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통보한 위서(僞書)와 관련하여 보초로(方長老)와 시치에몬(七右衛門)의 대결
一. 동 27일, 보초로와 시치에몬이 로주님들 앞에서 대결했다. 그때 “지난 게이초 19년(1614) 통신사 내빙과 관련하여 조선에 통보를 했을 때에도 쓰시마노카미님이 위서(謀書)를 만들어 그 나라에 보냈습니다. 조선과의 통교를 부젠노카미가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모든 일이 [부젠의] 힘에 미치지 않는 것은 후루카와 우마노스케가 인반야쿠(印判役)주 120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시치에몬이 주장하자, 우마노스케가 말하길 “조선과 약속한 인증(印證)은 쓰시마노카미·부젠 두 분이 받아서 갖고 계십니다. 쓰시마노카미가 [조선에] 보내는 서계(書契)주 120에는 쓰시마노카미가 받은 도장을 사용하고, 부젠이 보내는 서계는 부젠이 받은 도장을 쓰고 있어 제가 맡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도항증명서(吹噓)에 날인하는 일만이 제가 맡은 역할입니다. 그 밖에 서계 인증에 관해서는 제가 아는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지난 게이초 연간(1596~1614)의 일은 선대 쓰시마노카미가 곤겐(權現)님의 뜻을 듣고서 지시한 일인데, 어떠한 문제도 없는 상황에서 [왜] 쓸데없이 위서를 만들겠습니까. 이전에도 영지에 관한 일로 쓰시마노카미의 영내(領內)에서 부젠이 사사로이 획책하여 마을의 경계를 정하기도 하고 사적인 부정을 여러 가지 저질렀는데, 또다시 보초로의 [한성] 상경에 관해서도 거짓말을 만들어 내고 있으니 거듭거듭 괘씸한 행실을 명확하게 살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한편 로주님들이 스기무라 우네메에게 질문하시기를, “보초로가 상경했을 때 어떤 이유로 같은 날에 숙배(肅拜)주 120하지 않았는가? 이 점이 수상하다”고 하니, 우네메가 답변하기를, “보초로는 국명을 받들어 [조선에] 갔고 저는 보초로가 여정에서 [조선에서] 받는 대접에 관해 지시하기 위해, 또한 그 기회에 조선의 상황도 견문해 두라는 쓰시마노카미의 명을 받아 함께 파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왕성으로 갈 때 박판사·최판사주 120가 와서 ‘가까운 시일 내에 숙배가 있습니다. 보초로·우네메는 함께 예조(禮曺)에 배(拜)를 올려야 합니다’라고 하기에, ‘저는 출가한 초로(長老)여서 예조에 배를 하는 건 결코 안 됩니다’라고 보초로가 대답했고, 저는 ‘보초로를 호행(護行)하는 임무를 띠고 왔을 뿐이라 예조에의 배례는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튿날 다시 판사가 와서, ‘그러면 보초로와 예조는 대배(對拜)하고 그쪽[우네메]은 예조에 배례하시오’라고 하기에, 저는 ‘예조에의 배례는 결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다시 잘라 말했습니다. 결국 보초로만 숙배를 했습니다. 그 후 거듭 판사가 와서 ‘당신 이름도 서계 안에 보이는데 숙배를 하지 않는다면(■입니다)’라고 하므로 그 일수가 9일에 이르러 저도 숙배를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시치에몬이 또 말하기를, “보초로가 상경할 때 서계 두 상자를 가져갔습니다. 한 상자에는 어떤 물건을 넣었습니까?”라고 묻자, “그때 서계는 한 상자였다”라고 우네메가 답변했다. “그 일은 증인이 있습니다”라고 시치에몬이 말하니, “그러면 그 증인을 내놓으시오”라고 우네메가 답했다. 시치에몬이 말하기를 “야스베(安兵衛)라는 자가 그 증인인데 쓰시마에 있습니다”라고 하니, “이번에 검사(檢使)를 쓰시마로 보냈을 때 이 사건과 연관된 사람은 승속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데려오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그 야스베는 어떤 이유로 데려오지 않았는가?”