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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 구분
    유구
  • 시대
    고구려
  • 유물번호
    F000212
  • 위치(출토지)
    集安 太王陵(禹山下JYM0541號墓)(집안 태왕릉(우산하JYM0541호묘))
  • 형태사항
    높이 6.39m, 사면의 너비 1.34-2m│밑너비 제1면 1.43m, 제2면 1.34m, 제3면 1.97m, 제4면 1.43m.│각 면 제1자 위치의 너비 제1면 1.61m, 제2면 1.00m, 제3면 1.95m, 제4면 1.00m.│폭이 가장 넓은 곳은 제3면의 밑으로부터 4.00m 되는 곳으로 2.00m.│폭이 가장 좁은 곳은 제2면과 제4면 꼭대기 부분으로 1.00m.│비신 무게 37톤.│능비 대좌 길이 3.55m, 너비 2.70m. 
출토지
중국 길림성 집안시(구 집안현) 태왕향 구화리 대비가. 태왕릉 능원 밖 고분의 동측 편북 300m 지점에 위치함. 동쪽으로 집안-통화간 도로의 구노선과 접하고 있음.(中國 吉林省 集安市(舊 集安縣) 太王鄕 九華里 大碑街.)
유적명
태왕릉(太王陵)
연대
424년(장수왕 3년)
구조특징
1905년 鳥居龍藏이 능비에 대한 조사를 처음으로 행함. 능비가 매몰된 적이 없음을 밝힘. 능비의 석재를 4각의 장방형 화강암으로 파악하고, 각 면의 크기를 측정함. 높이 2장 5촌, 동면(1면)의 너비 5척, 남면(2면)의 너비 5척, 서면(3면)의 너비 4척 8촌, 북면(4면)의 너비 6척 5촌. 이어 1907년 프랑스 샤반느 박사가 능비의 지리환경을 고찰하고 사진을 촬영함. 이 해에 일본군 제57연대가 능비를 일본으로 밀반출하려고 기도함. 당시의 집안현 지사 吳光國 등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함.
1913년 關野貞과 今西龍이 1913년을 기준으로 10여전부터 석회탁본이 성행하고 있음을 확인함. 능비의 석재를 단면이 불규칙한 4각형 응회암(금서룡은 능만암으로 파악) 자연석으로 파악. 각 면의 크기 측정, 제1면의 너비 5척 1촌, 제2면의 너비 4척 7촌 5분, 제3면의 너비 6척 5촌, 제4면의 너비 4척 6촌. 높이 20척 8촌 5분. 또한 비문에 대한 관찰을 통해 종래 13행으로 알려졌던 제3면이 14행임을 밝히는 한편(제1행 27자를 辭로 판독함; 1909년 羅振玉은 탁본을 통해 제3면 1행 41자를 ‘潰’로 판독하고, 14행임을 처음 밝힘.) 비문에 대한 새로운 판독 시도. 1918년에는 黑板勝美가 능비의 대좌를 상세히 조사하고, 석회를 제거하고 원 글자를 몇 자 확인함. 사진 촬영(동양문고 소장).
1927년 집안현 상공인들이 자금을 모아 능비 주변을 보수하고 나무재질의 철제 기와로 된 보호각을 1928년에 준공함. 이로써 능비는 비바람으로 인해 침식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게 되었음.
1935-1936년 池內宏 등이 능비의 대좌를 상세히 조사하고 실측함.
1957년 林至德이 현지 조사를 하였고, 1958년에는 길림성박물관이 현지 조사를 진행함.
1961년 중국 정부가 전국 제1급 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포했고, 1962년에는 王承禮, 方起東, 李殿福 등이 능비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와 실측을 진행. 특히 능비의 훼손 및 균열 상태에 대한 상세히 조사. 1963년 중국과 북한의 공동조사단이 조사 진행. 이때 장명선본(張明善本)이 작성됨. 이해 8월 보호각에 대한 보수 조치 취함. 그리고 1964-1965년 중국의 국가문물국과 길림성, 집안현 등의 문물부가 능비에 대한 조사, 관측을 진행함. 아울러 능비 발견 초기의 이끼 제거를 위한 화재, 석회칠, 자연적인 풍화 등으로 인해 생긴 균열과 훼손에 대해 화학 약품을 사용하여 보존처리를 시행함.
