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신사내빙기본(朝鮮信使來聘起本)
생각건대, 쇼군 가문주 010에 가키쓰(嘉吉, 1441~1443) 연간 신숙주(申叔舟)가 내빙(來聘)한 이후 그 일[조선인의 내빙]이 중단되었는데, 덴쇼(天正) 17년(1589) 을축(乙丑), 다이코(太閤) 도요토미(豊臣)주 010 군(君)이 사쓰마(薩州)를 정벌할 때 조주인(長壽院) 공(公)주 010·반쇼인(萬松院) 공주 010
각주 010)

이 동행하여 도요토미 군을 알현하기 위해 지쿠젠(筑前)주 010 하코자키(筥崎)주 010에 가셨을 때, “우리 나라가 백여 년 이래 난세로 인해 나라가 분리되었던 것을 무위(武威)로써 통일하셨으니 조선왕도 축사(祝詞)를 위해 우리 나라에 내조(來朝)하도록.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벌할 것이다”라는 도요토미 군의 분부가 있었다. 그래서 반쇼인 공이 소초로(蘇長老)주 010소 요시토시(宗義智, 1568~1615). 소 마사모리(宗將盛)의 넷째(혹은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1579년(혹은 1580년) 17대 당주 소 요시시게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계승했다. 1587년 은퇴했던 양부(養父) 요시시게가 당주로 복귀하여 요시토시는 가독을 요시시게에게 반납했는데 이것은 그해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1588년 요시시게 사후(死後) 다시 당주가 되어 임진왜란 시에는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번대(一番隊)에 소속되어 5,000명의 병력으로 최선봉에서 싸웠다. 히데요시 사망 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西軍)에 가담했으나 전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용서를 받고 소령(所領)을 안도받아 쓰시마(對馬) 후추번(府中藩)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요시토시는 1609년 조선과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는 데 성공, 이후 조선통교는 쓰시마번이 전담하게 되었다. 요시토시의 법호가 반쇼인(萬松院).
각주 010)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주 010쓰시마의 외교승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 1537~1611). 에이로쿠 연간(1558~1570)에 하카타 쇼후쿠지(聖福寺)의 주지가 되고, 교토 도후쿠지(東福寺)의 주지로 지내다가 1580년 쓰시마 도주 소 요시시게의 초대에 의해 쓰시마로 건너갔다. 암자 이테이안(以酊庵)을 창건해 그곳에 기거했으며,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제1군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휘하에서 참모의 신분으로 종군했다. 1604년 일본의 국정 탐색을 위해 쓰시마에 파견된 조선의 손문욱(孫文彧)과 유정(惟政)을, 이듬해 소 요시토시와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함께 교토로 데려가, 3월 후시미(伏見)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와의 접견이 성사되었다. 그 공을 인정하여 막부는 쓰시마 번주에게 조선관계를 담당할 것을 명했고, 규슈 히젠(肥前)의 기이(基肄), 야부(養父)군 내에 2,800석의 영지를 가증했으며, 에도 참부(參府)는 3년에 1번으로 한다는 특권을 부여했다. 그 2,800석 중에 1,000석을 혼다 마사즈미가 야나가와 도시나가(智永)에게 부여했다고 한다. 한편 겐소는 1607년 기유약조 체결에 공로가 있어 조선 조정으로부터 센스도서(仙巢圖書)를 받았다. 이에 의거하여 조선에 파견한 선박이 수도서선 ‘이테이안 송사(以酊庵送使)’이다.
각주 010)

와 함께 조선의 한성으로 갔다. 동평관(東平館)주 010에 머물며 국왕이 내조(來朝)하도록 전했지만, 그것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러면 우선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하라고 갖가지로 심력을 다하셨고, 얼마 지나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허성 (許筬)이 [일본에] 도해(渡海)했다. 그때 “수십만 명을 데리고 명나라를 치려 하니 조선왕은 선도(先導)하고, 수락하지 않는다면 먼저 조선을 칠 것”이라고 통신사에게 일렀으나 조선이 그 뜻에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분로쿠(文祿) 원년(1592) 임진(壬辰) 4월 재상 비젠노카미(備前守) 히데이에(秀家)주 010를 대장으로 삼고, 가토 가즈에노카미 기요마사(加藤主計頭淸正)와 고니시 셋쓰노카미 유키나가(小西攝津守行長)를 선봉으로 해서 도합 10여 만의 병사를 건너가게 했다. 조선 정벌이 시작되고 전후 7년간의 세월을 거쳐 무술년(1598) 중추(仲秋)에 이르러 도요토미 군이 뜻밖에 사망하자 도해한 다이묘(大名)들이 귀국하여 정벌은 중단되었지만 그때 이래로 [양국의] 통교(通交)는 중단되었다. 그러던 중 도쇼(東照) 군(君)주 010이 전부터 인호(隣好)를 맺고자 하여 그 내용을 반쇼인 공에게 분부하셨고, 게이초(慶長) 9년(1604) 갑진(甲辰)에 조선에서 송운대사(松雲大師) 유정(惟政)·첨지 손문욱(孫文彧)이 우리 나라로 건너와 화목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그 후 수교의 약조가 이전처럼 정해져 게이초 12년(1607) 정미(丁未) 여우길(呂祐吉)·경섬(慶暹)·정호관(丁好寬)이 통신사로서 도해했고 반쇼인 공이 이를 인도하여 도쇼 군을 알현했다. 