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와 당군이 대치함
만이 조금씩 전진하여 외성에 이르렀다. 이때에 유혁사(游弈使)주 001
왕주(王晝)가 원병 3천을 거느리고 비교(毗橋)
주 002에 진을 쳤다. 두방 또한 그 군대를 거느리고 도강(導江)으로부터 와서 장차 대군과 팽팽히 맞서려 하였다. 그러나 싸우는데 힘을 다하지 않았으며 조금 이기지 못할 듯 싶자 즉시 [후퇴하여] 광한(廣漢)
주 003
각주 003)

을 지켰다. [두방은] 자기가 정변을 잃은 것 때문에 성도가 함락되기를 바랐는데, 자신의 죄를 가볍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주 004마침 조가 내려 강등당해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군에서 끝내 공을 세울 수 없었다.廣漢:『元和郡縣圖志』卷31 「劒南道」上 ‘漢州’조에 따르면 한주는 원래 廣漢郡의 雒縣으로 隋 開皇 3年(583) 廣漢郡이 혁파되면서 낙현은 益州 소속이 되었다. 당에서도 이를 그대로 계승하였는데 무후 垂拱 2年(686)에 기존의 익주에서 낙현을 다시 분리하여 한주에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隋書』卷29 「地理」上 雒縣조에 대한 본주에서 雒縣은 과거에는 廣漢이라 하였으며 여기에 廣漢郡을 두었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한 광한은 실제 광한군이나 광한현을 말한 것이 아니라 실은 수 이전 광한군의 故地에 설치된 낙주를 말한 것이다. 즉 낙주의 별칭으로 광한이란 지명을 사용한 것이다. 낙주는 오늘날 四川 廣漢市일대에 해당한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廣漢:『元和郡縣圖志』卷31 「劒南道」上 ‘漢州’조에 따르면 한주는 원래 廣漢郡의 雒縣으로 隋 開皇 3年(583) 廣漢郡이 혁파되면서 낙현은 益州 소속이 되었다. 당에서도 이를 그대로 계승하였는데 무후 垂拱 2年(686)에 기존의 익주에서 낙현을 다시 분리하여 한주에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隋書』卷29 「地理」上 雒縣조에 대한 본주에서 雒縣은 과거에는 廣漢이라 하였으며 여기에 廣漢郡을 두었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한 광한은 실제 광한군이나 광한현을 말한 것이 아니라 실은 수 이전 광한군의 故地에 설치된 낙주를 말한 것이다. 즉 낙주의 별칭으로 광한이란 지명을 사용한 것이다. 낙주는 오늘날 四川 廣漢市일대에 해당한다.
- 각주 004)
색인어
- 이름
- 왕주(王晝), 두방, 두방
- 지명
- 비교(毗橋), 도강(導江), 광한(廣漢), 정변, 성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