1972년에는 王健群이 비를 실측하는 한편, 비문에 대한 판독 시도하였고, 1973년에는 길림성 건축설계원이 능비 부근의 암반층 조사하였음. 1974년에 집안현 문물관리소의 林至德 등이 능비의 기초에 대해 조사. 또한 1965년 1차 화학처리 이후의 능비 현황에 대해 조사함. 다시 1976년 林至德 등이 능비의 대좌에 대한 실측을 진행함. 또한 보호각의 목재 기둥이 부식되어 기울어지면서 비가 무너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보호각을 철거하고 다방면의 유지 보수를 거쳐 능비의 기초를 단단히 하는 보호 처리와 함께 8*8m2 시멘트 받침대를 조성함. 1978년 북한의 고고학자와 미술사학자가 통구고분군의 벽화고분과 장천고분군과 더불어 능비를 조사했고, 1979년 왕건군이 비문에 대한 조사 시행. 이해 8-9월에 제2차 화학보존처리를 시행함.
1981년 왕건군, 방기동이 비문에 대한 조사 시행했는데, 이 때 주운태본(周云台本)이 작성됨. 1982년 5월 10일 새로운 보호각을 건립했고, 높이 14.3m, 면적 140.42m2였음.
비에 ‘國崗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시호가 새겨져 있어 ‘광개토왕비’란 명칭을 얻음.
비는 좀 더 손질된 정연한 방주형의 각력(角礫)응회암으로 높이 6.39m, 사면의 너비 1.34-2m로 고르지 않으며, 화강암과 석회암으로 구성된 2층의 기초 위에 서 있음.(耿鐵華, 『好太王碑新考』, 36쪽, 길림인문출판사, 1994년) 비문 사면에 돌아가며 글자가 새겨져 있음. 가는 선으로 44행으로 나누었고, 문자는 우측부터 종행으로 써내려 갔으며, 한자는 예서체이며, 글자 길이는 9-12㎝이고 가로 너비는 10-12㎝이며, 구도가 엄격하고 글자새김이 반듯함.
각 비면의 상황에 관해, 우선 비석은 총 4면, 총44행으로 1775자임. 150여 자는 판독이 어려움. 종선에 대해 설명하면, 각 면의 상황에 따라 꼭대기 부분은 0.70m 비워두고, 밑 부분은 0.25m 비워두었음. 가운데의 장방형 비면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세로 선을 그어 칸을 만들고 문자를 써 넣은 뒤에 문자와 세로 선을 함께 파서 새겼음. 비문은 사면에 모두 새겼으며, 각 면의 문자는 가로 세로로 줄을 맞추어 규칙적으로 장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네모 반듯하고 단정하며 장엄함. 행간은 12.5-13.8㎝이며, 각 행의 끝 글자는 기초부분에서 25㎝ 떨어져 있음.
그 가운데 제1면 비문은 11행으로 매 행 41자으나 제6행 하부의 “其辭曰” 아래에는 원래 두 글자의 공간이 있어 비문의 글자는 모두 449자임.
제2면 비문은 10행인데 마지막 두 행은 비석에 의해 자연스럽게 결손 되어 글자가 비어 있으며, 그 가운데 제9행 상단에는 7자가 비어있으며, 제10행 상단에는 16자가 비어 있으며, 그 외는 모두 매 행 41자로 모두 387자임.
제3면은 결손이 없어 비문은 14행이며, 매 행마다 41자로 총 574자임.
제4면의 비문은 9행으로 제1행 윗자리는 자연스럽게 결손 되어 4자가 비어있어, 총 문자가 365자임. 각 행바다 41자가 있음.
사면 비문은 총 1775자임. 석비 표면이 거칠어 전해진 탁본이 거의 동일한 것이 없기 때문에 비문고증의 논쟁이 발생함.
서체는 전체적으로 예서임. 다만 예서 외에 해서도 있으며 또한 전서의 일부 특징을 보유하고 있다고 파악하는 연구자도 있음. 능비를 건립할 때는 대체로 예서체로부터 해서체로 변화하는 시기였음.
비문 글자의 대소 차이는 크지 않고 일반적으로 편방형이며 길이가 9㎝, 너비 10㎝ 전후임. 일부 글자는 일반적인 크기보다 약간 큰 장방형이 있는데, 이는 획수가 더욱 번잡한 글자이기 때문임. 예로 제1면 제5행 제36자인 “谷”자는 길이가 12.5㎝, 너비 11㎝이며, 제4면 제1행 제19자인 “奧”는 길이가 12.5㎝, 너비 12㎝임.
