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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한일관계 사료집

부젠(豊前) 사건에 대해 로주(老中)에게 보고와 쇼군의 뜻

一. 동 10년(1633) 계유(癸酉) 5월 5일, 도이 오이노카미(土井大炊頭)주 030
각주 030)
도이 도시카쓰. 당시 시모우사노쿠니(下總國) 고가번(古河藩)의 번주이자 막부의 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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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사카이 우타노카미(酒井雅樂頭)주 030
각주 030)
사카이 다다요(酒井忠世, 1572~1636). 당시 막부의 로주. 1605년 쇼군이 된 히데타다를 보좌하는 필두 도시요리(로주)가 되었고, 1607년 7월 슨푸성(駿府城)으로 옮겨 간 이에야스를 축하하여 우타노카미(雅樂頭)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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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께서 연서(連書)로 사카이 아와노카미(酒井阿波守)주 030
각주 030)
사카이 다다유키(酒井忠行). 로주 사카이 다다요의 아들. 1636년 가독을 상속하여 마에바시번(前橋藩) 15만 2,500석을 지배. 같은 해 37세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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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댁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날 로주(老中)주 030
각주 030)
로주란 쇼군 직속으로 정무를 총람했던 막부 최고직.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 중에서 10만 석 이하 2만 5,000석 이상의 조슈(城主)인 자 중에서 선임했다. 한 달씩 돌아가며 근무하면서 사무를 주재했다. 한편, 야나가와 사건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는 1633년부터 조선통신사행이 성사되는 1636년까지 막부 로주로 재직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괄호 안 연도는 재직 기간).
도이 도시카쓰(1610~1638) 사카이 다다요(1610~1634) 사카이 다다카쓰(1624~1638)
마쓰다이라 노부쓰나(松平信綱, 1632~1662) 아베 다다아키(阿部忠秋, 1633~1666) 홋타 마사모리(堀田正盛, 1635~1651)
아베 시게쓰구(阿部重次, 1638~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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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들이 동석하여 부젠(豊前) 사건의 자초지종을 물어보셔서 [소 요시나리가] 그 경위를 자세히 말씀드렸더니, 로주님들이 말씀하시길 “이 건(一件)주 030
각주 030)
쓰시마의 번주 소 요시나리와 그의 가신 아냐가와 시게오키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어, 1635년에 쇼군 이에미쓰가 친재한 결과 시게오키 처벌(유배형)로 끝난 사건을 ‘야나가와 잇켄(柳川一件)’이라 한다. 이 사료에서는 ‘부젠 잇켄(豊前一件)’, ‘잇켄(一件)’ 등으로 지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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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관해서 우리 모두 계속해서 듣기는 했지만 아직 일동이 함께 듣지는 못했기 때문에 묻는 것이다. 누가 아뢰었는지 쇼군께서도 이미 들으셨지만 우리가 말씀 올리는 것은 오늘부터이다. 들은 대로 오늘 [쇼군께] 보고드릴 것”이라고 하셨다.
一. 동 12일, 오이노카미님·사누키노카미(讚岐守)주 030
각주 030)
사카이 다다카쓰(酒井忠勝). 가와고에번(川越藩) 2대 번주이자 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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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에게서 사카이 아와노카미님 댁으로 오시라는 전갈이 왔다. 그날 로주님들이 “교토행(上洛)이 얼마 남지 않았다. 쓰시마노카미(對馬守)주 030
각주 030)
소 요시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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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우선 [쇼군의] 교토행에 동행하도록 하고, 부젠 건은 에도로 돌아온 후에 말하겠다”라는 쇼군의 뜻을 전하셨다.
一. 동 11년(1634) 갑술(甲戌) 10월 19일, “에도성(殿中)에서 부젠의 건에 관해 쓰시마노카미의 생각을 한 번 더 물어보라는 쇼군의 뜻이 있었으니, 내일 사택(私宅)으로 오시오”라고 오이노카미(大炊頭)님이 말씀하시어, 이튿날 20일에 오이노카미님 댁으로 가셨다. 그때 마쓰다이라 이즈노카미(松平伊豆守)주 030
각주 030)
로주 마쓰다이라 노부쓰나(松平信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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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아베 분고노카미(阿部豊後守)주 030
각주 030)
로주 아베 다다아키(阿部忠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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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야규 다지마 노카미(柳生但馬守)주 030
각주 030)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 당시 오메쓰케(大目付). 오메쓰케란 에도 막부의 제반 업무를 감독하고 다이묘들의 행동을 감찰하며 관리들의 태만을 적발하는 직책이다. 1636년, 야마토(大和) 야규번(柳生藩) 번주가 되었다. (『日本人名大辭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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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가가쓰메 민부쇼유(かゝ爪民部少輔)주 030
각주 030)
가가쓰메 다다스미(加賀爪忠澄). 당시 에도마치부교(江戶町奉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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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호리 시키부쇼유(堀式部少輔)주 030
각주 030)
호리 나오유키(堀直之). 당시 에도마치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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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동석하시어 잇켄의 전말에 관해 물으셨으므로, 지난해 아와노카미님께 말씀 드린 내용으로 답변했다. 그 후 부젠을 부르셔서 그 뜻을 물으시자, “제가 쓰시마노카미 님에게 다른 뜻이 없는 것은 맹세한 대로입니다. 쓰시마노카미님의 해명은 하나하나 그대로이지만, [저의] 아버지 부젠노카미가 돌아가셨을 때 쓰시마노카미님은 도리를 어겨 저를 주륙(誅戮)하시려 해서 어쩔 수 없이 몰래 쓰시마(對州)주 030
각주 030)
다이슈(對州)는 쓰시마노쿠니(對馬國)의 이칭. 쓰시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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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떠나 슨푸(駿府)로 가 혼다 고즈케노스케(本多上野助)주 030
각주 030)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의 장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직을 히데타다에게 물려주고 오고쇼(大御所)가 되어 슨푸로 물러나자, 아버지 마사노부는 에도성에서 의례를 주재하고, 아들 마사즈미는 슨푸성에서의 의례를 주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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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휘하에서 근무한 이래 현재의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쓰시마노카미님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이한 일은 이 또한 곤겐(權現)주 030
각주 030)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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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뜻으로 인연을 맺도록 지시받은 것인데, 이 두 가지에 관한 쓰시마노카미님의 말씀은 완전히 허위입니다”라고 말했다. 오이노카미님이 다시 고운인님을 부르시어 위의 내용을 물으시자, 답변하기를 “부젠이 이전에 슨푸로 간 것은 돌아가신 [제] 아버지 쓰시마노카미주 030
각주 030)
소 요시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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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막부의 업무를 보기 위해 고즈케노스케님께 부탁드려서 [고즈케노스케님 곁에] 있게 했던 것입니다. 부젠의 말처럼 쓰시마를 떠났다면 그때는 그 자가 어릴 때인지라 속히 붙잡아서 주륙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쉬운 일이었기에 도망가게 할 것도 없었습니다. 제 여동생과의 혼인도 돌아가신 [제] 부친의 지시임에 틀림없습니다. 곤겐님의 뜻이라는 [부젠의] 말은 모두 거짓임에 틀림없습니다. 특히 여러 다이묘들(諸州守)과 여러 하타모토(諸御籏本)주 030
각주 030)
하타모토(旗本)란 본래 전장에서 장수의 깃발 아래에서 장수를 호위하는 무사단. 일반적으로는 에도시대 도쿠가와 쇼군에게 직속된 가신 가운데 석고가 1만 석 미만으로 오메미에(御目見) 이상의 가격(家格)인 무사 신분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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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혼인에 관해서는 결연하기를 [막부에] 청원하도록 명하신 것이 최근의 일입니다. 하물며 배신(陪臣)주 030
각주 030)
신하의 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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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시게오키(調興)에 한정해서 곤겐님이 혼인하라는 분부를 내리셨겠습니까?”라고 말씀드렸다. 오이노카미님이 말씀하시길 “사쓰마(薩州)와 쓰시마는 풍속이 크게 유사했다. 지금 사쓰마노카미님의 정실은 가신의 딸이니,주 030
각주 030)
사쓰마노카미(薩摩守)란 사쓰마 번주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 다다쓰네(忠恒)]. 이에히사의 부인은 백부(伯父)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의 딸이었으나 정실과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이에히사의 후계자 미쓰히사(光久)의 생모(側室)는 가신 시마즈 다다키요(島津忠淸)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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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의 풍속도 어느 정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고 하셨다.
一. 동 29일, 오이노카미님·이즈노카미님·분고노카미님이 연서(連書)를 보내시어, 이 건은 내일 에도성에서 심문할 거라고 하셨다.

