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않아도 될 죽음들
열악한 처우, 예견된 사고
낯선 환경과 위험한 작업장에서는 늘 사고가 잇따랐습니다. 높은 사고율과 사망률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얼마나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구타 등 폭력에 의한 사망은 ‘변사’로 위조되기도 했습니다.
일제 패망 직전 군수공장이 밀집한 곳마다 연합군의 비행기 공습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하루아침에 노무자 기숙사가 무너졌고, 방공호에 대피하지도 못한 채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국인이 얼마나 희생되었는지는 가늠하기조차 어렵습니다. 나가사키에서 원폭으로 죽거나 다친 한국인들 또한 대략 2만 명으로 추산할 뿐입니다.
8월 15일 해방은 맞았으나 징용자들은 스스로 고향에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살아 돌아오는 길 또한 목숨을 걸어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낯선 환경, 위험한 현장
1) 죽음에 노출된 하시마탄광 노동자
하시마는 육지탄광에 비해 채굴 조건이 더 나쁜 해저탄광이었고, 가스폭발의 위험도 컸습니다. 더운 갱내에서 염분이 섞인 갱내수를 비처럼 맞으며 일해야 했습니다. 석탄 증산 요구로 하루 12시간 노동에 시달린 한국인 징용노동자들은 질병에 시달렸고, 잦은 사고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하시마의 한국인이 죽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강제동원 때문입니다.

질병사: 폐렴과 천식 등 호흡기 질환 _ 식량부족으로 인한 영양실조, 비위생적인 생활환경과 노동환경이 원인이다.
변사 : 외상, 탄광사고 _ 갱내 가스폭발, 낙반사고가 원인이다. 그 밖에 구타 가혹행위에 의한 사망 가능성도 있다.
매몰사 : 압사, 질식 _ 탄광에서 발생하는 매몰사고가 원인이다.
외상 : 타박상, 골절, 장기 손상_ 맞음, 부딪힘, 끼임, 떨어짐 등의 사고가 원인이다. 두개골골절, 장기파열 등 심각한 부상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기타원인 : 익사, 심장마비, 자살, 공습으로 인한 화상 _ 익사는 갱내 사고일 수도 있으나 탈출을 시도하다 사망한 경우도 추정할 수 있다.
변사 : 외상, 탄광사고 _ 갱내 가스폭발, 낙반사고가 원인이다. 그 밖에 구타 가혹행위에 의한 사망 가능성도 있다.
매몰사 : 압사, 질식 _ 탄광에서 발생하는 매몰사고가 원인이다.
외상 : 타박상, 골절, 장기 손상_ 맞음, 부딪힘, 끼임, 떨어짐 등의 사고가 원인이다. 두개골골절, 장기파열 등 심각한 부상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기타원인 : 익사, 심장마비, 자살, 공습으로 인한 화상 _ 익사는 갱내 사고일 수도 있으나 탈출을 시도하다 사망한 경우도 추정할 수 있다.
2) 나카노시마, 무인도에 설치한 화장장
하시마에서 사망한 사람은 하시마 북동쪽 400m 거리에 있는 나카노시마에서 화장했습니다. 하시마 면적이 워낙 좁았고 화장을 할 때 연기가 자욱해 가까운 무인도인 나카노시마에 화장장과 묘지를 따로 두었습니다. 그 정도로 사망사고가 많이 발생했습니다.
3) 슬픈목소리- 절규인가, 오열인가?
1930년 즈음 하시마로 이주한 야마구치 쓰요지 씨(78세) 가족

“패전이 다가오고 남성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중국인 포로[실제로는 대부분 납치당한 농민들]와 조선인이 대거 끌려왔다. 그들은 일본인 갱부가 사는 곳에서 떨어진 곳에 수용되었다. 좁은 섬에서의 일이다. 지금도 기요 씨(쓰요지 씨의 처)의 귓가에는 그 사람들의 부르짖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슬픈 목소리가 맴돈다. 딱 한 번 그 목소리가 들리는 방을 엿본 적 있었다. 스무 살도 채 안 돼 보이는 젊은 조선인 남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고, 그 무릎 위에는 큰 돌이 얹혀 있었다.
패전 직후 그 사람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들을 끝까지 괴롭히던 회사의 외근계(外勤係, 탄광의 사설 경찰)는 패전 소식을 듣자마자 보복이 두려워 재빨리 몸을 숨겼다고 한다.”
출처: 「아, 군함도 – 어느 노동자의 전직(轉職)」, 『아사히저널(朝日ジャーナル)』, 1975.5.17
패전 직후 그 사람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들을 끝까지 괴롭히던 회사의 외근계(外勤係, 탄광의 사설 경찰)는 패전 소식을 듣자마자 보복이 두려워 재빨리 몸을 숨겼다고 한다.”
출처: 「아, 군함도 – 어느 노동자의 전직(轉職)」, 『아사히저널(朝日ジャーナル)』, 1975.5.17
4) 바다가 삼킨 도망자들
1939년 하시마에 건너가 외근계로 일한 고사코 마사유키 씨(56세) 증언