이 비는 청대 광서 초년에 발견됨. 1878-1879년 사이에 이곳 주민 初天福이 懷仁知縣의 명을 받아 “분(糞)을 비면에 바르고 마르기를 기다려 불을 질러” 이끼를 제거한 후에 탁본을 시작하여 비첩을 제작함. 1903년을 전후해 初氏 부자는 백회를 비면의 평평하지 않은 곳에 발라 글자를 보수하면서 두드리기에 유리해짐. 불태워 이끼를 제거하고 석회로 보수하면서 원비가 크게 훼손됨. 전자의 직접적인 결과로 장대한 비가 여러 곳이 파열되어 부분적으로 말라 떨어짐. 후자는 비문의 진실성이 심각하게 훼손되면서 고증 해석하는데 상당히 큰 혼란을 야기함. 1927년 회인현내 상공업 각계가 자본을 모아 2층의 목조 6각형 비정(碑停)을 세우면서 이 비에 대해 차단과 보호를 시작하였으며 다음해 완공됨.
1961년 국무원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포함. 1964-1965년 국가문화부 문물국 파견원이 비면에 남아 있던 백회를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함. 이어서 비체를 보호하기 위한 화학처리 시험 및 실시를 진행함. 1976년 원래 있던 목조 비정을 철거하고 시멘트 명대(明臺)를 만듦. 1982년-1983년 유리기와가 뾰족한 꼭대기를 이루는 보호비정을 세움. 현재 비면의 백회는 드물게 반점으로 남아 비문 10여자에 영향을 미치고 비면은 화학보호 처리 후에는 균열 틈이 다시 커지지 않으며, 말라서 떨어지는 것 또한 매우 완화시킴.
청말부터 개시된 광개토왕비의 탁본 작업이래, 전해진 비문탁본은 쌍구전묵본(雙句塡墨本)을 포함하여 이미 적어도 수십 종이 있음. 신중국 수립 이후 1963년 張明善과 1981년 周云台의 두 차례 탁본제작이 있었음. 비문연구는 광서 연간 탁본이 초견(初見)되면서 시작되어 이른 시기 鄭文焯, 榮禧, 羅振玉, 楊守敬, 劉節 등의 발문쓰기와 고증해석을 거쳐 근년에는 王健群, 劉永智, 方起東, 耿鐵華 등의 연구가 있음. 현재 이르러 이미 비문 1600여자가 알려졌으며 기본적으로 해석이 가능함.
각 연구 성과를 보면, 광개토왕비는 고구려 제19대왕 ‘平安好太王’ 담덕(혹은 安)의 묘비라는 것은 이미 의문이 없으며, 414년(동진 安帝 義熙 8년) 또는 호태왕 사후 3년째에 ‘遷取山陵’하던 때에 비를 세우고 돌에 글자를 세기는 것은 모두 그 아들 장수왕 거련이 단독으로 처리하였음. 비문 내용은 4개 부분으로 나뉨. 첫 번째 부분은 고구려 건국의 신화전설과 호태왕의 행적을 기술함. 둘째 부분은 호태왕의 정복활동으로 64성과 1400개 촌락을 공파한 공적을 기술함. 셋째 부분은 수능연호(守陵烟戶)의 근원과 ‘國烟’․ ‘看烟’의 할당을 새겨 놓음. 마지막으로 호태왕의 “살아있을 당시의 교언” 및 연호가 “서로 전매되는 것” 등을 할 수 없다는 법전 율령이 새겨져 있음.
비문의 사료 가치는 더욱 귀중함. 1700여자에 달하는 비문에서 호태왕 재위기간의 정복전쟁 사적에 관해 비교적 커다란 편폭을 점유하며, 많은 사서에서는 실리지 않았으며, 전적의 부족을 보완할 수 있음. 말미 부분에는 수묘연호의 교언과 율령에 관해 고구려 능침연구에는 흔히 얻기 어려운 귀중한 자료임.
능비는 광개토왕이 사망한 다음 만 2년이 지난 414년에 3년상을 거행하며 건립했음. 능비가 위치한 국내성지역은 427년 평양천도 이후에도 별도로서 정치 문화의 주요 중심지였고, 고구려 멸망 후 발해의 영역이 되어 이곳에 환주(桓州)가 설치되었음. 이로 보아 능비는 발해시기까지도 안전하게 보호되었을 가능성이 높음.
