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하타제철소
중국인 | 야하타제철소
1937년 일본이 중국 본토를 침략하자 중국은 항전을 결정하고 많은 중국인들이 항일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일본군과 전투에서 패한 중국인은 전쟁포로가 되었으나, ‘공출’, ‘모집’의 형식으로 계약한 노동자로 위장해서 일본으로 끌려갔습니다. 야하타제철소에 끌려온 량완구이梁万貴도 전쟁포로였습니다. 그는 함께 끌려온 중국 팔로군 출신 동료가 구타당하자 ‘전쟁포로를 학대하지 말라’며 항의했습니다. 전쟁포로에 대한 부당한 처우, 학대는 전시국제법이 규정하는 반인도적 범죄입니다.
[증언]중국인 지아솽시(賈双喜)| 1944년 후쿠오카(福岡) 후타세탄광(二瀬炭鑛)에 강제연행
지아솽시는 1944년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 후 중국 허베이성의 스자좡(石家莊) 남(南)병영에서 베이징 시위안(西苑) 병영을 거쳐 칭다오(青島)로 보내졌다가 다시 후쿠오카 후타세(二瀬)의 우루노(潤野)갱으로 끌려갔습니다. 후타세탄광은 야하타제철소가 직접 운영하는 탄광이었습니다.
그가 증언한 강제연행지에서의 생활은 비참했습니다. 약해진 체력이 회복되면 갱내로 들어가야 했고, 동작이 느리다는 이유로 일본인들에게 몽둥이로 맞기도 했습니다. 팔은 떨어지는 돌덩어리에 맞아 부러졌습니다. 우루노갱으로 끌려간 300명 중 40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출처: 『제2차 세계대전 일본 강제연행 중국노동자구술사(二戰擄日中國勞工口述史)2』, 斎魯書社, 2005
그가 증언한 강제연행지에서의 생활은 비참했습니다. 약해진 체력이 회복되면 갱내로 들어가야 했고, 동작이 느리다는 이유로 일본인들에게 몽둥이로 맞기도 했습니다. 팔은 떨어지는 돌덩어리에 맞아 부러졌습니다. 우루노갱으로 끌려간 300명 중 40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출처: 『제2차 세계대전 일본 강제연행 중국노동자구술사(二戰擄日中國勞工口述史)2』, 斎魯書社, 2005
[증언]중국인 량완구이(梁万貴) | 1944년 포로가 되어 9월 야하타제철소로 강제연행
량완구이는 산시성(山西省) 출신으로 1938년 14세에 항일군에 참가했습니다. 1944년 핑루(平魯)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다퉁(大同) 수용소에 수감되어 노동을 강요받았습니다. 이후 베이징 포로수용소로 보내졌고, 200명 규모의 대대에 편성됐습니다. 이후 탕구(塘沽)로 보내졌다가 1944년 9월 야하타제철소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제철소 항만에서 석탄, 광석, 철강 등을 실어 나르는 일을 했습니다. 1945년에는 도야마현 후시키伏木항으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석탄, 식염, 대두 등을 실어 날랐습니다. 중국 팔로군(八路軍) 동료가 일본 감독에게 구타를 당하자 ‘전쟁포로를 학대하지 말라’고 다 함께 항의하며 저지했습니다.
출처: 『일본군의 무기 아래 중국인 노동자4 - 재일본 중국인 노동자(日軍槍刺下的中國勞工4 中國勞工在日本)』, 新华出版社, 1995
출처: 『일본군의 무기 아래 중국인 노동자4 - 재일본 중국인 노동자(日軍槍刺下的中國勞工4 中國勞工在日本)』, 新华出版社, 1995
연합군 포로 | 후쿠오카 제3분소 수용소
1942.8 후쿠오카현 오무타시 개설
미국인, 인도네시아계 네덜란드인, 영국인, 포르투갈인 등 1,300명 이상이 연행되었습니다. 점령지에서 이미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고, 열악하고 위험한 이동과정에서 피폐해진 상태로 야하타제철소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식사량이 적고, 단백질‧지방이 부족해 영양실조로 여러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일본 패전 때까지 수용인원의 11.6%인 158명이 사망했습니다.
미국인, 인도네시아계 네덜란드인, 영국인, 포르투갈인 등 1,300명 이상이 연행되었습니다. 점령지에서 이미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고, 열악하고 위험한 이동과정에서 피폐해진 상태로 야하타제철소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식사량이 적고, 단백질‧지방이 부족해 영양실조로 여러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일본 패전 때까지 수용인원의 11.6%인 158명이 사망했습니다.

