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천고분(臥龍泉古墳)
출토지
요녕성 대련시 동가구향 와룡천촌(遼寧省 大連市 董家溝鄕 臥龍泉村)
연대
전국시대 중만기
조사내용
연도 | 조사기관 | 조사현황 |
1964 | 조중 공동 고고학 발굴대 (朝中共同考古學發掘隊) | 3월에 주민들이 하천제방을 쌓을 때 발견. 고분 옆을 흐르는 하천의 바닥이 점점 높아져 장마철 때마다 범람하여 무덤 위에 두께 0.3~0.45m의 모래가 쌓여 있었기 때문에 지표에서는 무덤의 흔적을 알아 볼 수 없었음. 조사기간은 5월 28일~6월 6일(6일간)임. 무덤을 남북의 두 구획으로 나누고 그 가운데에 동서로 1m 너비의 둑을 둠. 남쪽 구획(A)의 보존상태가 보다 좋았으므로 그것을 전면적으로 전개하여 묘광 한 개(묘광 4호)를 발견함. 무덤의 구조를 구명하기 위해 가운데 둑의 양끝에 작은 탐색구덩이(T1, T2)를 파내어 발굴 조사함. 북쪽 구획(B)은 이미 제방축조때 파괴되었으므로 무덤 가장자리를 찾아 범위만 확인함. |
구조특징
평면 타원형이고, 규모는 남북직경 22m, 동서 직경 14m임.
무덤은 T1·T2의 단면을 보면 당시 지표면에서 0.3m 낮은 사질 양토층 위에 축조되었음. 분구는 돌 사이에 검은 흙이 섞여있음. 남반부에 남아 있는 잔존상황을 보면 두께가 0.2~0.5m이며, 가장자리부분에서 중심으로 갈수록 점차 두꺼워짐. 돌은 주로 화강암과 편마암 등을 사용했는데 제일 큰 것은 길이 150㎝, 너비 50㎝, 두께 13㎝ 정도이며 자갈도 약간 섞여 있음. 검은 흙은 인근 유적의 것으로, 토기편이 포함되어있으며, 흙의 두께는 0.6~0.8㎝ 정도임.
토기편은 대부분이 모래질의 회갈색이며, 황갈색을 띤 것도 약간 있음. 무늬가 없는 것과 그은 무늬(劃紋)거나 찍어 만든 점무늬(刺點紋) 장식을 한 것이 있었음. 그릇 종류로는 단지(罐), 보시기(碗), 굽접시(豆) 등이 확인됨. 이 밖에 거푸집, 석촉, 가락바퀴 등이 출토됨.
5개의 묘광이 대체로 남북으로 배열되어 있음. 1호 묘광은 무덤의 중심에 있고, 2호 및 3호 묘광은 무덤의 북쪽에 치우쳐 각각 1.6~1.8m의 거리를 두고 놓여 있었음. 4호 및 5호는 무덤 남쪽에 치우쳐 1m 거리를 두고 놓여 있었음. 4호 묘광만 조사 시 정리하였고, 나머지 4개 묘광은 모두 제방 축조 때 흙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하여 부장품의 위치를 알 수 없음. 1·2·3호 묘광은 주민들 말에 의하면 묘광 바닥에는 모두 큰 판석이 있었고, 한 개 판석으로 된 것도 있고, 두 세개의 판석을 놓은 것도 있었다고 함. 모두 동서향이며 화장을 하였음. 각 묘광에서 각기 청동단검이 한 자루씩 나왔고, 그 외에 청동제 검자루(銅劍柄) 1점, 갈돌(磨石) 2점와 돌가락바퀴(石紡輪) 1점이 나왔음. 이들 묘광의 부장품들은 출토 묘광을 확인할 수 없어 통일적인 번호를 부여함.