국내성 지역은 금(金)대에는 동경도의 파속부 관할 아래 있었고, 원(元)대에는 동녕로에 속하였는데, 변경의 벽지에 불과했음. 고려측의 기록에도 이곳에 관한 것이 보이지 않음. 그러다가 공민왕 18년(1369) 고려가 元의 동녕부를 공격해 우라(오녀)산성을 공략했는데, 이때의 기록을 담은 용비어천가 등에는 현재의 집안지역에 황성이 있고 그 북쪽 7리되는 곳에 큰 비석이 있다고 노래했음. 이것이 414년 이후 처음 확인되는 능비에 대한 기록임. 이어 동국여지승람에서도 이 지역을 황성평이라 하였고, 장군총을 황성묘라고 했음. 그 이후 成俔 등 조선의 사대부들이 만포진에 들러 집안지역의 성과 고비 및 석총 등을 바라보며 느낀 감회를 담은 시를 남겼지만, 모두 그 유적을 여진족의 금의 것으로 여기었음. 이러한 조선 사대부들의 인식은 조선후기까지 계속 이어짐.
청나라 강희20년(1681)부터 광서 초인 1875년경까지 송화강 동남의 백두산 구역은 청조의 발상지를 보호하기 위한 명목으로 봉금지역으로 정해 한인, 몽골인뿐만 아니라 만주기인의 출입을 금지했음. 이러한 청조의 봉금정책에 따라 고구려 옛 도읍인 환인과 통구분지 일대도 봉금지역으로 지정됨에 따라 고구려의 문화유적도 황무지 속에 파묻혀 버림.
그러나 건륭 연간(1736-1795년)에 사람들이 변경을 넘어 봉금지역에 진입하여 황무지를 개간하는 등 변경 주둔 청병과 수시로 충돌하고, 나아가 대규모의 항청투쟁으로까지 번지게 되자, 청 정부는 관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개시했음. 이때 고구려의 옛 도읍인 통구, 묘아구 등 국내성지 일대 지역도 평정했음.
광서 3년경(1877년), 봉황의 동쪽 변경 밖 통구일대 안동현을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했으며, 이해 7월경에는 縣을 더 설치하고 관청을 세움. 『봉천통지·관지』에 따르면 회인현의 지현을 광서 3년(1877년) 7월에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음. 광서 3년의 상주문에도 7월에 봉천 동변도 및 관전(寬甸), 회인, 통화 등의 현을 증설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懷仁縣志』에도 章樾이 광서 3년에 지현(知縣)에 부임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章樾이 회인현의 지현으로 부임할 때 금석문 애호가인 關月山이 서계(書啓)를 맡았는데, 관월산은 여가를 이용해 민간을 방문하다가 통구의 강가, 우산 기슭에서 고구려의 비석을 발견하게 되었음. 관월산은 비석을 관찰한 다음 몇 몇 글자를 탁본을 떠서 탁본 애호가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 때부터 광개토왕릉비가 널리 전해지게 됨. 이로 보아 관월산이 광개토왕릉비의 발견자이며 처음으로 현장을 조사하고 탁본을 뜬 사람으로 여겨짐.
葉昌熾, 談國桓, 長延厚 등의 기술에 따르면 능비를 처음 발견했을 때는 푸른 이끼가 가득 끼어있어 비문으로서의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고 함. 이에 마을 사람이 비문을 손질하고, 말똥을 이용해 비면에 발라서 불에 태워 이끼를 제거했으나, 이 과정에서 비신에 균열이 생기는 등 일차적인 손상을 심하게 받기에 이르렀음.
능비가 재발견된 다음 처음에는 비면의 요철이 심하고 탁본 재료와 기술의 부족으로 원석 정탁이 이루어지지 못함. 초창기에는 주로 비면에 종이를 붙이고 가볍게 두드려 글자의 윤곽을 뜬 뒤 글자가 없는 자리에 먹을 칠하는 이른바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나, 글자의 윤곽을 모사한 뒤에 빈 자리에 묵을 칠하는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 등의 탁본을 제작함. 이러한 탁본은 자의적이든 아니든 간에 글자에 대한 오독이나 조작이 가능했음. 1881년경 청의 李超瓊이 회인현 현령 章樾로부터 받았다는 묵본이나 1883년 일본 酒匂景信이 입수한 탁본은 모두 이러한 방식으로 제작한 것임.
그 뒤 북경의 금석문 애호가들에게 능비의 존재가 알려져, 1880년 후반 전문 탁공을 북경에서 파견해 원석 탁본을 뜨게 했음. 현재 알려진 원석 탁본 중 그 제작연대를 명기한 발문이 있는 것으로서는 任昌淳 소장본이 유명한데, 1889년 李雲從이 탁본한 것임. 북경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여러 탁본과 대만의 부사년본(傅斯年本), 일본의 금자본(金子本) 등이 이에 해당함.