라고 우네메가 물으니, 그때 시치에몬이 로쿠베(六兵衛)라는 자를 불러내어 “이 로쿠베도 증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때의 서계 상자는 단 하나였고 달리 다른 서계 상자는 없었다”고 로쿠베가 말했고, 우네메가 시치에몬을 향해 “막부의 관리님들 앞에서 이처럼 거짓말을 꾸며내어 흑백을 흐리고 있으니 참으로 괘씸함이 대단하다. 당신이 만든 위서를 쓴 자와 가짜 도장을 만든 자를 지금 확실하게 내놓으시오”라고 하자 시치에몬은 답변도 없이 침묵하고 있었다. 한편 로주님들이 보초로에게 “고쇼마루(御所丸)주 120 송사(送使)는 쓰시마노카미와 그대[보초로]가 상의하여 보낸 것이라고 부젠과 시치에몬이 똑같이 말하였는데, 이 일은 어찌 된 것인가?”라고 물으셨다. “고쇼마루의 건은 쓰시마노카미와 부젠 두 사람이 저[보초로]에게 부탁해서 보낸 것입니다. 모든 복잡한 논의는 야나가와 가게유와 사고 분에문(佐護文右衛門)이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 일을 모릅니다”라고 보초로가 답했다. 그래서 가게유에게 “고쇼마루 건은 누가 지시했는가?”라고 로주님들이 물으시자, “그 일은 모두 부젠이 지시했습니다. 겐나(元和) 6년(1620) 경신(庚申) 여름에 부젠이 말하기를, ‘정사년(丁巳年, 1617)의 통신사 내빙 이래 보빙사(報聘使)주 120를 아직 보내지 않았다. 예전에 아버지가 곤겐님의 뜻을 받들어 고쇼마루 송사로 건너갔다. 그러면 선례가 있으니 이번에도 동일하게 할 것이므로 막부에 여쭙고 쇼군님의 허락을 받은 후 에도에서 [쓰시마로 연락을] 보낼 것이니 미리 준비하고 있으라’고 제[가게유]게 말했습니다. 겐나 7년(1621) 신유(辛酉) 봄에 부젠의 아내주 120가 에도로 갔는데, 쓰시마노카미의 여동생인터라 쓰시마노카미가 참근(參覲)주 120하러 [에도로] 가는 길에 데리고 함께 배로 쓰시마를 떠나 오사카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여동생이 홍역을 앓게 되어 오사카에 머물게 하고 쓰시마노카미는 곧바로 참근했습니다. 그런데 쓰시마노카미도 종기를 앓아, 치료를 위해 참근을 쉬어도 된다는 허가를 받고 교토로 갔습니다. 그때 여동생의 병이 회복되어 에도로 가던 도중 닛사카(日坂)에서 대면하고 쓰시마노카미는 곧바로 교토로 가서 체류하고 있던 중, 부젠이 가신(家人)인 고토 사부로자에몬(古藤三郞左衛門)을 사자로 보내, ‘고쇼마루의 건을 이번에 아뢰었더니 전례와 같이 보빙사를 도해시키라는 쇼군님의 뜻을 받았다. 그러하니 파견할 것이다’라고 루스이(留守居)주 120에게 전하고, 서둘러 그 내용을 쓰시마노카미에게 말했습니다. 쓰시마노카미도 ‘부젠이 쇼군님의 뜻을 얻은 이상 그대로 시행하여 송사선을 도해시키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습니다. 그 후 겐나 7년(1621) 8월 사부로자에몬이 쓰시마로 가서 [송사선에 탈] 첨관(僉官)주 120의 인원수, 그 밖에 여러 의식의 준비 등을 부젠의 지시대로 마련했습니다. 같은 해 겨울 부젠의 지시로 마쓰오 시치에몬을 쓰시마로 보내 고쇼마루를 출선하게 했습니다. 쓰시마노카미는 그해 10월, 병이 나아서 쓰시마로 돌아왔습니다. 고쇼마루 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부젠과 시치에몬 두 사람이 계획한 것으로, 쓰시마노카미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가게유가 말했다. “그때 고쇼마루 송사가 준비해 간 물건 등의 비용은 어디에서 염출했는가?”라고 물으시어, “그때 쓰시마에 속은(贖銀) 20관목(貫目) 남짓이 있던 것을 부젠의 지시로 사고 분에몬에게 건넸습니다. 분에몬이 직접 교토로 가져가 고쇼마루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해서 돌아왔고, 그 후 분에몬과 시치에몬 두 사람이 지시하여 저도 여러 일을 처리하기 위해 상담을 했습니다”라고 가게유가 말했다. “부젠이 맹세서를 써서 쓰시마노카미에게 제출한 것은 어떤 연유에서인가?”라고 물으시어, “그것은 부젠의 아버지 도시나가(智永)주 120
각주 120)