그 후 오사카(大坂) 함락주 010을 축하하기 위해 겐나(元和) 3년(1617) 정사(丁巳)에 오윤겸(吳允謙)·박재(朴梓)·이경직(李景稷)이 건너와 요시나 리(義成) 공이 인도하여 다이토쿠(台德) 군(君)주 010을 알현했으며, 이어서 간에이(寬永) 원년(1624) 갑자(甲子)에 정립(鄭岦)·강홍중(姜弘重)·신계영(辛啓榮)이 건너왔다. 요시나리 공이 인도하여 다이유(大猷) 군(君)주 010을 알현했다. 이후 간에이 13년(1636) 병자(丙子) 통신사에 관한 일을 이 책에 기록한다.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 ?~1605). 시게오키의 조부. 별명은 시모쓰케노카미(下野守). 소씨 가문의 가신. 본래 로닌 출신이었으나 능력을 인정받아 발탁되었다. 규슈를 정벌하던 히데요시에게 항복의 사절로서 알현할 것을 지시받아 가로(家老)격으로 승진하여 교섭에 임했으며, 성공적으로 교섭을 성사시켰다. 임진왜란 시기에도 승려 게이테쓰 겐소와 함께 조선에 건너가 교섭했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국교 회복에 공헌한 바를 조선으로부터 인정받아 그가 죽은 뒤 향화(香火)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그의 위패를 모신 류호인(流芳院) 명의로 세견선 한 척을 파견할 권리가 부여되었다.
- 각주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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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요시토시(宗義智, 1568~1615). 소 마사모리(宗將盛)의 넷째(혹은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1579년(혹은 1580년) 17대 당주 소 요시시게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계승했다. 1587년 은퇴했던 양부(養父) 요시시게가 당주로 복귀하여 요시토시는 가독을 요시시게에게 반납했는데 이것은 그해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1588년 요시시게 사후(死後) 다시 당주가 되어 임진왜란 시에는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번대(一番隊)에 소속되어 5,000명의 병력으로 최선봉에서 싸웠다. 히데요시 사망 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西軍)에 가담했으나 전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용서를 받고 소령(所領)을 안도받아 쓰시마(對馬) 후추번(府中藩)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요시토시는 1609년 조선과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는 데 성공, 이후 조선통교는 쓰시마번이 전담하게 되었다. 요시토시의 법호가 반쇼인(萬松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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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의 외교승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 1537~1611). 에이로쿠 연간(1558~1570)에 하카타 쇼후쿠지(聖福寺)의 주지가 되고, 교토 도후쿠지(東福寺)의 주지로 지내다가 1580년 쓰시마 도주 소 요시시게의 초대에 의해 쓰시마로 건너갔다. 암자 이테이안(以酊庵)을 창건해 그곳에 기거했으며,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제1군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휘하에서 참모의 신분으로 종군했다. 1604년 일본의 국정 탐색을 위해 쓰시마에 파견된 조선의 손문욱(孫文彧)과 유정(惟政)을, 이듬해 소 요시토시와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함께 교토로 데려가, 3월 후시미(伏見)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와의 접견이 성사되었다. 그 공을 인정하여 막부는 쓰시마 번주에게 조선관계를 담당할 것을 명했고, 규슈 히젠(肥前)의 기이(基肄), 야부(養父)군 내에 2,800석의 영지를 가증했으며, 에도 참부(參府)는 3년에 1번으로 한다는 특권을 부여했다. 그 2,800석 중에 1,000석을 혼다 마사즈미가 야나가와 도시나가(智永)에게 부여했다고 한다. 한편 겐소는 1607년 기유약조 체결에 공로가 있어 조선 조정으로부터 센스도서(仙巢圖書)를 받았다. 이에 의거하여 조선에 파견한 선박이 수도서선 ‘이테이안 송사(以酊庵送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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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 ?~1605). 시게오키의 조부. 별명은 시모쓰케노카미(下野守). 소씨 가문의 가신. 본래 로닌 출신이었으나 능력을 인정받아 발탁되었다. 규슈를 정벌하던 히데요시에게 항복의 사절로서 알현할 것을 지시받아 가로(家老)격으로 승진하여 교섭에 임했으며, 성공적으로 교섭을 성사시켰다. 임진왜란 시기에도 승려 게이테쓰 겐소와 함께 조선에 건너가 교섭했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국교 회복에 공헌한 바를 조선으로부터 인정받아 그가 죽은 뒤 향화(香火)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그의 위패를 모신 류호인(流芳院) 명의로 세견선 한 척을 파견할 권리가 부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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