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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남조와 당군이 대치함

  • 국가
    남조(南詔)
만이 조금씩 전진하여 외성에 이르렀다. 이때에 유혁사(游弈使)주 001
각주 001)
游弈使는 특별히 구체적인 직임이 부여된 것이 아니라, 일정지역에 단순한 순찰이나 제반 사정을 알아보고 상황에 따라 필요한 활동을 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資治通鑑』卷252 「唐紀」68 咸通 11年 春 正月 丁丑조에 따르면 유혁사 왕주는 興元, 資州, 簡州의 병력 3천여 명으로 毗橋에 주둔하였는데, 남조군의 선봉을 만나 전황이 불리하여 퇴각하여 漢州를 지켰다. 이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毗橋는 漢州의 남쪽 경계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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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주(王晝)가 원병 3천을 거느리고 비교(毗橋) 주 002
각주 002)
毗橋: 지금 四川 新都縣 남쪽 10리 毗河상에 위치하는데, 전통적으로 成都를 방어하는 요충이 되는 길목이었다. 西晉시기 李特이 이곳을 공격할 때도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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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진을 쳤다. 두방 또한 그 군대를 거느리고 도강(導江)으로부터 와서 장차 대군과 팽팽히 맞서려 하였다. 그러나 싸우는데 힘을 다하지 않았으며 조금 이기지 못할 듯 싶자 즉시 [후퇴하여] 광한(廣漢) 주 003
각주 003)
廣漢:『元和郡縣圖志』卷31 「劒南道」上 ‘漢州’조에 따르면 한주는 원래 廣漢郡의 雒縣으로 隋 開皇 3年(583) 廣漢郡이 혁파되면서 낙현은 益州 소속이 되었다. 당에서도 이를 그대로 계승하였는데 무후 垂拱 2年(686)에 기존의 익주에서 낙현을 다시 분리하여 한주에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隋書』卷29 「地理」上 雒縣조에 대한 본주에서 雒縣은 과거에는 廣漢이라 하였으며 여기에 廣漢郡을 두었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한 광한은 실제 광한군이나 광한현을 말한 것이 아니라 실은 수 이전 광한군의 故地에 설치된 낙주를 말한 것이다. 즉 낙주의 별칭으로 광한이란 지명을 사용한 것이다. 낙주는 오늘날 四川 廣漢市일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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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켰다. [두방은] 자기가 정변을 잃은 것 때문에 성도가 함락되기를 바랐는데, 자신의 죄를 가볍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주 004
각주 004)
『資治通鑑』卷252 「唐紀」68 咸通 11年 春 正月 丁丑조에 따르면 당시 성도성에서는 날마다 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방은 자신이 정변군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서천도 함께 점령당하여 패전의 책임을 나누어지기를 원했다. 그래서 원군이 북쪽에서 성도근처로 당도하면 그는 남조군은 관군의 수십 배나 되고 관군은 멀리서 와서 피로하니 섣불리 대적할 수 없다고 속여 원군이 더 이상 성도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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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조가 내려 강등당해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군에서 끝내 공을 세울 수 없었다.

  • 각주 001)
    游弈使는 특별히 구체적인 직임이 부여된 것이 아니라, 일정지역에 단순한 순찰이나 제반 사정을 알아보고 상황에 따라 필요한 활동을 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資治通鑑』卷252 「唐紀」68 咸通 11年 春 正月 丁丑조에 따르면 유혁사 왕주는 興元, 資州, 簡州의 병력 3천여 명으로 毗橋에 주둔하였는데, 남조군의 선봉을 만나 전황이 불리하여 퇴각하여 漢州를 지켰다. 이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毗橋는 漢州의 남쪽 경계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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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毗橋: 지금 四川 新都縣 남쪽 10리 毗河상에 위치하는데, 전통적으로 成都를 방어하는 요충이 되는 길목이었다. 西晉시기 李特이 이곳을 공격할 때도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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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廣漢:『元和郡縣圖志』卷31 「劒南道」上 ‘漢州’조에 따르면 한주는 원래 廣漢郡의 雒縣으로 隋 開皇 3年(583) 廣漢郡이 혁파되면서 낙현은 益州 소속이 되었다. 당에서도 이를 그대로 계승하였는데 무후 垂拱 2年(686)에 기존의 익주에서 낙현을 다시 분리하여 한주에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隋書』卷29 「地理」上 雒縣조에 대한 본주에서 雒縣은 과거에는 廣漢이라 하였으며 여기에 廣漢郡을 두었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한 광한은 실제 광한군이나 광한현을 말한 것이 아니라 실은 수 이전 광한군의 故地에 설치된 낙주를 말한 것이다. 즉 낙주의 별칭으로 광한이란 지명을 사용한 것이다. 낙주는 오늘날 四川 廣漢市일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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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資治通鑑』卷252 「唐紀」68 咸通 11年 春 正月 丁丑조에 따르면 당시 성도성에서는 날마다 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방은 자신이 정변군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서천도 함께 점령당하여 패전의 책임을 나누어지기를 원했다. 그래서 원군이 북쪽에서 성도근처로 당도하면 그는 남조군은 관군의 수십 배나 되고 관군은 멀리서 와서 피로하니 섣불리 대적할 수 없다고 속여 원군이 더 이상 성도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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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왕주(王晝), 두방, 두방
지명
비교(毗橋), 도강(導江), 광한(廣漢), 정변, 성도
오류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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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와 당군이 대치함 자료번호 : jo.k_0017_0222_0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