가 돌아가신 후, 쓰시마노카미의 부친주 120이 에우치 우에몬(江內右衛門)과 야나가와 가와치(柳川河內) 두 사람을 붙여 부젠을 슨푸로 보냈습니다. 그 후 부젠은 슨푸에 있었는데 은밀하게 쓰시마노카미에게 부젠을 헐뜯는 자가 있다는 것을 [부젠이] 알았고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들어서, 부젠이 쓰시마에 돌아갔을 때 쓰시마노카미가 소 사누키(宗讚岐)주 120·히라타 사쿄(平田左京)를 통해 ‘막부에 대한 조선 관련 업무 및 쓰시마 업무까지 선조(先祖) 때와 같이 틀림없이 일하도록 하라’고 부젠에게 전했습니다. 그때 부젠은 ‘어린 나이이니 지시를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쓰시마노카미에게 재삼 거절했으나, 쓰시마노카미는 받아들이지 않고 그대로 명했습니다. 그때 ‘앞으로 주종(主從)의 도리를 어기지 않겠다’는 맹세서를 부젠이 작성하여 위 두 사람에게 건넸습니다. 그 후 ‘제가 안심하기 위해서이니 아무쪼록 쓰시마노카미님과 이토쿠인(威德院)주 120님께서도 맹세서를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부젠이 요청하니, 가엽게 여겨서 맹세서를 준비하여 건넨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사년(巳年, 1617)의 통신사가 연기되는 바람에 막부를 속이고 위서를 만들어 조선에 보냈고, 곧이어 [통신사] 내빙이 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위서의 경위가 발각될 것을 쓰시마노카미님이 불안해하시어 억지로 부젠에게 맹세서를 작성하게 했습니다”라고 시치에몬이 말하자, “당신은 그처럼 증거도 없는 말을 합니까. 그때 위서는 당연히 당신과 부젠 두 사람이 한 짓입니다. 우리들은 그런 일 끝내 듣지도 못했습니다”라고 가게유가 답변했다. 또한 “가짜 도장을 새긴 것도 당신의 짓이라는데 누구의 지시를 받아 만들었는가?”라고 가쓰타 마고시치(勝田孫七)에게 물었더니, “가짜 도장은 전부 두 번 새겼습니다. 한 번은 에도의 부젠 댁에서 시치에몬의 지시로 만들었고, 그 포상으로 쌀 두 가마니(俵)를 받았습니다. 또 한 번은 쓰시마에서 만들었습니다. 이 또한 시치에몬의 지시로 만들었고, 도장이 완성되자 시치에몬님께 가져가 곧바로 건넸습니다. 그때도 포상으로 면포 두 필을 받았습니다. 이 두 번 모두 시치에몬의 지시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용도로 만들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저 같은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그의 집에 드나들며 집안사람이나 마찬가지였던 터라, 시치에몬의 지시대로 만들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야나가와 가게나오(柳川景直, ?~1613). 야나가와 도시나가(柳川智永). 초명이 가게나오. 야나가와 시게노부의 아들이자 시게오키의 아버지. 조선에서는 주로 유천경직(柳川景直), 평경직(平景直)이라 일컬었다. 1611년에는 부친 시게노부의 공로와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인 포로를 쇄환(刷還)한 공로를 인정해 조선에서 그에게 도서(圖書)를 급부하고 해마다 사선(使船) 1척씩을 보내게 했는데, 이것을 야나가와 송사(柳川送使)라고 한다. 1622년 그의 아버지 시게노부의 법명인 류호인을 따라 유방원도서(流芳院圖書)를 발급받게 되면서, 당시의 야나가와 가문은 2개의 도서를 보유하게 되었다. (『대일외교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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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가와 가게나오(柳川景直, ?~1613). 야나가와 도시나가(柳川智永). 초명이 가게나오. 야나가와 시게노부의 아들이자 시게오키의 아버지. 조선에서는 주로 유천경직(柳川景直), 평경직(平景直)이라 일컬었다. 1611년에는 부친 시게노부의 공로와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인 포로를 쇄환(刷還)한 공로를 인정해 조선에서 그에게 도서(圖書)를 급부하고 해마다 사선(使船) 1척씩을 보내게 했는데, 이것을 야나가와 송사(柳川送使)라고 한다. 1622년 그의 아버지 시게노부의 법명인 류호인을 따라 유방원도서(流芳院圖書)를 발급받게 되면서, 당시의 야나가와 가문은 2개의 도서를 보유하게 되었다. (『대일외교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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