4호 묘광(그림 2)은 1호 묘광의 남쪽에 위치. 묘광은 지표에서 0.3m 깊이에 있는데, 북쪽은 이미 파괴되었음. 묘광 내에 돌로 쌓은 석관이 있는데, 평면은 부정형이며, 석관 벽도 정연하지 못함. 묘광의 깊이는 0.2~0.3m임. 적갈색의 퇴적층 속에서는 돌 조각(碎石片)이 많이 섞여 있었음. 화장을 해서 유골이 모두 불에 타 부서졌는데 그 가운데 척추골이 비교적 잘 보존된 1개체분의 유골은 머리를 북쪽으로 향해 있음. 부장품으로는 돌 구슬(石珠) 1줄(串), 총 23점만이 확인됨. 5호 묘광은 남북향의 화장한 무덤. 부장품이 비교적 풍부한데 청동단검 1자루, 베개 모양 손잡이 가중기(石枕狀器) 1점, 작은 청동도끼(小銅斧) 1점, 청동제 마구(銅馬具) 2점와 청동 단추모양장식(銅泡) 2점이 출토됨.
무덤에서 청동기 10점, 석기 27점이 출토. 청동기는 청동단검 4점, 검자루 1점, 도끼 1점, 마구 2점, 단추모양장식 2점이며 석기는 손잡이 가중기 1점, 갈돌 2점, 돌구슬 23점, 가락바퀴 1점임. 봉토에서는 보시기, 단지, 굽접시 등의 토기류와 거푸집 1점, 돌화살촉 1점, 가락바퀴 2점 등 총 4점의 석기가 출토됨.
무덤은 T1·T2의 단면을 보면 당시 지표면에서 0.3m 낮은 사질 양토층 위에 축조되었음. 분구는 돌 사이에 검은 흙이 섞여있음. 남반부에 남아 있는 잔존상황을 보면 두께가 0.2~0.5m이며, 가장자리부분에서 중심으로 갈수록 점차 두꺼워짐. 돌은 주로 화강암과 편마암 등을 사용했는데 제일 큰 것은 길이 150㎝, 너비 50㎝, 두께 13㎝ 정도이며 자갈도 약간 섞여 있음. 검은 흙은 인근 유적의 것으로, 토기편이 포함되어있으며, 흙의 두께는 0.6~0.8㎝ 정도임.
토기편은 대부분이 모래질의 회갈색이며, 황갈색을 띤 것도 약간 있음. 무늬가 없는 것과 그은 무늬(劃紋)거나 찍어 만든 점무늬(刺點紋) 장식을 한 것이 있었음. 그릇 종류로는 단지(罐), 보시기(碗), 굽접시(豆) 등이 확인됨. 이 밖에 거푸집, 석촉, 가락바퀴 등이 출토됨.
5개의 묘광이 대체로 남북으로 배열되어 있음. 1호 묘광은 무덤의 중심에 있고, 2호 및 3호 묘광은 무덤의 북쪽에 치우쳐 각각 1.6~1.8m의 거리를 두고 놓여 있었음. 4호 및 5호는 무덤 남쪽에 치우쳐 1m 거리를 두고 놓여 있었음. 4호 묘광만 조사 시 정리하였고, 나머지 4개 묘광은 모두 제방 축조 때 흙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하여 부장품의 위치를 알 수 없음. 1·2·3호 묘광은 주민들 말에 의하면 묘광 바닥에는 모두 큰 판석이 있었고, 한 개 판석으로 된 것도 있고, 두 세개의 판석을 놓은 것도 있었다고 함. 모두 동서향이며 화장을 하였음. 각 묘광에서 각기 청동단검이 한 자루씩 나왔고, 그 외에 청동제 검자루(銅劍柄) 1점, 갈돌(磨石) 2점와 돌가락바퀴(石紡輪) 1점이 나왔음. 이들 묘광의 부장품들은 출토 묘광을 확인할 수 없어 통일적인 번호를 부여함.