야하타제철소를 배경으로 찍은 연합군 포로(1945.9.15. 촬영)
- 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POW연구회 제공
- 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POW연구회 제공
[증언]연합군 포로 도널드.L.버소 | 1944년 7월 후쿠오카 후타세탄광으로 연행
미국인 도널드.L.버소는 필리핀 코레히도Corregidor 섬에서 포로가 된 후 가바나투안 수용소에서 시체를 매장하는 일을 했습니다. 1944년 7월, 그는 일본제철 후타세탄광으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군인처럼 훈련을 받고 뺨을 맞는 등 온갖 폭력에 시달리며 노동을 강요받았습니다. 현장 노동자 중에는 탄광 노동에서 벗어나려고 일부러 자기 팔을 부러뜨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후타세 탄광은 야하타제철소가 직접 운영하는 탄광이었습니다.
출처: 「미군 포로・가족과의교류회」에서의 증언
출처: 「미군 포로・가족과의교류회」에서의 증언
[증언]연합군 포로 찰리 웨이블 | 1942년 9월 후쿠오카 포로수용소에 연행, 야하타제철소에서 강제노동
미국인 찰리 웨이블은 1942년 9월 후쿠오카 포로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수용소에는 벼룩, 이, 빈대 등이 들끓어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식량과 의료품 부족으로 사망자 수는 계속 증가했습니다.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했고, 휴일은 한 달에 3일뿐이었습니다. 공습 후에는 대우가 더 나빠져서 여러 명의 포로들이 일하던 중에 사망했습니다.
출처: 「야하타제철소의 강제연행 강제노동에 대해서(八幡製鐵所における强制連行・强制勞動について)」, 『제10회 강제동원진상규명전국연구집회 보고(第10回强制動員眞相究明全國硏究集會報告集)』, 2017
출처: 「야하타제철소의 강제연행 강제노동에 대해서(八幡製鐵所における强制連行・强制勞動について)」, 『제10회 강제동원진상규명전국연구집회 보고(第10回强制動員眞相究明全國硏究集會報告集)』, 2017

나가사키조선소 사료관에 전시된 어뢰(출처: 2019 민족문제연구소 촬영)
- 오키나와에서 발견된 91식 어뢰이다. 설명문에는 ‘유일한 고속력·고고도의 투하에 대응한 강도·신뢰성이 있으며 명중률과 파괴력 모두 세계에서 으뜸가는 성능을 지니고 있다’고 쓰여 있다. 진주만 공격에도 사용되었다. 사료관에서는 함선 건조 능력이나 어뢰의 성능을 과시하고 있다. 전쟁의 희생자 추모나 무기생산에 대한 비판은 찾아 볼 수 없다.
- 오키나와에서 발견된 91식 어뢰이다. 설명문에는 ‘유일한 고속력·고고도의 투하에 대응한 강도·신뢰성이 있으며 명중률과 파괴력 모두 세계에서 으뜸가는 성능을 지니고 있다’고 쓰여 있다. 진주만 공격에도 사용되었다. 사료관에서는 함선 건조 능력이나 어뢰의 성능을 과시하고 있다. 전쟁의 희생자 추모나 무기생산에 대한 비판은 찾아 볼 수 없다.

이지스함을 만들고 있는 나가사키 조선소 제3도크(2003 촬영,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미쓰비시조선소 옛 목형장(2017 민족문제연구소 촬영)
- 현재 나가사키조선소 사료관으로 동력공작기계와 거대한 엔진, 터번의 실물, 사진 패널 등 약 900점을 전시하고 있다.
- 현재 나가사키조선소 사료관으로 동력공작기계와 거대한 엔진, 터번의 실물, 사진 패널 등 약 900점을 전시하고 있다.

후쿠오카 포로수용소 제3분소 건물에서 귀국을 기다리는 야하타제철소의 한국인들
-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POW연구회 제공
-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POW연구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