 수람(搜覽) 사건으로 유명하던 곳이다.
이 섬의 암석, 동물, 식물 등은 울릉도 (이하 유실됨)
 
044 울릉도와 독도 지질조사 개보 | 옥승식 | 1948 | 21×28.1 | 독도박물관 소장
- 문서
044 울릉도와 독도 지질조사 개보 | 옥승식 | 1948 | 21×28.1 | 독도박물관 소장
- 문서
국립중앙지질광물연구소 소속 옥승식은 제1차 학술조사를 마친 후 울릉도와 독도의 지질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옥승식은 독도의 화산활동에 대해 최초에는 현무암이 분출되었고, 그 후 조면암류가 분출하고 화산활동은 휴식한 것으로 추정했다.
1953. 10. 15. | 촬영 김한용
- 독도·울릉도 산악회
045 울릉도 생물지(부 독도식물목록) | 1956 | 18.5×25.5
- 문서
045 울릉도 생물지(부 독도식물목록) | 1956 | 18.5×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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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 울릉도 생물지(부 독도식물목록) | 1956 | 18.5×25.5
- 문서
045 울릉도 생물지(부 독도식물목록) | 1956 | 18.5×25.5
- 문서
045 울릉도 생물지(부 독도식물목록) | 1956 | 18.5×25.5
- 문서
045 울릉도 생물지(부 독도식물목록) | 1956 | 18.5×25.5
- 문서
045 울릉도 생물지(부 독도식물목록) | 1956 | 18.5×25.5
- 문서
045 울릉도 생물지(부 독도식물목록) | 1956 | 18.5×25.5
- 문서
045 울릉도 생물지(부 독도식물목록) | 1956 | 18.5×25.5
- 문서
045 울릉도 생물지(부 독도식물목록) | 1956 | 18.5×25.5
- 문서
학술조사단의 생물반이 채집하고 정리한 울릉도의 동·식물 목록과 독도의 식물 목록이다.

  • 각주 001)
    1차 조사단의 인원은 63명이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지질(옥승식)의 오기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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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국민에게 조사결과를 보고하다 자료번호 : iscac.d_0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