4호 묘광(그림 2)은 1호 묘광의 남쪽에 위치. 묘광은 지표에서 0.3m 깊이에 있는데, 북쪽은 이미 파괴되었음. 묘광 내에 돌로 쌓은 석관이 있는데, 평면은 부정형이며, 석관 벽도 정연하지 못함. 묘광의 깊이는 0.2~0.3m임. 적갈색의 퇴적층 속에서는 돌 조각(碎石片)이 많이 섞여 있었음. 화장을 해서 유골이 모두 불에 타 부서졌는데 그 가운데 척추골이 비교적 잘 보존된 1개체분의 유골은 머리를 북쪽으로 향해 있음. 부장품으로는 돌 구슬(石珠) 1줄(串), 총 23점만이 확인됨. 5호 묘광은 남북향의 화장한 무덤. 부장품이 비교적 풍부한데 청동단검 1자루, 베개 모양 손잡이 가중기(石枕狀器) 1점, 작은 청동도끼(小銅斧) 1점, 청동제 마구(銅馬具) 2점와 청동 단추모양장식(銅泡) 2점이 출토됨.
무덤에서 청동기 10점, 석기 27점이 출토. 청동기는 청동단검 4점, 검자루 1점, 도끼 1점, 마구 2점, 단추모양장식 2점이며 석기는 손잡이 가중기 1점, 갈돌 2점, 돌구슬 23점, 가락바퀴 1점임. 봉토에서는 보시기, 단지, 굽접시 등의 토기류와 거푸집 1점, 돌화살촉 1점, 가락바퀴 2점 등 총 4점의 석기가 출토됨.
역사적 의미
무덤 구조, 장법 및 출토 유물로 볼때, 와룡천 무덤은 여순의 강상·루상 무덤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나 무덤의 입지나 출토된 청동단검의 형식은 다름. 와룡천 무덤은 평탄한 지면에 자리하고 있어 언덕위에 축조된 강상·루상 적석묘와는 입지가 다름. 무덤 중심부는 파괴되었으나, 주위에 퇴적된 석재가 타원형을 띠고 있으며, 이미 발견한 5기의 묘실 이외에(M1-M3은 현지인이 가르친 위치에 근거함) 원래 묘실이 더 있었을 가능성도 있음. 일부 묘실의 바닥에는 판석이 깔려 있으며, 화장을 채택했음. 다만 합장한 사람의 숫자는 자세히 알 수 없음. 묘실의 상면에는 할석이나 자갈이 섞인 검은색 흙이 위를 덮었음. 이상의 특징은 모두 적석묘의 형식과 전통을 지녔음.
와룡천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단검은 형식상에서 강상 무덤의 전형적 비파형동검과 뚜렷이 구분됨. 와룡천 고분에서 출토된 4건의 청동단검은 모두 과도기에 속하는데 단검의 날도 더 좁아졌고 날의 곡선도 그리 확연치 않으며, T형의 동검 손잡이가 공존하고 있음. T형 동검자루에는 정교한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손잡이 안에는 거푸집 흙이 남아 있어 토제 거푸집(泥范)으로 주조된 것을 증명하는데, 대부분 청동기가 석제 거푸집(石范)을 채택하여 주조된 것이 아닌 듯하며 야금 공예가 상당히 고도의 발전이 있었음을 의미함. 도끼(斧), 마구(馬具), 단추장식(泡飾) 등의 작은 청동기들은 주조가 거칠고 가공과 사용 흔적이 없어 전문적으로 제작된 명기로 추정됨. 청동단검은 주재료 구리(Cu) 이외에 주석(Sn)과 납(Pb)가 함유됨. 그 금속성분을 분석해보면 와룡천의 02동검과 03동검은 납(Pb)의 함유률이 20%와 16%로 매우 높은데 납이 함유량이 높은 청동기는 재질이 물러서 실용할 수 없음. 따라서 이 청동단검 역시 부장한 명기(明器)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음. 반면 강상·루상 무덤의 청동단검은 주석(Sn)의 함유률이 높아 청동의 경도(硬度)가 증가하여 실용할 수 있음.