그 뒤 언젠가부터 능비에 석회가 발라졌고, 그런 상태에서 탁본이 행해졌음. 20세기 이후의 탁본은 거의 대부분 이러한 석회탁본임. 1907년 프랑스 학자 샤반느가 현지를 방문하여 입수한 탁본이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제작한 석회탁본에 해당함.
압록강 우안의 집안분지의 우산 아래에 웅대한 자세로 우뚝 솟아 있는데, 남쪽으로 압록강이 동북에서 유유히 서남으로 흐르고 있고, 동쪽에는 용산이 자리잡고 있음. 서쪽으로 200여m 거리에 초대형 계단석실적석묘인 태왕릉, 동북쪽 2㎞ 거리에 역시 초대형 계단석실적석묘인 장군총이 각각 위치하고 있음. 서남쪽 4㎞ 거리에 집안시 소재지가 있음.
비문의 현황에 관해 우선 비석의 상태 중 형태는, 비석의 제2면과 제4면의 표면은 평평함. 제1면의 가운데는 약간 안으로 들어갔으며, 제3면의 가운데가 약간 밖으로 나왔음. 제1면의 꼭대기 부분이 약간 밖으로 나오고, 제2면과 제4면의 꼭대기 부분은 약간 안으로 들어갔음. 제3면의 상부와 하부의 너비는 차이가 거의 없으며 가운데 부분은 약간 밖으로 볼록함. 전체 모습은 균형이 잡히고 반듯하며 또 자연적으로 형성된 운치가 있음. 조형이 소박하면서도 장엄함.
능비의 대좌는 불규칙한 화강암 석판으로 대체로 오각형임. 대좌는 비신의 하중으로 인해 세 부분으로 갈라졌음. 대좌의 중부는 비석의 하중을 받아 양측의 기초 부분보다 5㎝ 내려앉았음.
비분의 역사적 성격으로서 주변 유적 현황을 보면, 고분의 경우 우산 산기슭, 통구하와 마선구 연안, 칠성산, 하해방 등 압록강을 따라 동북-서남방향으로 기다랗게 펼쳐진 통구분지[집안분지]에는 고구려 시기의 적석묘와 봉토석실묘 등 1만 2천여기의 고분이 분포함. 능비의 서남쪽으로 200여m 거리에 초대형 계단석실적석묘인 태왕릉, 동북쪽 2㎞ 거리에 초대형 계단석실적석묘인 장군총이 각각 위치하고 있음. 태왕릉과 장군총 가운데 어느 하나가 광개토왕릉임은 거의 명확하지만 어느 것인지는 단정하기 힘든 상황임.
도성유적은, 통구하와 압록강이 만나는 합류지점의 동북쪽에 고구려 시기의 평지도성인 국내성지가 위치함. 국내성지 내부에서는 수많은 건물지가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그 주변에도 민주유적, 동대자유적, 이수원자남유적, 기상대유적 등 다수의 건물지가 분포함. 또한 국내성지에서 서북쪽 2.5㎞ 거리에는 국내성지의 군사방어성인 산성자산성(환도성)이 위치함. 이러한 국내성지와 산성자산성 등은 능비가 위치한 집안분지 일대가 고구려 두 번 째 도성이었음을 잘 보여줌.
이를 볼 때, 비분의 역사적 성격을 설명하면, 이 비는 광개토왕이 죽은 지 2년이 지난 414년에 왕의 3년상을 기념하여 왕릉 앞에 세운 〈광개토왕릉비〉임. 능비는 고려 말에 다시 발견되었지만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황제의 비로 이해했으며, 이러한 이해는 조선시기 동안 계속 지속됨. 1880년경 광개토왕릉비임을 재확인함. 능비는 총 1775자로서 비의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음. 첫 번째 부분에서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鄒牟王:동명성왕), 유류왕(儒留王:유리왕), 대주류왕(大朱留王:대무신왕) 등 3대의 왕위계승과 광개토왕의 행적에 관하여 기술하였고, 둘째 부분에서는 광개토왕 일대에 이루어진 정복활동을 기록했음. 마지막 셋째 부분에서는 능비를 지키는 수묘인의 숫자와 출신지, 그와 관계된 법령을 서술하였음. 능비에는 광개토왕대의 영토확장과 5세기 고구려의 천하인식, 그리고 삼국과 왜와의 국제관계 등에 관한 풍부한 내용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임나가라·안라의 가야제국과 거란·숙신·동부여 등이 등장하고 있어 고구려사뿐만 아니라 한국 고대사 나아가 고대 동아시아 제 민족의 동향을 연구하는 일급 금석 사료로 활용되고 있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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