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남부동 패총
입지
1921~1922년에 하마다, 우메하라가 각각 조사하였고, 1964년에는 서울대학교, 1967년에는 국립박물관이 부분적인 발굴조사를 시행함.
유적개관
남부동 패총은 다른 지역의 패총과 달리 높은 구릉상에 있고, 퇴적층은 두껍게 발달되어 있음. 몇 차례 부분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지만 보고서가 출간되지 않아 정확한 성격 파악은 어려움. 두 개의 목탄층에 의해 구분되는 세 개의 문화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세 개의 문화층에서 나온 유물을 통해 살펴보면 양산 지역은 김해 구야국과 밀접한 교류를 하였다가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음. 현재 1/2 정도가 파괴되었으며, 위쪽의 경우 채소밭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아래에 있는 조개더미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음.
출토유물
* 김해식 적갈색찰문토기, 김해식 적갈색무문토기, 첨구, 골각기, 신라토기, 흑색마연토기, 유문토기, 철도자 자루, 방추차, 와질토기 등
참고문헌
「양산물금택지개발사업지구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양산시문화유적정밀지표조사보고」
「양산시문화유적정밀지표조사보고」
해설
경상남도 양산시 남부동 375번지에 위치하는 원삼국시대의 조개무지[패총(貝塚)]이다. 양산군은 해안에서는 멀리 떨어진 내륙지방이지만 낙동강과는 인접해 있으며, 양산 자체가 낙동강 계곡에 면한 산맥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서쪽과 남쪽으로 평야가 전개되지만 당시는 김해 유하리·서촌면 등에도 조개더미가 조영되었고, 양산조개더미도 옛 김해만에 면하였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제강점기인 1921~1922년에 하마다[浜田耕作]·우메하라[梅原末治]가 각각 조사하였고, 1964년에는 서울대학교, 1967년에는 국립박물관이 부분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나 보고서가 출간되지 않아 정확한 성격 파악은 어려운 실정이다. 다방동 조개무지에서 북동쪽으로 연결된 능선의 끝자락에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유실되어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양산읍성 남쪽으로 인접하여 남부패총이 알려져 있으며 유적의 성격은 다방동 패총과 유사하나, 입지적 특성이 다르다.
일제강점기인 1921~1922년에 하마다[浜田耕作]·우메하라[梅原末治]가 각각 조사하였고, 1964년에는 서울대학교, 1967년에는 국립박물관이 부분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나 보고서가 출간되지 않아 정확한 성격 파악은 어려운 실정이다. 다방동 조개무지에서 북동쪽으로 연결된 능선의 끝자락에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유실되어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양산읍성 남쪽으로 인접하여 남부패총이 알려져 있으며 유적의 성격은 다방동 패총과 유사하나, 입지적 특성이 다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