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합성 유적(喇哈城址)
출토지
요령성 환인현 북전자향 만용배촌 혼강 우안의 소평원상에 위치(遼寧省 桓仁縣 北甸子鄉 灣龍背村 渾江右岸 小平原上 位置).
조사내용
연도 | 조사기관 | 조사현황 |
2002 | 환인현문물관리소 (桓仁縣文物管理所) | 懷仁縣志』의 기록을 토대로 桓仁縣 北甸子 일대에서 나합성지를 찾으려고 했으나 발견하지 못함. |
2003 | 환인현문물관리소 (桓仁縣文物管理所) | 桓仁縣 北甸子鄕 彎龍背村 혼강 우안 평지에서 성벽 발굴 |
2004 | 왕준휘, 양지룡 (王俊輝, 梁志龍) | |
2006 | 왕종안, 기비 (王從安, 紀飛) | 古道, 고분군, 채석장 등 조사 |
구조특징
성돌로 사용된 석재는 잘 다듬었는데 대부분 쐐기형 돌로 고구려 고성의 건축 성돌과 같고, 소평원 동측 마을 주민들이 운반한 성돌은 대부분이 청색을 띤 큰 돌로서 이 지역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고 함.
2003년 봄에 성벽 85m를 조사하여 성벽 기단부를 발굴했는데, 위쪽 너비는 약 1m였다고 함.
2006년도에 성터 부근에서 古道, 古道渡口, 고분군, 채석장 등을 확인했다고 함.
2003년 봄에 성벽 85m를 조사하여 성벽 기단부를 발굴했는데, 위쪽 너비는 약 1m였다고 함.
2006년도에 성터 부근에서 古道, 古道渡口, 고분군, 채석장 등을 확인했다고 함.
역사적 의미
지정학적 위치로 봤을 때, 혼강과 그 지류인 부이강이 교차하는 지점으로서 혼강 수로 교통의 요충지로 실제 20세기 전반에도 혼강 수로를 운항하는 배들이 이곳까지 왕래했으며 또 이 지역은 蘇子河 유역에서 富爾江 하류 방면으로 내려와 다시 혼강 지류인 신개하를 경유하여 고구려 두 번째 도성인 국내성으로 나아가는 육상 교통로상의 요충지이기도 함.
나합성은 쐐기형 돌로 축조되었다는 점에서 흔히 고구려 시기의 평지성으로 추정되고 강변의 평지상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군사적인 중진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또한 아직까지 고구려시기의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고, 성벽의 축조방식이 상세히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구려 시기의 성곽이라고 단정할 만한 명확한 근거도 없는 상태임.
최근 나합성을 현도군의 현성, 고구려 초기 도성인 졸본성, 비류국의 소재지 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지만, 나합성 자체가 고구려 초기 또는 그 이전에 축조되었는지 여부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들이 확실한 논거를 확보했다고 보기는 어려움.
나합성은 쐐기형 돌로 축조되었다는 점에서 흔히 고구려 시기의 평지성으로 추정되고 강변의 평지상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군사적인 중진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또한 아직까지 고구려시기의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고, 성벽의 축조방식이 상세히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구려 시기의 성곽이라고 단정할 만한 명확한 근거도 없는 상태임.
최근 나합성을 현도군의 현성, 고구려 초기 도성인 졸본성, 비류국의 소재지 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지만, 나합성 자체가 고구려 초기 또는 그 이전에 축조되었는지 여부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들이 확실한 논거를 확보했다고 보기는 어려움.
자연환경
평지는 혼강 우안에 남북방향으로 기다랗게 뻗어 있는데, 남북 길이 2㎞, 동서 너비는 300-600m 전후이고, 소평원의 서쪽으로는 산봉우리가 약 5㎞ 가까이 연이어져 있는데, 그 모양이 흡사 용과 같다하여 ‘龍山’이라 부르며, 또한 산 아래에는 오래된 廟宇가 있다 하여 ‘大廟山’으로도 부른다고 함.