“중국인, 조선인은 평소 차별을 받았다. 자급용 소나 염소를 잡아도 머리나 뼈밖에 안 줬다. 전쟁 중 탄광의 혹독함이란 군대와 비교도 안 된다. 헤엄쳐서 도망가려다 바다에 빠져 죽는 이들이 1년에 4~5명 있었다. ‘외근’은 말하자면 탄광의 사설 경찰이었다. 말을 안 듣는 이들은 모두 외근 본부로 끌려갔다.”
“종전은 8월 15일 밤 8시인가 9시에 외근 본부에 전화로 알려졌다. 모두에게 알리면 안 된다면서. 우리가 홧김에 술을 마시고 있는데 다카시마에서 회사 배가 왔다. 중국인과 조선인 담당 직원을 그날 밤 중에 하시마에서 도피시켰다.”
「기록 군함도 – 종전을 알고 환성, 차별당한 조선ᐧ중국인」
출처: 『아사히신문(나가사키판)』 1973.10.25.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오카마사하루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제공
“종전은 8월 15일 밤 8시인가 9시에 외근 본부에 전화로 알려졌다. 모두에게 알리면 안 된다면서. 우리가 홧김에 술을 마시고 있는데 다카시마에서 회사 배가 왔다. 중국인과 조선인 담당 직원을 그날 밤 중에 하시마에서 도피시켰다.”
「기록 군함도 – 종전을 알고 환성, 차별당한 조선ᐧ중국인」
출처: 『아사히신문(나가사키판)』 1973.10.25.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오카마사하루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제공
미이케탄광에서 발생한 사망사고
탄광은 노동강도가 높고 사망률도 가장 높은 작업장입니다. 1939~1945년 일본에 끌려간 한국인의 약 40%가 탄광에 배치되었습니다. 미이케탄광에 강제동원된 한국인은 9,000명이 넘습니다. 미이케 탄광은 특히 수많은 한국인, 중국인, 연합군 포로가 강제동원 된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미이케탄광 사고 건수
하야시 에이다이 감수·책임편집 『전시외국인강제연행관계사료집Ⅳ』 명석서점1991

공습 피해, 원폭 피해
1) 야하타제철소와 미이케탄광 지역의 공습 피해
1944년 6월 16일 새벽, 야하타 지역 공습은 일본 본토를 공격한 최초의 공습이었습니다. 제철소 피해는 미미했지만, 기타규슈 5개 도시에서 129명이 사망했습니다. 1945년 8월 8일까지 야하타시는 네 차례 공습으로 가옥 5만 6천 여 채가 불탔고, 1,921명이 사망했습니다. 야하타제철소에 동원된 김규수는 공습 후 시체 탄 냄새를 맡으며 공장으로 출근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오무타 지역 공습은 1944년 11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이어졌습니다. 이곳은 미쓰이 재벌이 운영하는 미이케 탄광과 중요한 화학공업 지대이자, 일본 최대 석탄 항구인 미이케항이 있었기 때문에 미군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미이케탄광에 동원된 류기동은 탄광노동자들의 기숙사도 공습으로 파괴되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야하타 지역 공습 피해 분포도(八幡空襲)(일본 국립공문서관 소장)

오무타 지역 공습 피해 분포도(大牟田空襲)(일본 국립공문서관 소장)
2) 원폭피해자 10명 중 1명은 한국인
1931년~1945년까지 전쟁기간 동안 한국인이 히로시마에 11.8배, 나가사키시에 12.5배나 증가했습니다. 전쟁기간중 한국인의 증가는 강제동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원자 폭탄의 피해 또한 막심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폭 피해자 약70만 명 중 피해를 입은 한국인은 7만 명에 달합니다. 나가사키시의 경우 강제동원된 한국인 노동자 1만 300여 명을 포함하여 6만여 명의 한국인이 거주했는데 그 중 2만 명이 피해를 입은 것입니다. 나가사키조선소는 8월 9일 원자폭탄 공격 이전에 이미 8월 1일 발생한 공습으로 반파되거나 전소되었습니다.

나가사키 지역 공습과 원폭 피해 분포도(長崎空襲, 原爆)(일본 국립공문서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