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사가 등성하여 로주(老中)를 만나니 조선의 문서가 정중함에 대해 감사의 말을 함
一. 동 14일 비. 오각(午刻)에 날씨가 개다.
〃 오늘 등성하라는 연락이 왔다. 서한을 다음에 적는다.
글을 보냅니다. 용무가 있으니 오늘 오전 10시쯤 오라는 지시가 있었으니 그렇게 아시오. 삼가 말씀드립니다.
12월 14일 마쓰다이라 이즈노카미
소 쓰시마노카미님
위 지시대로 이른 아침에 등성해서 로주님들과 만나셨다. 그때 다이나곤님과 주나곤님도 그 자리에 계셔서 가몬노카미님에게 “이번에 신사의 등성 의식 등이 순조롭게 끝나서 기쁩니다”고 하시자, 가몬노카미님이 “우리도 마찬가지로 기쁩니다. 또한 이번 신사가 가져온 서한은 문장이 매우 겸손하고, 쇼군을 공경하여 대군(大君)이라고 적었으며, 명나라의 연호는 한 글자 내려서 적었습니다. 또한 일본의 치덕(治德)에 관한 문구를 많이 적었으니, 지금까지 그렇게 공손한 서법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오로지 일본이 태평한 위세가 아니라면, 어떻게 조선국이 존경한다는 내용을 그렇게 [국서에] 쓰겠습니까? 그래서 생각건대, 조선국조차 이와 같은데 야나가와 부젠노카미(柳川豊前守)주 760
각주 760)

와 [그의] 가신 시치에몬(七右衛門)주 760이 여러모로 거짓으로 참언(讒言) 하여 주인을 모욕하고, 나아가서는 쇼군까지 무례하게 속인 행태는 그 죄가 대단히 무겁습니다”라고 하셨다. 이에 다 같이 “지당한 말씀입니다”라고 하셨다. 가몬노카미님이 다시 말하시길, “이번에 조선국에서 우리에게도 각각 서한을 보내주었는데, 그 내용도 대단히 쇼군을 존경한다는 내용입니다”라고 했다. 다이나곤님이 답변하시길, “실로 그와 같으니 조선국의 정중함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셨다. 대화를 마치고 낮이 되어 로주님들이 고운인님에게 말씀하시길, “지금 산노마루(三之丸)주 760에서 우리에게 전언이 왔는데, ‘어제 신사의 등성 의식을 순조롭게 마쳤으니, 귀하를 부르셔서 [쇼군의] 생각을 말하시려 했는데, 어제 저녁 내린 대설 때문에 조금 건강이 안 좋아져 오늘은 [처소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니 귀하는 다시 내일 등성하라’는 내용입니다”라고 하셔서 물러났다.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 시게오키의 별명이 부젠노카미(豊前守)이고, 줄여서 부젠이라고 한다. 야나가와 가문의 3대 당주이다. 주군인 소 요시나리와 관계가 악화되자 시게오키는 1605년 조선의 사절을 후시미(伏見)까지 데려온 공적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과거 쇼군 이에야스가 소 요시토시에게 하사한 규슈 히젠(肥前)의 영지 2,800석 중에서 1,000석이 부친 야나가와 도시나가(柳川智永)에게 분급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삼아, 스스로 소씨의 가신이 아니라 막부의 직신(直參旗本)처럼 행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급기야 1631년 양자는 서로를 막부에 고발하기에 이르렀고, 1635년 쇼군 이에미쓰가 친재한 결과 요시나리는 무죄, 시게오키는 쓰가루번에 유배 판결을 받았다. 그의 나이 33세 때이다. 쓰가루번으로 향하는 도중 시게오키는 삭발하고, 이름을 ‘소안(素庵)’으로 개명했다. 그런데 쓰가루에서 그의 유배생활은 죄인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잇켄 당시 시게오키의 지원 세력이었던 로주 사카이 다다카쓰, 도이 도시카쓰(土井利勝) 등의 특별한 배려에 힘입어, 무려 7명의 가신을 이끌고 쓰가루성 밑에 광대한 저택을 받아 생활했다. 초반에 있던 감시원도 곧 없어졌으며, 막부가 쓰가루씨에게 명한 분량보다 훨씬 많은 양의 쌀이 지급되었다. 번주 쓰가루씨도 시게오키의 재기(才氣)를 마음에 들어 했는지 때때로 번주 부자(夫子)가 시게오키의 저택을 방문하기도 하고, 시게오키가 번주의 성에 초대되어 함께 노(能)를 즐기기도 했다. 시게오키는 1684년 10월, 50년에 가까운 유배생활 끝에 82세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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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760)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 시게오키의 별명이 부젠노카미(豊前守)이고, 줄여서 부젠이라고 한다. 야나가와 가문의 3대 당주이다. 주군인 소 요시나리와 관계가 악화되자 시게오키는 1605년 조선의 사절을 후시미(伏見)까지 데려온 공적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과거 쇼군 이에야스가 소 요시토시에게 하사한 규슈 히젠(肥前)의 영지 2,800석 중에서 1,000석이 부친 야나가와 도시나가(柳川智永)에게 분급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삼아, 스스로 소씨의 가신이 아니라 막부의 직신(直參旗本)처럼 행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급기야 1631년 양자는 서로를 막부에 고발하기에 이르렀고, 1635년 쇼군 이에미쓰가 친재한 결과 요시나리는 무죄, 시게오키는 쓰가루번에 유배 판결을 받았다. 그의 나이 33세 때이다. 쓰가루번으로 향하는 도중 시게오키는 삭발하고, 이름을 ‘소안(素庵)’으로 개명했다. 그런데 쓰가루에서 그의 유배생활은 죄인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잇켄 당시 시게오키의 지원 세력이었던 로주 사카이 다다카쓰, 도이 도시카쓰(土井利勝) 등의 특별한 배려에 힘입어, 무려 7명의 가신을 이끌고 쓰가루성 밑에 광대한 저택을 받아 생활했다. 초반에 있던 감시원도 곧 없어졌으며, 막부가 쓰가루씨에게 명한 분량보다 훨씬 많은 양의 쌀이 지급되었다. 번주 쓰가루씨도 시게오키의 재기(才氣)를 마음에 들어 했는지 때때로 번주 부자(夫子)가 시게오키의 저택을 방문하기도 하고, 시게오키가 번주의 성에 초대되어 함께 노(能)를 즐기기도 했다. 시게오키는 1684년 10월, 50년에 가까운 유배생활 끝에 82세로 타계했다.
- 각주 760)
- 각주 7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