20세기 전반에 소평원 북단에 10여호의 민가가 있었는데, 龍山의 背面에 위치했다고 하여 ‘彎龍背村’이라고 불렸다고 함.
소평원 동쪽에는 서쪽의 龍山과 서로 마주하며 흙으로 이루어진 구릉이 소평원을 감싸며 기다랗게 이어지고 있는데, 길이는 5㎞에 이름, 이 구릉이 소평원의 동쪽에 위치했다고 하여 ‘東崗’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懷仁縣志』의 ‘東崗屯’은 바로 이 동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고, 이 구릉은 황토로 이루어져 있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용과 같다하여 ‘龍崗’으로 부르기도 함.
-이처럼 소평원은 서쪽의 용산과 동쪽의 동강으로 감싸여 있으며, 용산과 동강이 만나는 서남쪽 입구의 폭은 190m에 불과한데, 소평원 사실상의 사방이 용산과 동강에 의해 둘러싸인 것이나 마찬가지로서, 이에『懷仁縣志』에서 사방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서술한 것으로 여겨짐.
20세기 전반에 소평원 북단에 10여호의 민가가 있었는데, 龍山의 背面에 위치했다고 하여 ‘彎龍背村’이라고 불렸다고 함.
소평원 동쪽에는 서쪽의 龍山과 서로 마주하며 흙으로 이루어진 구릉이 소평원을 감싸며 기다랗게 이어지고 있는데, 길이는 5㎞에 이름, 이 구릉이 소평원의 동쪽에 위치했다고 하여 ‘東崗’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懷仁縣志』의 ‘東崗屯’은 바로 이 동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고, 이 구릉은 황토로 이루어져 있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용과 같다하여 ‘龍崗’으로 부르기도 함.
-이처럼 소평원은 서쪽의 용산과 동쪽의 동강으로 감싸여 있으며, 용산과 동강이 만나는 서남쪽 입구의 폭은 190m에 불과한데, 소평원 사실상의 사방이 용산과 동강에 의해 둘러싸인 것이나 마찬가지로서, 이에『懷仁縣志』에서 사방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서술한 것으로 여겨짐.
유물정보
2003년도 봄에 요, 금, 명, 청 시기의 토기나 자기편과 함께 사질회색토기(夾沙灰陶)의 기둥모양 손잡이 3개, 사질토기편(夾粗沙土器片) 다수를 출토했는데, 기둥모양 손잡이는 고구려 시기 이전의 토기편으로 추정됨.
참고문헌
· 蘇長淸, 「高句麗早期平原城-下古城子」『遼寧省本溪丹東地區考古學術討論論文集』, 1985
· 梁志龍, 「桓仁地區高句麗城址槪述」『博物館研究』 1992-1, 1992
· 王禹浪·王宏北, 「中國遼寧省桓仁縣高句麗喇哈古城址」『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田中俊明, 「高句麗の興起と玄菟郡」『朝鮮文化硏究』 1, 東京大學文學部朝鮮文化硏究室, 1994
· 田中俊明·東潮,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余昊奎, 「桓仁 蝲哈城址」『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노태돈, 「고구려의 기원과 국내성 천도」『한반도와 중국 동북 3성의 역사문화』, 서울대 출판부, 1999
· Mark E·Byington, 「Problems Concerning the First Relocation of the Koguryo Capital」『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유산』, 2004
· 王從安·紀飛, 「卒本城何在」『東北史地』 2004-2, 2004
· 王從安·紀飛, 「說話喇哈城」『桓仁縣報』, 2006
· 王俊輝·梁志龍, 「北甸子尋古」『桓仁縣報』, 2004
· 조법종, 「고구려 초기도읍과 비류국성 연구」『백산학보』 77, 백산학회, 2007
· 梁志龍, 「桓仁地區高句麗城址槪述」『博物館研究』 1992-1, 1992
· 王禹浪·王宏北, 「中國遼寧省桓仁縣高句麗喇哈古城址」『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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