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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목소리들

다카시마탄광·하시마탄광

중국인 | 15세에서 53세까지 강제연행

다카시마탄광에 205명, 하시마탄광에 204명의 중국인이 강제연행되었습니다. 20대가 50.4%를 차지하고, 10대부터 30대까지를 포함하면 87%에 이릅니다. 다카시마탄광에서 중도귀국자를 2명을 제외한 총 407명 가운데 최연소는 15세(다카시마), 최고령은 53세(하시마)였습니다.
 
2007년 중국인 ‘강제연행’ ‘강제노동’을 인정한 나가사키지방법원 판결문
1. 원고들은 각자 납치․체포되어, 탕구(塘沽) 수용소를 거쳐 다카시마・하시마로 이송되었다.
2. 원고들은 자기의 의사와 달리 신체가 구속된 채로 일본으로 연행되었다.
3. 노동 현장에서는 폭력을 이용한 감독이 이루어졌고, 휴식이나 대화는 철저히 제한되었다,
또한 다수의 중국인에게 자주 폭력이 가해졌다.
4. 작업복 등은 지급되지 않았고, 갱내에서 훈도시 한 장으로 일한 자도 있었다.
5. 수많은 자가 부상을 입었고, 갱내에서 사망한 자도 복수로 존재한다.
출처: 나가사키중국인강제연행재판을지원하는모임
 
 
[증언]중국인 왕바이단(王白旦) | 1943년 일본군 포로가 되어 다카시마탄광에 연행
중국 팔로군 유격대에 참가했다가 1943년 8월 일본군에 붙잡혀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는 일본의 다카시마탄광으로 끌려가 트럭에 석탄을 싣는 일을 했습니다. 지쳐서 잠들었다가 감독에게 심하게 맞아 등뼈가 변형되었습니다. 그는 귤껍질을 주워 먹었다가 폭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나가사키의 중국인 강제연행(長崎の中國人强制連行)』, 나가사키중국인강제연행의진상을조사하는모임·나가사키중국인강제연행재판을지원하는모임, 2005
 
[증언]중국인 리칭윈(李慶雲) | 1943년 일본군 포로가 되어 하시마탄광에 연행
리칭윈은 허베이성 출신입니다. 1942년 중국 팔로군에 들어갔다가 1943년 11월 일본군에 붙잡혔습니다. 일본군은 마을을 급습해 집에 있는 물건을 빼앗고 불태웠습니다. 그는 고문을 받아 몇 번이고 기절했으며 감옥에서 탕구(塘沽) 수용소로 이송되었다가 하시마로 끌려갔습니다.
하시마에서는 허름한 목조 가옥에 수용되었는데, 방 하나에 40~50명을 몰아넣었습니다. 휴일도 없이 하루에 12시간 2교대로 일했으며, 대량의 석탄을 캐는 날에는 작업 시간이 더 길어졌습니다. 갱내에서 때로는 훈도시만 입거나 맨몸으로 일을 시켰습니다.
공복 상태에서 현기증이 나서, 석탄 싣는 작업이 늦어진 적이 있었는데, 감독이 뒤에서 몽둥이로 머리를 때렸습니다. 몸이 아파도 쉴 수 없었고 신체의 안전은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음식은 작은 그릇으로 한 그릇씩만 주었습니다. 병에 걸려도 치료를 못 받았고, 오히려 배식량을 줄였습니다. 두 명이 가스 누출 사고로 죽었을 때 일곱 명이 탄광장에게 교섭을 요구하며 파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일곱 명은 단단한 줄에 묶여 난타를 당했고 경찰에 연행되었는데 경찰관이 목 뒤를 칼로 베었습니다. 귀국 후엔 일본에 협력했다며 ‘대일협력자’로 손가락질 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출처: 『제2차 세계대전 일본 강제연행 중국노동자구술사(二戰擄日中國勞工口述史)2』, 社會評論社, 2005
나가사키재일조선인의인권을지키는모임 편 『(증보개정판)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軍艦島に耳を澄ませば)』, 社会評論社, 2016
 
[증언]중국인 리안솽인(連双印) | 1944년 일본군에 체포되어 다카시마 탄광으로 연행
리안솽인은 중국 푸쳉현(阜城縣) 출신입니다. 1944년 19세이던 일본군과 괴뢰군 경비대가 리안솽인을 포함해 한 무리의 사람들을 체포하였습니다. 한 사람씩 묶여 감시를 받으며 앤링(安陵)역에서 스좌장(石家荘) 강제수용소를 거쳐 그리고 탕구(塘沽)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15일 정도 지나 일본인이 이들을 석탄 실은 화물선에 밀어 넣었지만, 아무도 어디로 끌려가는지 몰랐습니다.
다카시마탄광의 중국인 기숙사는 주변에 높은 담이 둘러쳐져 있었고, 그 위 철조망에는 전기가 흐른다고 했습니다. 문지기가 있어 출입을 감시했고, 탄광에 갈 때나 화장실 갈 때도 감시를 받았습니다. 일할 때나 휴식을 취할 때도 서로 얘기할 수 없었고, 숙소에서조차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었습니다.
식사는 세끼 모두 작은 만두 2개와 미역국 한 그릇이 전부였습니다. 영양부족에 시달렸고, 몇 달 지나자 몸에 부종이 생겨 휴가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치료 대신 아픈 사람에게는 오히려 만두 한 개를 줄여서 주었습니다. 한 개라도 더 먹기 위해 병을 참아내며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 나눠준 옷이 다 헤져도 더 이상의 의복 지급은 없었고, 나중에는 거의 벌거벗은 채로 지냈습니다. 갱에서는 훈도시만 두른 채 작업했습니다.
일할 때 휴식은 전혀 없었고, 일본인 감독에게 매를 맞았지만 왜 맞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2교대제로 하루 12시간씩 일했는데, 아픈 사람이 늘자 부족한 채탄량을 채우기 위해 14시간씩 일하게 되었습니다. 낙반사고로 죽을 뻔 했지만 동료들이 발견해 살 수 있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10여 일이 지나도록 일본의 패전 소식을 몰랐고, 일본인은 노예노동을 계속 시켰습니다. 일본에 끌려가서 일한 동안 한 푼의 임금도 받지 못했습니다.
출처: 「리안솽인진술녹취서(連双印陳述録取書)」, 나가사키중국인강제연행재판을지원하는모임
 
하시마탄광 중국인 수용소 터(2018 민족문제연구소 촬영)
- 한국인과 분리 관리하기 위해 섬의 반대편에 위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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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시마탄광·하시마탄광 자료번호 : isfv.d_0002_004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