  • 각주 030)
    도이 도시카쓰. 당시 시모우사노쿠니(下總國) 고가번(古河藩)의 번주이자 막부의 로주. 바로가기
  • 각주 030)
    사카이 다다요(酒井忠世, 1572~1636). 당시 막부의 로주. 1605년 쇼군이 된 히데타다를 보좌하는 필두 도시요리(로주)가 되었고, 1607년 7월 슨푸성(駿府城)으로 옮겨 간 이에야스를 축하하여 우타노카미(雅樂頭)가 되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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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카이 다다유키(酒井忠行). 로주 사카이 다다요의 아들. 1636년 가독을 상속하여 마에바시번(前橋藩) 15만 2,500석을 지배. 같은 해 37세로 사망.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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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이 도시카쓰(1610~1638) 사카이 다다요(1610~1634) 사카이 다다카쓰(1624~1638)
    마쓰다이라 노부쓰나(松平信綱, 1632~1662) 아베 다다아키(阿部忠秋, 1633~1666) 홋타 마사모리(堀田正盛, 1635~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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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 당시 오메쓰케(大目付). 오메쓰케란 에도 막부의 제반 업무를 감독하고 다이묘들의 행동을 감찰하며 관리들의 태만을 적발하는 직책이다. 1636년, 야마토(大和) 야규번(柳生藩) 번주가 되었다. (『日本人名大辭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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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가쓰메 다다스미(加賀爪忠澄). 당시 에도마치부교(江戶町奉行).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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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리 나오유키(堀直之). 당시 에도마치부교.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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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슈(對州)는 쓰시마노쿠니(對馬國)의 이칭. 쓰시마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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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의 장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직을 히데타다에게 물려주고 오고쇼(大御所)가 되어 슨푸로 물러나자, 아버지 마사노부는 에도성에서 의례를 주재하고, 아들 마사즈미는 슨푸성에서의 의례를 주재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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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 요시토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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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타모토(旗本)란 본래 전장에서 장수의 깃발 아래에서 장수를 호위하는 무사단. 일반적으로는 에도시대 도쿠가와 쇼군에게 직속된 가신 가운데 석고가 1만 석 미만으로 오메미에(御目見) 이상의 가격(家格)인 무사 신분을 가리킨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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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하의 신하.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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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쓰마노카미(薩摩守)란 사쓰마 번주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 다다쓰네(忠恒)]. 이에히사의 부인은 백부(伯父)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의 딸이었으나 정실과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이에히사의 후계자 미쓰히사(光久)의 생모(側室)는 가신 시마즈 다다키요(島津忠淸)의 딸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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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젠(豊前) 사건에 대해 로주(老中)에게 보고와 쇼군의 뜻 자료번호 : kn.k_0007_001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