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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한일관계 사료집

고운인(光雲院)이 영지 반환에 대해 야나가와 시게오키에게 한 말

조선신사기록권일(朝鮮信使記錄卷一) 변무(辨誣)
一. 간에이 8년(1631) 신미(辛未) 2월 11일에 고운인(光雲院)주 020
각주 020)
쓰시마의 2대 번주 소 요시나리(宗義成)의 계명. 1604년 1월 15일 초대 번주 소 요시토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15년에 요시토시가 사망하자 상경하여 오고쇼(大御所) 도쿠가와 이에야스 및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알현한 뒤에 가독상속을 허락받고 번주가 되었다. 보다이지(菩提寺)인 반쇼인(萬松院)을 창건했고, 조선통신사의 접대 간소화에 따른 재정 절감, 은광산 개발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번정(藩政)의 기초를 다지는 일에 전념했다. 1635년 쓰시마번이 조선과의 통교 과정에서 국서(國書)를 개찬(改竄)한 사실이 막부에 폭로되어 영지 박탈(改易)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쇼군 이에미쓰가 직재(直裁)한 결과 가신인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처벌되고 요시나리는 번주의 지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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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후루카와 우마노스케(古川右馬助)·히라타 쇼겐(平田將監)을 통해 “어제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자신의] 영지 등을 모두 반환하겠다는 것이 어떠한 생각에서인지 아직 모르겠다. 지난번 1,000석의 영지에 대한 주인(朱印)주 020
각주 020)
근세 일본에서 주군이 가신에게 지급한 ‘토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는 문서에 주인(朱印)을 날인하는 데서 온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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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원했을 때 그것이 괘씸했지만 그것조차 다른 분들의 의견에 따라 그대로 허락했는데, 오늘에 이르러 어떤 격의가 있는 것인가? 그대는 조금도 격의를 두지 말라” 고 야나가와 시게오키주 020
각주 020)
시게오키의 별명이 부젠노카미(豊前守)이고, 줄여서 부젠이라고 한다. 야나가와 가문의 3대 당주이다. 주군인 소 요시나리와 관계가 악화되자 시게오키는 1605년 조선의 사절을 후시미(伏見)까지 데려온 공적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과거 쇼군 이에야스가 소 요시토시에게 하사한 규슈 히젠(肥前)의 영지 2,800석 중에서 1,000석이 부친 야나가와 도시나가(柳川智永)에게 분급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삼아, 스스로 소씨의 가신이 아니라 막부의 직신(直參旗本)처럼 행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급기야 1631년 양자는 서로를 막부에 고발하기에 이르렀고, 1635년 쇼군 이에미쓰가 친재한 결과 요시나리는 무죄, 시게오키는 쓰가루번에 유배 판결을 받았다. 그의 나이 33세 때이다. 쓰가루번으로 향하는 도중 시게오키는 삭발하고, 이름을 ‘소안(素庵)’으로 개명했다. 그런데 쓰가루에서 그의 유배생활은 죄인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잇켄 당시 시게오키의 지원 세력이었던 로주 사카이 다다카쓰, 도이 도시카쓰(土井利勝) 등의 특별한 배려에 힘입어, 무려 7명의 가신을 이끌고 쓰가루성 밑에 광대한 저택을 받아 생활했다. 초반에 있던 감시원도 곧 없어졌으며, 막부가 쓰가루씨에게 명한 분량보다 훨씬 많은 양의 쌀이 지급되었다. 번주 쓰가루씨도 시게오키의 재기(才氣)를 마음에 들어 했는지 때때로 번주 부자(夫子)가 시게오키의 저택을 방문하기도 하고, 시게오키가 번주의 성에 초대되어 함께 노(能)를 즐기기도 했다. 시게오키는 1684년 10월, 50년에 가까운 유배생활 끝에 82세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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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말하셨다.

  • 각주 020)
    쓰시마의 2대 번주 소 요시나리(宗義成)의 계명. 1604년 1월 15일 초대 번주 소 요시토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15년에 요시토시가 사망하자 상경하여 오고쇼(大御所) 도쿠가와 이에야스 및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알현한 뒤에 가독상속을 허락받고 번주가 되었다. 보다이지(菩提寺)인 반쇼인(萬松院)을 창건했고, 조선통신사의 접대 간소화에 따른 재정 절감, 은광산 개발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번정(藩政)의 기초를 다지는 일에 전념했다. 1635년 쓰시마번이 조선과의 통교 과정에서 국서(國書)를 개찬(改竄)한 사실이 막부에 폭로되어 영지 박탈(改易)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쇼군 이에미쓰가 직재(直裁)한 결과 가신인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처벌되고 요시나리는 번주의 지위를 유지했다. 바로가기
  • 각주 020)
    근세 일본에서 주군이 가신에게 지급한 ‘토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는 문서에 주인(朱印)을 날인하는 데서 온 표현. 바로가기
  • 각주 020)
    시게오키의 별명이 부젠노카미(豊前守)이고, 줄여서 부젠이라고 한다. 야나가와 가문의 3대 당주이다. 주군인 소 요시나리와 관계가 악화되자 시게오키는 1605년 조선의 사절을 후시미(伏見)까지 데려온 공적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과거 쇼군 이에야스가 소 요시토시에게 하사한 규슈 히젠(肥前)의 영지 2,800석 중에서 1,000석이 부친 야나가와 도시나가(柳川智永)에게 분급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삼아, 스스로 소씨의 가신이 아니라 막부의 직신(直參旗本)처럼 행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급기야 1631년 양자는 서로를 막부에 고발하기에 이르렀고, 1635년 쇼군 이에미쓰가 친재한 결과 요시나리는 무죄, 시게오키는 쓰가루번에 유배 판결을 받았다. 그의 나이 33세 때이다. 쓰가루번으로 향하는 도중 시게오키는 삭발하고, 이름을 ‘소안(素庵)’으로 개명했다. 그런데 쓰가루에서 그의 유배생활은 죄인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잇켄 당시 시게오키의 지원 세력이었던 로주 사카이 다다카쓰, 도이 도시카쓰(土井利勝) 등의 특별한 배려에 힘입어, 무려 7명의 가신을 이끌고 쓰가루성 밑에 광대한 저택을 받아 생활했다. 초반에 있던 감시원도 곧 없어졌으며, 막부가 쓰가루씨에게 명한 분량보다 훨씬 많은 양의 쌀이 지급되었다. 번주 쓰가루씨도 시게오키의 재기(才氣)를 마음에 들어 했는지 때때로 번주 부자(夫子)가 시게오키의 저택을 방문하기도 하고, 시게오키가 번주의 성에 초대되어 함께 노(能)를 즐기기도 했다. 시게오키는 1684년 10월, 50년에 가까운 유배생활 끝에 82세로 타계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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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인(光雲院)이 영지 반환에 대해 야나가와 시게오키에게 한 말 자료번호 : kn.k_0007_00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