요동반도지역의 청동기문화는 우가 타두적석묘로 대표되는 전기(서주시기), 여순 강상묘로 대표되는 중기(전국전기), 여순 루상묘로 대표되는 말기(전국중말기)로 구분됨. 강상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단검이 전형적 비파형동검이라는 점에서 와룡천 무덤 출토의 청동단검은 이보다는 늦은 시기이며, 루상 무덤의 연대와 서로 비슷하거나 약간 늦을 것으로 추정. 따라서 와룡천 고분은 청동시대 말기, 즉 전국시대 중만기에 해당함.
와룡천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단검은 형식상에서 강상 무덤의 전형적 비파형동검과 뚜렷이 구분됨. 와룡천 고분에서 출토된 4건의 청동단검은 모두 과도기에 속하는데 단검의 날도 더 좁아졌고 날의 곡선도 그리 확연치 않으며, T형의 동검 손잡이가 공존하고 있음. T형 동검자루에는 정교한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손잡이 안에는 거푸집 흙이 남아 있어 토제 거푸집(泥范)으로 주조된 것을 증명하는데, 대부분 청동기가 석제 거푸집(石范)을 채택하여 주조된 것이 아닌 듯하며 야금 공예가 상당히 고도의 발전이 있었음을 의미함. 도끼(斧), 마구(馬具), 단추장식(泡飾) 등의 작은 청동기들은 주조가 거칠고 가공과 사용 흔적이 없어 전문적으로 제작된 명기로 추정됨. 청동단검은 주재료 구리(Cu) 이외에 주석(Sn)과 납(Pb)가 함유됨. 그 금속성분을 분석해보면 와룡천의 02동검과 03동검은 납(Pb)의 함유률이 20%와 16%로 매우 높은데 납이 함유량이 높은 청동기는 재질이 물러서 실용할 수 없음. 따라서 이 청동단검 역시 부장한 명기(明器)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음. 반면 강상·루상 무덤의 청동단검은 주석(Sn)의 함유률이 높아 청동의 경도(硬度)가 증가하여 실용할 수 있음.
요동반도지역의 청동기문화는 우가 타두적석묘로 대표되는 전기(서주시기), 여순 강상묘로 대표되는 중기(전국전기), 여순 루상묘로 대표되는 말기(전국중말기)로 구분됨. 강상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단검이 전형적 비파형동검이라는 점에서 와룡천 무덤 출토의 청동단검은 이보다는 늦은 시기이며, 루상 무덤의 연대와 서로 비슷하거나 약간 늦을 것으로 추정. 따라서 와룡천 고분은 청동시대 말기, 즉 전국시대 중만기에 해당함.
자연환경
금현(金縣) 동쪽 30여㎞ 떨어진 동가구향(董家溝鄕) 와룡천촌에 위치. 와룡천촌 동쪽에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작은 하천이 있는데 고분은 바로 그 왼쪽 기슭에 위치.
유물정보
청동단검(靑銅短劍) 4점, 검자루 1점, 도끼(斧) 1점, 마구(馬具) 2점, 단추모양장식 2점, 석침상기(石枕狀器) 1점, 석봉(石棒) 2점, 석제구슬(石珠) 23점, 방추차(紡錘車) 3점, 완(碗) 1점, 관(罐) 1점, 두(豆) 1점, 석범(石范) 1점, 석촉(石鏃) 1점
참고문헌
· 사회과학원출판사, 「와룡천」『중국동북지방의 유적발굴보고(1963-1965)』, 民族文化, 1965
·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臥龍泉」『雙砣子與崗上-遼東史前文化的發現和硏究』, 科学出版社, 1996
·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臥龍泉」『雙砣子與崗上-遼東史前文化的發現和硏究』, 科学出版社,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